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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 소화농장 정情이 담긴 맛, 토종 팥
경북 예천 소화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홍인 농부는 오늘날까지 가을이면 토종 팥을 수확한다. 토종 팥 농사를 지어 자식 키우고, 팥죽을 끓여 먹던 세월이 이홍인 농부의 한평생이 되었다. 이병달 농부는 그런 아버지를 이어 토종 팥을 재배한다. 팥 한 알 한 알에는 “내는 씨앗은 절대 안 지운다”라며 토종 씨앗을 지키고자 한 아버지의 뜻이 담겨 있다.

역사가 오래된 작물인 만큼 한국에는 다양한 토종 팥이 존재한다 토종 팥의 이름은 형태와 숙기熟期(농작물이 익어 수확하는 시기), 지명 등을 따서 부른 것이 대부분이다. 위부터 붉은팥, 흰팥, 까치팥, 재팥, 녹두팥, 오십일팥, 가래팥, 붉은 예팥, 흰 예팥.

“동지가 되면 팥죽 냄새가 집집마다 풍겨온다네/ 가득 담긴 푸른 그릇 그 색깔이 허공에 떠 있네/ 꿀로 맛을 맞추어 입에 흘러넣으면 사악한 기운이 씻겨 사라져 배속을 적시는구나/ 마을 하늘은 고요하여 새벽빛이 여전히 짙은데/ 어린 계집은 머리 빗어 붉게 화장을 하고/ 집집마다 팥죽을 나르는 아름다운 풍속을 만들어내니/ 백발의 늙은이 마음속에서 즐거움이 가득하네 ….”

고려 말기 학자 목은 이색은 ‘두죽豆粥’이라는 시를 통해 동짓날 의 정겨운 풍경을 이렇게 노래하곤 했다.

팥은 쌀과 콩 못지않게 우리에게 친숙한 곡물이다. 우리 조상들은 오래 전부터 팥을 재배해 떡과 죽, 밥 등 다양한 음식으로 즐겨 먹곤했다. 그중에서도 팥죽은 한국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년 중 밤이 가장 길고 음의 기운이 극에 달하는 동짓날, 붉은팥이 지닌 따뜻한 양의 기운이 음의 기운을 쫓는다고 하여 방과 장독대, 헛간 등 집 안 곳곳에 팥죽을 두거나 뿌렸다. 동짓날을 작은설이라 부르며 가족 또는 이웃과 함께 새알 넣은 뜨끈한 팥죽을 먹으며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다. 민속신앙 때문이 아니더라도 팥에는 탄수화물과 단백질, 무기질, 비타민 B 등 몸에 이로운 영양 성분이 풍부해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곡물이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1982년까지 국내 팥 재배 면적은 3만 헥타르 이상이었다. 다른 잡곡과 마찬가지로 값싼 외국 농산물에 밀려 들이는 품에 비해 제값을 받지 못하다 보니 팥 농사를 포기하는 농가가 늘어날 수밖에.

2016년 현재 국내 팥 재배 면적은 약 4천8백 헥타르에 불과하다. 농부들이 대를 거듭하며 우수한 종자만 선별해서 재배해오던 다양한 토종 팥 역시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토종 팥을 농사짓는 이홍인, 이병달 부자父子 농부를 경북 예천에서 만났다. 이들 부자가 토종 팥을 지켜나가는 이유는 그리 거창하지 않다. 이 땅에서 뿌리내리고 살아갈 내 아이에게 그 맛을 알려주고 싶은 것, 그게 전부다.

옛 어르신들은 족보나 가보만큼 씨앗을 소중히 여겨 작은 단지 안에 보관했다고 한다. 소화농장에서 재배하는 붉은팥, 붉은 예팥, 재팥을 비롯해 전국 여섯 개 농가에서 재배하는 토종 팥을 한데 모았다. 

10월 중순이면 팥알이 익어 꼬투리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면 이를 낫으로 베어 말린 뒤 도리깨질을 하면 낟알만 떨어진다. 토종 팥은 서리와 추위에 약해 11월이 되기 전에 수확해야 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예천군 소화리에는 너른 평야가 없고 밭과 들이 많습니다. 옛날에는 이 일대를 밭들마을이라 불렀어요. 산 중턱에 계단식으로 형성된 밭은 물 빠짐이 좋아 주로 잡곡을 많이 심었지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다 보니 객지 생활을 따로 해본 적이 없어요. 농사가 천직이 된 셈이지요. 친구들과 놀고싶어서 도리깨질하다 도망간 적도 많아요.” 이홍인 농부는 예천 토박이로 토종 벼인 적토미를 비롯해 계절에 따라 다양한 곡물을 심으며 일평생 농사를 지어왔다. 토종 팥도 그중 하나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소중한 씨앗이라 했다. 그는 6년 전 고향으로 돌아온 아들 이병달에게 그 씨앗을 건넸다.

