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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아티스트 박경근∙가구 디자이너 조재원 예술과 기술이 공존하는 필동 팩토리
LA에서 온 디자이너와 청계천 엔지니어가 만났다. 오랜 시간 해외에 거주하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고민해온 미디어 아티스트가 오작교 역할을 했다. 디자인과 아트, 엔지니어링이 모여 강렬한 스파크를 일으키는 필동로 삼각 러브 스토리.

미디어 아티스트, 가구 디자이너, 큐레이터, 엔지니어가 함께 창작 활동을 펼치는 플레이그라운드. 1층은 가구 쇼룸 (썸 컬렉티브)과 제작 공방(아주정밀), 2층은 박경근·조재원 작가의 작업실, 3층은 박경근 작가의 주거 공간으로 구성했다. (왼쪽부터) 썸 컬렉티브를 운영하는 조윤종 대표, 미디어 아티스트 박경근, 가구 디자이너 조재원, 아주정밀 송병익 대표.


4차 산업혁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디자이너-메이커’ 시대를 열었다. 디자이너-메이커는 제품, 서비스, 콘텐츠 등을 스스로 기획하고 개발하고 판매하는 1인 크리에이터를 말한다. 그들에게는 복합적이면서도 유연하고 독립적이면서도 상생할 수 있는 일터가 필요하다. 실리콘밸리의 디자이너-메이커가 카페나 작은 동아리방에 모여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나누며 비즈니스를 확장한 것처럼 가치관이나 종교, 교육의 정도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토론하고 지식을 공유하며 때론 협업해 창의적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최근 국내에서도 다양한 분야의 크리에이터가 모여 1+1 이상의 시너지를 내며 작업하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중구 필동로, 남산 아래 자리한 미디어 아티스트 박경근의 스튜디오도 디자이너-메이커 시대에 부합하는 좋은 예다. 외벽의 그라피티가 범상치 않은 인상을 주는 3층 건물은 박경근 작가의 스튜디오와 주거 공간, 가구 편집매장 ‘썸 컬렉티브SOME Collective’와 제작소 ‘아주정밀’로 구성된다. 콘셉트는 삼각관계. 작가, 엔지니어, 큐레이터 등 세 분야의 사람들이 만나 서로 해쳐 모여 하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한 건물에서 디자인-제작-판매가 모두 이뤄진다는 순환의 의미를 담았다.


삼각형 모듈이 확장하는 월 시스템. 여섯 개의 모듈을 케이블 타이로 고정해 다양한 형태로 구성할 수 있다. 조재원 작가(j1studio.com) 작품으로 썸 컬렉티브(somecollective.com) 문의. 

통창 너머로 남산 풍경이 펼쳐지는 박경근 작가(kelvinkyungkunpark.com)의 2층 작업 공간. 레노베이션 설계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윤해영 건축가가 맡았고, 샤우 스튜디오(shawoo.co.kr)에서 시공했다.
LA에서 필동까지 ‘운명’적 만남
박경근 작가는 주재원인 부모를 따라 다섯 살 때부터 해외에서 거주했다. UCLA에서 디자인과 미디어 아트를 전공하고, 칼아츠CalArts(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에서 필름&비디오를 공부했다. 2002년부터 뉴욕, LA를 기반으로 미디어 아티스트로 활동하다 2006년 늦깎이 군 입대로 귀국한 그는 한국인이자 이방인으로서 느낀 정체성의 혼돈을 철강 산업과 군대라는 가장 한국적 소재의 다큐로 풀어낸다. 조재원 작가 역시 이민 2세대로 여섯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패서디나 아트센터 칼리지 오브 디자인Art Center College of Design에서 환경디자인을 전공하고 2008년 LA에 J1 스튜디오를 설립해 가구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결혼하면서 한국행을 택했다. 우연인 듯 필연처럼 비슷한 시기에 미 서부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두 사람은 2년 전 서울에서 만났고, 현재 2층 작업실을 따로 또 함께 쓴다. 한국 생활 10년 선배인 박경근 작가는 조재원 작가의 한국 적응기를 도와주는 일등 공신이다. 한국의 빨리 빨리 문화의 선기능을 효율적 작업을 위해서는 상황에 따라 외주 생산 시스템을 활용하는 게 효과적이라는 등 비교적 현실적 조언을 해준다.

