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50년 연극 인생 기념 전시 연 배우 박정자 씨 박정자는 예쁠 자격이 있다
그가 연극에 바친 50년의 시간은 참으로 희귀한 것이다. 밥도 안 되고 집도 안 되는 일, 많은 이가 변방의 예술이라 말하는 연극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그, “허황된 욕심일지 몰라도 무대 위에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그. 얼마 전 ‘50년 연극 인생’을 기념하는 <박정자 전>을 치른 일흔한 살의 뜨거운 청춘, 박정자 선생을 만났다.

박정자는 연극배우다
구두닦이든, 목수든, 예술가든 어떤 분야에 오랜 시간 몰두한 이는, 그래서 그 일의 정점을 경험한 이는 단순한 기능인이 아니라 철학을 소유하게 된다. 스님들 사리처럼 몸속에 만들어진 철학. 1962년 이화여대 문리대 연극 <페드라>부터 시작했으니 박정자 선생은 반세기 동안 연극에 헌신했다. 아니, 극단 신협에 연구생으로 들어간 큰오빠 덕에 <원술랑>을 보고 ‘흥분’과 ‘혼쭐(혼보다 더 강렬한 무엇)’이란 걸 알게 된 때가 아홉 살이니, 반세기보다 더 오랜 몰두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도 “연극은 전쟁”이고, “난 늘 연극밖에 모른다 하지만 연극은 내가 제대로 아나?” 되묻는다. 하지만 그의 연극을 한 편이라도 본 이라면 그가 무대에서 얼마나 장대한지 안다. 그가 ‘혼쭐’을 놓아버릴 정도로 연기하면 사람들은 함께 몸을 떤다. 누군가는 무대 위 그를보고 “방울만 안 들었지 무당이다. 작품 속 인물이 그를 통과해 살아난 것처럼 관객에게 전달한다”고 했다. 박정자는, 연극배우다.

“내 직업은 연극배우가 아냐”
‘데뷔 몇 주년’ ‘연극 인생’ 같은 거창한 말은 싫다는 그가 ‘박정자 연극 50년’을 맞았다. 대학 연극을 시작한 후 1964년 김정옥 선생 연출의 <피의 결혼>으로 명동 국립극장 무대에 올랐고, 동아방송 성우로 일하던 중 극단 자유의 창단 멤버로 입단했다. 그렇게 본격적인 연극배우의 길로 들어선 후 50년 동안 1백40여 편의 연극에 출연했다. 한 해도 연극을 쉰적 없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자랑거리다. 그런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모순. “사람들이 내게 ‘당신 직업이 뭐요?’라고 물으면 난 연극 배우라고 말하지 못해요. 날 먹여 살리는 일을 직업이라 하는데, 연극은 날 먹여 살리지 못해요. ‘그렇다면 당신에게 연극이 뭐냐?’고 또 묻는다면 그냥 ‘업業’이죠. 업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 건가(부여된 과업. 또 몸身·입口·뜻意으로 짓는 말과 동작과 생각, 그 인과. 뜻을 곱씹어보면 박정자 선생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박정자는 예쁘다

‘빨갛고 까만’ 역할(마녀, 노인처럼. 특히 출연작의 60% 이상이 노역이라 아직까지 목 디스크 치료를 받는다)이 늘 그의 차지였던 건 자신이 예쁘지 않아서라지만, 그건 그밖에 낼 수 없는 빨갛고 까만 빛깔이었다.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동양적인 펑퍼짐한 얼굴에 드라마란 없다”고 자학하는 ‘여자 박정자’이지만, 그는 아름답다. ‘얼’이 집합되어 있는 ‘굴’이 ‘얼굴’이라 하는데, 평생 동안 그토록 성실하고 치열한 ‘얼’로 살았으니 말이다. “나는 일흔한 살이라는 이 나이가 정말 이뻐요. 지금 난 충분히 이뻐요. 그동안 살아온 걸 돌아봤을 때 박정자는 이쁠 만한 자격, 있지 않나? 이렇게 생각되면 그게 바로 행복인 거지?” 그의 행복한 얼굴.

<박정자 전>이란 잔치
‘연극 50년’을 맞은 박정자 선생을 위해 벗들이 열흘 동안 잔치를 벌였다. 갤러리 공간을 내주고, 기념 전시와 공연을 위해 머리를 모으고, 출연료 없는 공연 무대에 돌아가며 섰다. 5월 17일부터 31일까지 갤러리 아트링크에서 열린 <박정자 전>. 또 벗들의 독려와 도움으로 만든 책 <박정자와 한국 연극 오십 년>도 세상에 나왔다. 한국 연극의 다양한 역사 가운데 배우 박정자의 50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건을 뽑아 수록한 책이다. “이 책은 한국 연극사의 모든 것을 아우르지 않습니다. 박정자의 50년을 통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이 그때 우리 연극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돌아보고 생각하기 시작하기를 바라는 뜻을 책에 담았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박정자와 한국 연극 오십 년>에서 찾아낸 몇 가지 이야기