“아버지가 늘 강조하시던 말씀이 ‘씨앗은 절대 안 지운다’ 였습니다. 많든 적든 매년 씨앗을 뿌려 수확하고 이듬해 농사를 위해 종자를 보관했지요. 팥에 얽힌 추억도 많아요. 수확 철에 팥알이 덜 여문 꼬투리를 짚불에 올려 구워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어요. 삶은 것처럼 익으면서 단맛도 나고 고소한 맛도 났지요. 아버지 역시 그 맛이 아직도 생각나신대요.” 토종 팥 농사는 대량으로 재배하는 벼와 달리 기계화가 이뤄지지 않아 손이 많이 간다. 이병달 농부는 아버지를 도와 매년 6월이 되면 팥 농사를 준비한다. 곡물 농사를 짓는 2만 평 중 토종 팥을 재배하는 면적은 2천 평 정도. 먼저, 지력을 높이고 땅을 기름지게 하기 위해 잘 발효시킨 우분牛糞을 밭에 뿌린다.

그 다음 호미로 땅을 파서 지난해 잘 갈무리해둔 팥을 30cm 간격으로 2~3알씩 심는다. 한 곳에서 싹이 많이 올라오면 적당히 솎아내는 작업도 부지런히 해야 한다. 10월 중순 무렵 팥이 익으면 낫으로 베어 밭에 눕혀 3~4일 정도 햇빛과 바람에 바짝 말린다. “오늘처럼 바람이 불고 서리가 올 것 같으면 남김없이 수확해야 합니다. 팥은 서리를 맞으면 쓴맛이 강해져 판매하기 힘들어요. 게다가 그늘진 곳에서 자라는 것 중 더러 돌팥도 생겨요. 삶으면 익지 않는 것을 돌팥이라고 하는데, 소비자는 묵은 팥이라 오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후 만만치 않은 도리깨질을 시작한다. 도리깨로 힘차게 내리치면 꼬투리에서 동글동글한 알곡이 떨어지면서 부산물과 알갱이가 어지럽게 섞인다. 키질로 부산물과 쭉정이를 어느 정도 날린 후 상판에 펼쳐놓고 남은 부산물을 손으로 일일이 골라내며 다시 한번 선별 작업을 해 판매한다. 소화농장에서 선보이는 토종 팥은 세 가지다. 적두라 불리는 붉은팥, 모양이 갸름한 붉은 예팥, 흰 바탕에 작은 검은 점이 많아 잿빛으로 보이는 재팥이다.


불리는 그 이름도 재미난 토종 팥
“동글동글한 붉은팥은 신품종보다 크기는 작지만 색이 훨씬 검붉어요. 재팥은 단맛이 좋아 떡고물로 많이 사용해요. 예팥은 지역마다 부르는 명칭이 다릅니다. 예천에서는 주로 이팥이라 부르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외팥, 약팥 등으로 부르더군요. 예팥은 보통 팥과 달리 덩굴성이라 종피가 단단합니다. 알이 단단하고 광채가 나며 가늘고 홀쭉해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지만 팥 중에 가장 좋지 않은 품종에 속합니다 다른 잡곡과 섞어 물에 넣고 끓여 마시거나 주로 약용으로 썼어요.” 이병달 농부의 말처럼 한국에는 다양한 토종 팥이 존재한다. 팥의 역사도 길고 오랜 세월 동안 농민들이 고르고 고르며 물려 내려왔기 때문이리라. <금양잡록>, <농가집성>, <임원경제지>등 옛 농서에도 다양한 이름의 토종 팥이 등장한다. <한국토종작물자원도감>의 저자 안완식 박사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재배하는 토종 팥은 대략 50가지. 당일 촬영에 동행한 입말한식가 하미현 씨는 소화농장에서 재배하는 붉은팥ㆍ붉은 예팥ㆍ재팥 외에 제각기 다른 토종 팥을 보여주기 위해 충북 괴산, 충남 아산, 전북 진안, 경기도 양평 등의 농가에서 현재 재배하는 여섯 가지 토종 팥을 모았다.