“반면 저는 무조건 몸이 먼저 움직여요. 어떤 작업이든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투입되길 원하죠. 디자인만 하고 외주로 제작을 맡겼을 때는 도면을 보내는 순간 그 관계가 끝나요. 만들다가 의도한 대로 되지 않을 때 오히려 섬광처럼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그 기회를 놓치는 거죠.” 무엇이든 제손으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메이커의 손길은 건물 곳곳에서도 엿볼 수 있다. 1층 쇼룸은 건물의 러프한 느낌에 맞춰 옛날 학교에서 쓰던 폐마루를 시공하면서 중간중간에 컬러를 입혀 패턴에 묘미를 더했다. 낡은 계단을 나무로 감싸는 작업을 할 때는 잘못 커팅한 짧은 판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앞뒤로 단 차이를 두고 붙이니 좀 더 리드미컬한 디자인이 완성됐다. 3층 박경근 작가의 주거 공간에 시공한 주방 가구도 인상적이다. 삐뚤빼뚤한 건물의 묘미를 살리기 위해 사선 축으로 길게 배치한 주방 가구는 흔히 스시집에서 사용하는 낙엽송으로 제작하고 블랙 반광 아크릴 페인트를 도장해 모던하다.

한편 2층 작업 공간은 두 사람의 궤적만큼이나 자유분방하다. 사실 무언가를 치장하는 것보다는 철거하는 데 많은 비용을 투자했다는 박경근 작가. 바닥과 천장을 털어내 천장고를 1m 가까이 높이고 천장에 콘크리트를 구조적으로 보완하는 필름만 시공해 러프한 느낌을 최대한 살렸다. 공간의 백미는 단연 오렌지색 새시의 통창. 
“밀도 높은 도시에 사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프레임을 통해 한 발짝 물러서서 볼 수 있도록 했어요. 홍콩 누아르 영화라 생각하면 쉬워요. 도시의 어두운 면면이 영화 프레임에 담기면 아름답게 느껴지죠. 하지만 막상 그곳에서 산다고 생각하면 우울해요. 한국의 도시 풍경도 눈에 거슬리는 게 많아요. 전봇대, 전선 등등 알게 모르게 시각적으로 스트레스를 주죠. 반면 유럽의 휴양지에 가면 눈이 시원해지면서 어깨가 열려요. 아름다움을 찾는 일은 능동적으로 해야 해요. 다행히 이곳은 남산 자락이 바로 옆에 펼쳐져 시야가 트인 편이에요.”


아주정밀에서 나온 철 조각으로 뚝딱 만든 썸 컬렉티브 간판. 알파벳 'S-O-M-E'를 표현했다. 

세 개의 삼각 도형으로 이뤄진 엠스툴. 완벽히 끼워 맞춰지는 구조로 조합하는 것에 따라 스툴, 벤치, 책장으로 사용할 수 있다. 

2층 조재원 작가의 작업 공간. 이곳에서는 주로 디자인 작업과 미팅이 이뤄지고, 직접 나무를 켜는 작업은 용산 작업실에서 진행한다. 

