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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양군 달큼하고 맵싸한 우리 고추
영양군 수비면에는 토종 고추 농사를 짓는 세 명의 농부가 있다. “못되게 맵지 않어. 달고 시원하게 매워.” 어쩔 수 없이 고추를 선택하고 생의 절반을 고추와 함께했다. 역병이 들어 1년간의 수고가 허무하게 무너진 적도 많다. 그럴수록 욕심을 버리고 고추 종자를 보관하며 서로를 의지했다. 세 농부의 우정이 단단해질수록 고추가 제대로 영글고 맛이 들어가는 것 아닌가.

4백여 년 전 우리나라에 들어온 고추는 없어서는 안 될 식재료다. 또한 금줄에 붉은 고추를 매달아 아기를 낳은 집 대문에 걸어 잡귀를 쫓는 역할도 했다.
우애 깊은 고추 삼총사
“형님 올해 고추는 어때요?” 막내아우가 묻는다. “뭘 물어. 병 없고 튼실허니 올해는 꽤 괜찮겠어.” 큰형님이 답한다. 푸르른 고추밭을 가로질러 가는 둘째의 얼굴에도 함박꽃이 핀다. 깊고 깊은 경북 영양군 골짜기 아래 위치한 수비면 오기리. 산세가 워낙 깊어 예부터 나라에 큰 난리가 날 때마다 사람들이 숨어들었다는 곳. 그 끝에 닿으려면 고불고불한 산길을 쉼 없이 달려가야 한다. 공기 좋고, 물 맑은 이 지역의 여름은 고추의 계절이다. 뜨거운 햇볕이 키운 실한 풋고추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무렵 새빨갛게 물든다. 바로 이 고추가 영양군 수비면에서 대대로 재배해온 토종 고추 수비초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부분 농가에서 수비초를 심어왔다. 그만큼 흔했다. 1990년대 생명력이 강한 개량종이 보급되면서 수비초의 재배 면적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그 맛을 잊지 못해 위세대에게 종자를 물려받아 재배해온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총사는 수비면에서 토종 고추 농사를 고수하는 몇 안 되는 농부다. 큰형님인 허정호 농부는 1945년 만주에서 태어났다. 그해에 해방되어 부모를 따라 이곳에 정착했으니 영양군이 고향이나 다름없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농사를 지었습니다. 아버지가 조금씩 재배하던 고추의 씨앗을 받아 지금까지 해왔으니 우리집 수비초의 역사는 60년 정도 되겠네요.” 영양군 수비면이 고향인 이영규 농부는 서른 즈음에 큰형님을 만나 지금껏 의지하며 고추 농사를 짓고 있다. 막내 전상용 농부는 가장 늦게 고추 농사에 합류했다. 울산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2005년 즈음에 귀농해 두 형님을 모시며 고추밭을 일군다. 고추밭에서 도원결의라도 한 듯 세 농부의 우애는 잘 여문 수비초처럼 단단하다. 매일 만나 이야기하는 화젯거리는 ‘수비초의 맛과 향을 어떻게 알릴 것인가’라고 한다.


달고 아삭한 수비초
경북 영양군은 우리나라의 최대 고추 생산지다. 수비면은 지대가 해발 300m 이상이라 땅이 비탈지고 유기질이 풍부해 고추가 자라는 데 적합하다. 청정한 자연 환경도 한몫했으리라. “지대가 높아 일교차가 10℃ 이상 납니다. 춥고 바람이 잘 통해 다른 지역보다 병충해가 적어요.” 전상용 농부는 수비초의 특이한 적응력을 장점으로 꼽았다. 영양에서만 잘되고 다른 지역에서는 역병과 탄저병 등 병해와 바이러스에 취약해 잘 적응하지 못한다고. “흔히 고추는 맵다고 하잖아요. 수비초는 달고 아삭합니다. 못되게 매운 것이 아니라 기분 좋게 달고 시원하게 매워요. 은근히 중독성이 있어요.” 이영규 농부와 허정호 농부는 “수비초는 청양고추처럼 독특한 풍미가 있는데, 마치 과일 같은 상큼한 향이 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수비초는 다른 고추에 비해 당도가 굉장히 높은데, 약 16~18브릭스에 달해 덜 익었을 때 먹어도 좋다. 생김새도 독특한데, 날씬하면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돼지 꼬리처럼 휙 말려 올라간다. 세 농부는 1월 중순부터 고추 농사 준비를 서두른다. 마지막 서리가 내린 뒤 이른 봄에 모종을 키워 4월과 5월 본밭에 정식한다. 이때 작은 산처럼 두둑을 높게 만들어 적당한 간격으로 심어야 물이 잘 빠져 고추가 곧게 자란다. 고추는 뿌리가 얕고 줄기 위쪽에서 가지를 많이 치기 때문에 무거워 쓰러지기 쉽다. 열매가 맺히기 전 지지대를 꽂고 끈으로 묶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틈틈이 거름을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맘때쯤 풋고추를 수확하고 나면 8월 중순부터 홍고추가 열리기 시작하는데, 이를 따다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서 말려 태양초나 고춧가루로 만들어 판매한다. 가장 예쁘게 생긴 놈만 골라 씨를 털어 내년 농사를 위한 종자를 보관하면 얼추 한 해 농사가 마무리된다. 올해 초부터는 영양군의 토종명품화사업단에서 세 농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수비초의 특장점을 살려 판로를 제대로 확보하고 홍보할 예정이라고 하니, 삼총사의 근심을 한층 덜게 됐다.