1 사관학교에서 졸업 앨범을 촬영한 진명여고 3학년 시절.
2 대사 훈련과 목소리 연기 훈련을 한 동아방송 성우 시절.
3 1964년 <피의 결혼>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 역을 연기했다.
4 2006년 <따라지의 향연>에 쓴 소품이다.
5 1966년 <따라지의 향연> 공연 후 무대 미술가 이병복 선생과 함께.
6 1967년 사진작가 강운구 선생이 울산 바닷가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박정자론
“배우 박정자에게 개인과 연극, 삶과 연기는 처음부터 상반되고, 우선시되는 것은 연극과 배우다. 자기 삶보다 연극을 먼저 말하지만, 그의 연극들은 그 연극이 수태되는 과정, 이를 겪는 제 삶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중략) 일상생활에서 그는 그리 내세울 것이 없는 ‘철없는’ 존재이고, ‘건망증 여왕’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계산도 못하고, ‘손댈 수 없을 만큼’ 요리도 자신이 없고, 좋아하는 음반도 제 스스로 구하러 가지 못하고, 자식에게도, 남편과의 관계에도 마냥 무능한 존재라고 스스로를 밝히고 있다. (중략) 배우 박정자는 ‘지혜로운 생활인으로 사는 걸 포기하’는 대신 ‘연극에 빠져… 너무 벅찬’ 삶을 살아왔다고 말한다. 이처럼 일상의 삶을 버리는 대신 무대에서 배우로서 제 스스로 ‘잃어버렸다고 생각해왔던 모든 것들의 이미지를 다 찾았다’고 말한다. 연극이 또 다른 쾌락이 되는 것이다. 무대에 서는 배우로서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다. 연기, 방송 성우, 노래, 영화 출연 등 배우로서의 그의 삶은 뜨거운 ‘소음과 더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자신을 ‘쉴 새 없이, 악착같이 괴롭히’지만, ‘후회하지 않고 웃음’ 지을 수 있는 ‘주저하지 않는’ 배우일 터이다. 배우 노릇은 그에게 긴 어둠과 같은 쾌락이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것이 일상에서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인가? 찾는다면 어떻게 찾는 것인가? 배우 박정자는 무대 위에서 수많은 인물들을 연기하는 것이, 그렇게 해서 ‘수많은 인간 존재를 가슴으로 껴안’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연극평론가 안치운 교수의 글에서 발췌. 2003년 한국일보에 연재한 박정자 선생의 ‘나의 이력서’를 중심으로 쓴 것으로 ‘ ’ 안이 박정자 선생의 글)


7 1969년 <마리우스> 분장실에서 김무생ㆍ박항치ㆍ박정자 선생.
8 1989년 김영태 선생이 그린 <아직은 마흔네 살> 음반 재킷.
9 1991년 <대머리 여가수> 공연 때 상대역 오영수 선생과.
10 2001년 <에쿠우스>.
11 1985년 <피의 결혼>.
12 2004년 김영민 씨와 공연한 .
13 2004년 노래 공연 . 디자이너 한혜자 씨가 드레스를 만들었다.


박정자의 이력서
1942년 태어났다.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이화여대 연극반 시절인 1962년 <페드라>로 연극 무대에 데뷔했다. 1963년 동아방송 성우 1기에 합격해 라디오 성우를 시작했다. 1965년 국립극단의 <파우스트> 초연 때 무대에 섰으며, 1966년 극단 자유가 생길 때 김정옥, 이병복 등과 함께 창립 멤버로 몸을 담고 <대머리 여가수><흑인 창녀를 위한 고백> 등 극단 자유의 대표 레퍼토리들에 출연했다. 1991년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1994년 <그 자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1998년 <넌센스>, 2001년 <에쿠우스> 등에서 강렬한 인물을 연기하며 폭발적 반응을 끌어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을 자신만의 레퍼토리로 해석하는가 하면 2011년 명동 국립극장 재개관 기념 <오이디푸스>에 출연하는 등 1962년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쉼 없이 연극 무대에 서 있었다. 또한 김기영 감독의 <이어도>,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 등의 영화에 성격 배우로 출연했다.

관객이라는 님
“배우 박정자는 관객을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의 ‘님’으로 여긴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연극배우 박정자라는 존재의 가치를 증명해주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관객에 대한 그의 사랑은 스스로 말하듯 ‘일방통행’인지라 ‘많은 사람이 가슴 아팠을 것’이라고 반성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관객을 ‘앞으로도 늘 새롭게 만날 생각에 가슴이 벅찬’ 것이 배우 박정자의 웅장한 고백이다. 그의 삶을 보건대, 배우로서 산다는 것은 늘 고통스럽게 자신의 생채기를 안고 사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언제 무대 위에 자신이 존재하지만, 곧 사라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연극평론가 안치운 교수의 글에서 발췌).
사진 제공 수류산방(<박정자와 한국 연극 오십 년> 수록 자료)

그리고 <박정자 전>

소박하게, 여백 있게 <박정자 전>을 만든 박정자 선생.