아주정밀과 한 지붕 가족이 되면서 스틸 작업도 시작한 조재원 작가. 공방에서 바로바로 의논하며 솔루션을 찾을 수 있어 효율적이다.
세 남자의 삼각관계
유튜브, 페이스북 라이브, 인스타그램 스토리…. ‘실시간’ 그리고 ‘영상’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가 지배하는 시대지만 박경근 작가는 <청계천 메들리> <철의 꿈> <군대: 60만의 초상> 등 비교적 아날로그적 주제를 다뤄왔다. <청계천 메들리>를 작업하면서 을지로 산업 역군의 삶에 스며들었고, <철의 꿈>에서는 여전히 손 노동이 필요한 현장에서 인간성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었다. “테크놀로지 자체에는 관심이 있지만 그 기술을 활용해 뭘 만드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학부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IT 붐이 일면서 미디어 아트로 이름이 바뀌었죠. 커리큘럼에 가상현실 같은 것도 추가됐는데 흥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기술을 쓰더라도 결국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야 예술적 퀄리티가 완성된다고 믿어요.”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에 선정되고, 거대한 키네틱 설치 작업을 준비했다. 전기, 기계, 회로, 캐드까지 정밀기계공학과 금속 제조 기술을 겸비한 아주정밀 송병익 대표는 박경근 작가의 복잡한 키네틱 아트 작품의 구조와 설비를 풀어준 해결사다. 송병익 대표와 작업하면서 실험적으로 쇠구슬이 돌아가는 걸 만들어봤는데 쇠를 깎고 연마하는 과정을 보며 박 작가 역시 물성에 대한 동경과 경외심이 생겼다. 올해 말 상하이에서 진행하는 전시 역시 유리 구조물과 영상을 합치는 설치 작업이다. 정밀 엔지니어링이 꼭 필요한 작업이라 송병익 대표도 엔지니어로서 상하이 미팅에 함께 다녀왔다.

주로 나무 가구를 선보여온 조재원 작가는 최근 전체를 스틸로 만드는 의자를 디자인했다. 곡선 타입의 튜브와 미러 가공한 스테인리스 스틸은 구조체이자 곧 마감 자체로 마치 하나의 조각품을 보는 듯하다. 한국은 목공 수준이 상당히 높다. 손재주가 좋아 제작 스킬에 흠잡을 데가 없다. 목재 가구 이상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고민할 즈음 송 대표를 만났다. 연금술사처럼 철을 다루는 그는 가구에 필요한 나사 하나까지도 직접 제작하거나, 수많은 샘플에서 선택하도록 하는 디테일의 끝판왕이다. 말 그대로 일당백! 생각해보면 너무나 외국적 사고방식을 지닌 두 사람과 가장 한국적인 사람이 만난 것인데, 이 콘트라스트가 어색하지 않다. 세대와 가치관의 차이를 차치하고, 퀄리티 없이 트렌디한 것보다는 퀄리티 있는 생산물을 추구하고 싶다는 모토가 통했기 때문이리라.


건물 3층 박경근 작가의 주거 공간. 내력벽을 사이에 두고 주방 건너편에 침실, 거실, 다이닝룸이 나란히 자리한다. 주방 가구는 조재원 작가가 직접 디자인한 것. 

스튜디오처럼 오픈된 주거 공간에 시각적 거슬림이 없도록 꼭 필요한 가구만 배치했다.

붉은색이 인상적인 화장실. 

아주정밀에서 재단하고 남은 자투리 판으로 화장실 문에 동그란 표식을 붙였다. 오른쪽 벽에 박경근 작가의 미디어 아트 작품을 설치했다. 

외벽의 그라피티가 자유로운 감성을 전한다.
제이와 레이의 썸
1층 가구 쇼룸 썸 컬렉티브는 디자이너 가구와 예술 작품을 만날 수 있는 편집매장이다. 첫 컬렉션으로 조재원 작가의 J1 스튜디오와 김상훈 작가, 타이그 오닐, 탈루, 박경근 작가의 작품을 선보인다. 목재 가구와 금속 설치 작업, 미디어 아트를 아우르는 이 공간은 조재원 작가의 친형이자 사진을 전공하고 큐레이터로 활동한 조윤종(Ray Jho) 대표가 운영한다. “아직 왕성하게 활동하지 않지만 재능 있는 젊은 작가를 많이 만나보고 싶어요. 동시에 제가 제일 잘 아는, 옆에서 오랜 기간 봐온 동생의 가구를 제대로 소개하고 싶은 마음도 크고요.”