왼쪽부터 끝이 돼지 꼬리처럼 말려 올라가는 수비초, 매운맛이 강한 유월초, 칠성초, 토종.

고추 농사를 지을수록 우정이 단단해진다는 삼총사가 수비초가 매달린 고추밭에 섰다. 왼쪽부터 막내 전상용 농부, 큰형님 허정호 농부, 둘째 이영규 농부.

두 달 전부터 재래종 고추를 찾아 헤매던 하미현 씨는 세 농부를 만나 다행이라고 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밭에서 함께 풋고추를 수확했다.

홍고추를 확에 갈아 으깨 김치를 담근다. 수비초를 갈아 만든 고춧가루는 물에 잘 뜨는 특징이 있다.
우리 고추 먹고 맴맴
생각해보면 한국인에게 고추만큼 특별한 식재료도 없다.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 김치인 데다, 고춧가루를 사용하지 않는 음식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 국민 간식 떡볶이부터 국, 탕, 찌개까지 고추는 한식의 매운맛을 책임진다. 이러한 고추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다. 한국에는 임진왜란 전후로 일본에서 도입되었다는 설이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전까지 우리 민족은 초피나무 열매껍질로 만든 천초라는 향신료를 사용했다. <산림경제>(1715)에 고추의 재배 적지와 재배법, 품종의 특성 등이 기술된 것을 보면 임진왜란 이후 종자를 도입해 재배하는 일이 일반화되면서 지역 특성에 맞게 재래종으로 분화되어온 것으로 추정한다. 경북농업기술원 영양고추연구소는 사라져가는 재래종 고추가 안타까워 영양군 농가에서 자체적으로 소비하던 재래종 고추 유전자를 수집해 최근 3년 동안 특성을 평가해 가장 근접한 개체를 선발했다. 수비초(영고4호), 칠성초(영고5호), 유월초(영고10호), 토종(영고11호)을 복원해 무상으로 분양하며 자원적 가치가 높은 재래종을 유지ㆍ보존하고자 노력한다. 그 특성을 살펴보면 이렇다. 영양군 일월면 칠성리에서 유래한 칠성초는 윗부분이 굵고 끝이 뾰족하다. 무게가 무겁고 색깔과 광택이 좋아 마른 고추로도 사용한다. 유월초는 매운맛이 강하고 붉은 색감이 진해 인기가 높다. 짧고 통통한 토종은 캡사이신 함량이 높아 재래종 중에서도 가장 매운 편에 속한다. 다른 작물에 비해 재배 역사는 짧지만, 우리나라의 온대기후에서도 잘 자라고 뜰이나 밭에서 길러 먹을 수 있는 작물이라 널리 퍼지게 된 것이 분명할 터. 고추의 매운맛은 쌀밥과 채소 반찬에 잘 어울리고, 양념 역할도 톡톡히 해 밥상을 다채롭게 해주었다. 아직은 푸른 밭이지만, 곧 새빨갛게 익어갈 풍경에 세 농부의 마음이 설렌다. 그 모습을 보니 윤동주 의 시 ‘고추밭’이 떠오른다. “시들은 잎새 속에서/ 고 빠알간 살을 드러내놓고/ 고추는 방년芳年 된아가씨인 양/ 땡볕에 자꼬 익어간다.” 그렇게 잘 영근 고추는 오늘도 우리 밥상에 오른다.


입말한식가 하미현이 전하는 재래종 고추 맛
수비초 고추 특유의 향이 짙고 단맛과 매운맛이 주는 여운이 짧다. 풋고추일 때와 홍고추일 때의 향과 당도, 매운맛의 차이가 극명하다.
칠성초 매운맛이 약하고 단맛이 풍부해 생으로 먹기 좋다. 신맛이 있고 수분이 많으며, 과피가 두꺼워 고춧가루용으로 제격이다. 바삭한 고추부각을 만들어 먹으면 좋다.
유월초 매운 과일이라 해도 좋을 만큼 달고 매운맛이 선명하다. 매운맛의 여운이 길고 감칠맛이 돈다. 고추씨가 다른 고추에 비해 많고, 홍고추나 건고추로 적합하다.
토종 크기가 가장 작고 매운 편. 신맛과, 매운맛, 쓴맛이 적당히 어우러진다. 청양고추처럼 볶음 요리나 매운 소스에 활용하면 좋다.


기획과 취재를 함께 한 입말한식가 하미현은 사라져가는 토종 식재료와 이를 재배하는 농부를 발굴하고, 입말로 전해지는 음식을 기록하는 일을 한다. 마을 곳곳에 남아 있는 내림 음식의 원형을 ‘과거의 맛’으로 재현하고 , 현대에 맞는 레시피를 개발해 ‘지금의 맛’으로 풀어낸다.




글 김혜민 기자 | 사진 이경옥 기자 | 촬영 협조 허정호ㆍ이영규ㆍ전상용 농부 | 도움말 및 자료 제공 경북농업기술원 영양고추연구소 | 참고 도서 <한국토종자원작물도감>(이유), <채소의 인문학>(따비)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