- 2015년 03월 좀 화창한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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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에서 계단을 올라오는데 문득 “내가 들러리야?”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울분과 짜증이 섞인 여성의 성마른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 말의 의미와 상관없이 ‘들러리’라는 말의 발음이 무척 아름답게 내 마음에 울렸다. ‘들, 러, 리…’에서 ㄹ은 유음流音이기 때문에 무언가 부드럽게 잘 풀려서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렇듯이 ‘들러리’란 서양식 결혼식에서 신랑이나 신부를 식장으로 원활히 인도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처음 들러리는 악마나 나쁜 요정이 아름답고 행복해 보이는 신부를 시샘해 해를 끼칠까 봐 비슷한 옷을 입은 친한 친구들이 그 나쁜 악마를 헷갈리게 만들어 신부를 보호한다는 뜻으로 생겨났다고 한다. 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어느 유대인 학자의 결혼식에 초청받아간 적이 있는데 브라이즈메이드와 베스트 맨이 신랑 신부와 거의 똑같이 차려입고 먼저 입장하여 나중에 한마디씩 신랑과 신부에 관한 재미난 추억담을 들려주는 것을 보고 참 좋은 인상을 받았다. 들러리가 꼭 향단이나 방자가 아니며 ‘잘 풀리게 하는 사람’이란 느낌이었다.
지하철역의 그 여자처럼 우리도 살다 보면 ‘오늘 완전히 들러리 섰네’라는 생각이 들 만큼 섭섭하고 소외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들러리 섰다”고 말하면 갑자기 서 있는 땅이 푹 꺼지고 그림자같이 자기 색채가 지워지는 느낌을 받기도 할것이다. 누구나 세상의 주인공으로 살고 싶은 생각이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아무 때나 다 자기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세 살 어린아이도 안다. 그래도 계속적으로 ‘나는 이 세상의 들러리야’라는 우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들러리란 말은 허드레, 변두리, 소외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 고통스러운 절망으로 더욱 아프게 찌를 것이다. 그런 생각이 계속된다면 들러리란 말의 부정적 의미보다 긍정적 의미를 얼른 생각해내는 게 좋겠다.
들러리란 말에는 시차성이 깃들어 있다. 봉건시대와 달라서 한번 들러리가 절대적 신분의 들러리로 고정된 것도 아니고 시간이 흐르면 또 그 위치가 바뀌기도 할 것이다. 시간은 때로 절대평가를 하지 않고 은근히 상대평가를 하기도 한다. 시간의 상대평가를 생각하며 오늘은 모차르트를 들어도 내일은 슈베르트를 들을 수도 있다. 거대한 우주를 생각하면 지금 이 지구도 어느 별인가의 들러리이며 절대 권력인 태양도 어느 은하계의 들러리일 수 있다. 어느 모서리 달동네라도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있고 사랑으로 받쳐주어야 할 사람이 있고 열심히 할 일이 있으면 그것으로 천국이다.
여고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클로버가 가득한 초록 풀밭 속에서 네 잎 클로버를 찾아본 적이 있다. 결국 그 많은 클로버 잎들이 다 하잘것없는 허드레 들러리로 내쳐졌다. 네 잎 클로버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그때 그런 말이 문득 생각났다. “세 잎 클로버가 네 잎 클로버다. 그렇지 않은가?” 결국 들러리가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면 가슴에 창문이 뻥 뚫린 듯 자유롭고 행복해지지 않던가? 그런 자유와 행복을 알아보고 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인문학적 발견의 기쁨이라 부른다.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비스 와바심보르스카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연기하고 있는 이 배역이 어떤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역할은 나만을 위한 거라는 것이며/ 내 맘대로 바꿀 수 없다는 사실.” 그녀도 그런 변두리 허드레 의식으로 외로워한 적이 있었을까? 우리는 누구나 ‘나만을 위한 역할’이 있다고 역설하는 것을 보면.
살다 보면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조력자여서 더 즐거울 때가 있습니다. 내가 격려한 친구가 어려움을 거뜬히 이겨내는 것을 볼 때, 내가 돌본 자녀가 무럭무럭 성장하는 것을 볼 때, 내가 협업한 팀이 놀라운 성취를 이루어 다함께 기분 좋은 회식을 할 때면 주인공 못지않게 삶의 즐거움을 느끼게 되지요. 글을 쓴 김승희 교수는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이자 유명 시인입니다. 1973년에 경향신문 신춘문예에서 시 ‘그림 속의 물’이 당선된 후 1979년에 첫 시집 <태양미사>를 필두로 지금까지 숱한 명작으로 우리를 지적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는 소설 ‘산타페로 가는 사람’이 당선되었으며, 시집, 산문집, 소설집을 넘나드는 무한한 작품 세계로 대중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1992년에 제5회 소월시문학상을, 2003년에 제2회 고정희상을 수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