붉은 예팥의 형제 격이라 할 수 있는 흰 예팥은 노란빛에 가까운 흰색을 띠며 모양이 갸름하고 광택이 돈다. 낟알 크기가 녹두보다 크고 둥그스름한 흰팥은 옅은 살색을 띠며 단맛이 좋다. 50일 만에 익는다고 해서 이름 붙은 오십일팥은 지역에 따라 쉰나리팥, 쉰날거리팥, 시나리팥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겉으로 봤을 땐 붉은팥과 별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수확 시기가 확연히 다르고 단맛이 월등하다. 얼룩덜룩한 가래팥은 조밭에 심는 잿빛 팥인데, 맛도 좋고 수확량이 많아 농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녹두처럼 연둣빛을 띠는 녹두팥도 신기하기는 마찬가지. 팥 껍질에 흰색과 검은색ㆍ적갈색 등이 섞여 있는 까치팥은 새대가리팥, 개골팥, 재롱팥이라 불렸다.

토종 팥 중 하나인 붉은팥은 이홍인 농부의 할아버지 때부터 재배해온 내림 팥이나 다름없다.

이홍인ㆍ이병달 농부는 입말한식가 하미현 씨와 함께 어릴 적 짚불에 꼬투리를 구워 먹은 추억을 이야기하며 낟알을 골라내는 작업을 했다.
브랜딩으로 판로를 열다
판로를 확보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병달 농부는 아버지가 재배한 토종 팥과 콩 등이 팔리지 않고 가축의 사료로 쓸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그럴수록 토종 농산물의
가치를 알리고 제값 받고 판매해보자라는 오기가 생겼다. “지난 2년 동안 서울과 경기도에서 열리는 농산물 장터는 죄다 돌아다녔습니다. 소비자와 만나 토종 팥을 열심히 소개했지요. 홈페이지에는 집에서 즐겨 먹던 팥죽과 팥칼국수, 예팥차 등의 레시피도 설명해놓았고요. 사람들에게 아무리 좋은 농산물을 소개해줘도 그때만 관심을 갖지 먹는 방법을 모르면 구매하지않아요. 현대에 맞는 레시피로 자꾸만 제안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농부의 노력을 알아주기라도 한 걸까. 서울 유명 빙수 카페에서도 팥빙수를 만드는 데 소화농장의 팥을 믿고 사용한다. 게다가 3년 전 소규모 농가로서는 이례적으로 이마트 몰에 입점까지했다. 이병달 농부는 MD를 직접 찾아가 토종 팥의 맛과 효능을 설명했다고. 지역 농가와 협업해 토종 팥 생산량도 꾸준히 늘려가고 있다. 찬 바람이 세차게 불어 자꾸만 옷깃을 여미던 촬영 날, 현장은 뜻밖에 아기 웃음소리로 즐거웠다. 8개월 전에 태어난 이병달 농부 아들의 재롱에 스태프 모두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홍인 농부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한마디 툭 던진다. “이 아이도 토종 팥 맛을 봐야 하지 않겠어요? 저와 지 아비가 먹고 자란 그 단맛을요.”


모양도 맛도 제각기 다른 토종 팥
붉은팥 일반 팥에 비해 낟알이 작고 검붉지만 단단하고 윤기가 돈다. 당도와 찰기가 높아 떡이나 찰밥에 잘 어울린다.
흰팥 옛날에는 귀하고 맛 좋은 식재료 앞에 ‘돼지’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흰팥은 유난히 달고 맛이 좋아 돼지팥이라고도 불렀다.
까치팥 쓴맛이 적고 탱글탱글하게 씹히는 식감이 좋아 통단팥으로 활용하기 좋다.
재팥 팥 고유의 감칠맛이 강하고 찰기가 높다. 끓이면 검붉은색으로 변한다.
녹두팥 당도는 낮지만 담백하고 구수한 맛이 뛰어나다. 삶으면 짙은 분홍색을 띤다.
오십일팥 토종 팥 중 단맛이 가장 진한 편에 속한다. 팥죽을 쑤면 맛있다.
가래팥 분이 잘 나고 단맛과 찰기 모두 적당하며, 단맛과 구수한 맛의 밸런스가 좋다.
붉은 예팥과 흰 예팥 약팥으로 불릴 만큼 약용 효과가 뛰어난 팥. 일반 팥보다 얇고 딱딱하며, 떫은맛이 강하다. 한번 삶아 밥으로 지어 먹거나 주로 볶아서 차로 우려 먹는다.

글 김혜민 기자 사진 이경옥 기자 취재 협조 소화농장(054-652-2796) 참고 도서 <한국토종작물자원도감>(이유)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7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