조윤종 대표는 조재원 작가가 학부 시절부터 만든 가구 를 촬영하고, 전시 때는 기념 포스터도 제작하는 등 언제 나 든든한 지원군이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케이블 타이로 연결하는 모듈 월 시스템. 여섯 개가 하나의 유닛으로 기존 가구를 피해서 유동적으로 벽면에 부착할 수도 있고, 코너링 연출도 가능한 제품이다. 2010년 DIY 문화가 붐을 이룰 때 미국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은 제품으로, 바닥에 세우고 유리 상판을 올리면 테이블로도 변신한다. 조재원 작가는 누구나 쉽게 제작할 수 있도록 가구 설계 구조도를 오픈 소스로 공유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디자인하고 유럽에서 도면을 받아 제작하는 게 가능한 시대 아닌가.

실제 그가 오픈 소스로 공유한 DIY 도면 중 구글 스케치업 CNC 커팅 교재로 활용하는 것도 있다. 자신의 공간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고 즐길 수 있다는 점 역시 J1 가구의 특징. ‘디자이너는 쓰임을 제안할 수 있지만 관여하지 않는다’를 모토로 작가의 손을 떠나 새로운 정체성과 기능이 부여되는 점이 흥미롭다. 세 개의 삼각 도형으로 이뤄진 ‘엠스툴M. Stool’은 스툴의 기능을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도형을 어떤 상상력으로 조합하고 움직이느냐에 따라 조각적 블록(때론 동물 형태로!)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기하학 구조는 나무의 물성을 만나 공간의 온도를 높여준다. 친구와 형, 가까운 사람일수록 함께 일을 하는 게 쉽지 않다. 특히 작가는 ‘공유’라는 개념과 완전히 배치되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서로 도와주자”가 아닌 “내 것만 신경쓰자”가 외려 더 설득력 있게 들리기도 한다. 박경근 작가는 ‘쿨한 상생’의 노하우는 “남이 뭘 하는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것”에 있다고 조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는 게 우선이다. 이 건물의 플레이어들은 매일 아침 출근하면 2층 작업실로 올라온다. 점심시간까지 네 시간 정도, 때론 밤늦게까지 아무 일 없이 놀 때도 많다. 조재원 작가는 늘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박경근 작가는 누가 있든 없든 즉흥적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한다. 취재하는 날에는 박경근 작가의 제자들이 놀러왔다. 뉴욕에서 전시를 앞둔 한 제자는 작업에 관해, 한 제자는 막 시작한 구두 디자인에 관해 한참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다 저녁 무렵에야 돌아갔다. 기성 세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한 것처럼 다음 세대가 생각하는 방식, 사는 방식, 보는 방식, 느끼는 방식 모두 궁금하다는 박경근 작가.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늘 이방인이던 삶을 헤치고 ‘우리가 낄 틈이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남산 자락에 창작의 뿌리를 내린 조재원 작가. 을지로에 이어 필동에서 새로운 연대기를 써 나갈 장인까지... ‘퀄리티 있는 콘텐츠’를 향한 디자인과 아트, 엔지니어링의 기분 좋은 삼각관계가 더 굳건해지길 바란다.


오픈 하우스
박경근, 조재원 작가의 작업 공간과 편집매장 썸 컬렉티브를 둘러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모듈 가구와 미디어 아트, 사진 등 작가와 작업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일시 7월 29일(월) 오후 2시
장소 서울시 중구 필동로8길 25 썸 컬렉티브 참가비 2만 원(정기 구독자 1만 원)
인원 8명
신청 방법 <행복> 홈페이지 '이벤트' 코너에 참가 이유를 적어 신청하세요.

글 이지현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