“<박정자 전>은 나의 30년지기인 사진가 김용호 씨로부터 비롯되었어요. 작년에 내가 ‘내년이면 연극 시작한 지 50년이네’ 했더니 김용호 씨가 깜짝 놀라더라고요. 그러더니 ‘그럼 책도 내고 전시도 해야죠’ 이렇게 딱 나오는 거야. 좋은 친구는 내가 넋 놓고 있을 때 나를 일깨워주는 사람이잖아요. 사실 난 처음에 겁도 좀 났지. 자료가 될 만한 게 있을까 걱정돼서 말야. 나는 계속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어요. 아파트에서 시부모님, 우리 부부, 아이 둘과 사니 자꾸 뭘 버리고 비워야 해요. 게다가 연극은 다 사라지는 순간의 예술인데 전시할 만한 뭔가가 내게 있을까 싶었지. 뒤져보니 기특하게도 많이 모았더라고요. 그런데 그 자료라는 것이 세상에, 그렇게 누추하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거예요. 대본, 전단, 사진, 낡은 포스터 같은 것뿐이니. 김용호 씨가 ‘선생님, 충분할 겁니다’ 하면서 날 다독이고, 갤러리 아트링크의 이경은 대표(극단 자유의 후원 회원인 부모님 덕분에 그는 중학교 때부터 박정자 선생과 가깝게 지냈다)는 수천 장도 넘는 사진, 자료 중에서 전시할 자료를 추려 기획을 잡고 했지. <박정자 전>은 이렇게 친구들이 모여 만든 거예요. 연극도 함께 하는 거잖아. 많은 이들과 함께한 50년을 친구들과 함께 돌아보자는 자리였어요. 한데 박항치 선생이 그러더라고. ‘박정자 친구 하기 너무 힘들어. 만날 뭐를 벌이잖아’ 하하.”

씨줄과 날줄로 짠 전시
5월 17일부터 31일까지 갤러리 아트링크에서 열린 <박정자 전>. 그가 모은 사진, 포스터, 대본 같은 자료와 함께 유명 사진작가들이 그동안 찍은 박정자 선생의 사진, 화가 김영태ㆍ이진용 씨 등이 그린 초상화, 연극 소품, 의상, 인형 작가 정복생 선생이 만든 마리오네트 인형, 김용호 씨가 만든 석고 마스크 등이 ㅁ자형 한옥 갤러리에 전시되었다. 또 진명여고 시절 사진, 명동을 거닐던 이화여대생 사진까지 ‘자연인 박정자’의 역사도 함께 펼쳐졌다. 립글로스ㆍ안약ㆍ시계 같은 그의 일상 소품, 막역한 사이의 벗들이 남긴 쪽지도 함께했다. 그중 특히 마음을 붙잡은 손숙 씨의 편지. “사랑하는 형님! 눈물겹고 힘들고 외로운 이 길을 가면서 늘 제 앞에 형님이 등불이 되어주셔서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제 연극은 우리에게 운명이고 종교가 되어버렸네요.” <박정자 전>은 이렇게 박정자라는 개인의 역사와 한국 연극 50년이라는 시대의 역사를 씨줄과 날줄로 교차시킨 흥미로운 전시다. 또한 박정자라는 ‘스코프scope’를 통해 한국 연극 50년을 돌아보는 자리이기도 했다.

1 배우 강부자 씨 등 오랜 친구들이 전시에 함께했다.
2 강운구, 구본창, 김용호 씨 등 사진작가가 찍은 박정자 선생의 포트레이트.
3 국악인 박정욱 씨가 한바탕 굿판을 벌였다.
4 ㅁ자 마당의 멍석 위에서 벌어진 무용가 김명숙 씨와 늘휘무용단의 공연.

5
 김용호 씨가 만든 박정자 선생의 석고 마스크 옆에서. 참 아름다운 얼굴이다.
6 특별 무대의 시작을 연 가수 최백호 씨. 박정자 선생이 답가로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를 불렀다.
7 매일 밤 열린 낭독 공연 <맥베스>.
8 시계, 핸드크림, 안약 등 그의 일상 소품도 함께 전시했다.
(아래) 갤러리 마당에 설치한 연극 의 주인공 모드의 방.

특별한 벗들의 특별한 무대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ㅁ자의 갤러리 회랑에서 전시가, 저녁 6시엔 마당에 멍석을 깔고 특별 무대와 낭독 공연이 열렸다. 특별 무대는 다양한 장르에서 맹활약 중인 벗들이 열흘 동안 매일 다른 레퍼토리로 박정자 선생을 위해 벌이는 작은 잔치였다. 첫날 가수 최백호 씨의 ‘보고 싶은 얼굴’로 시작한 이 특별 무대는 열흘 동안 음악감독 김정택 씨, 배우 강부자 씨, 노래꾼 장사익 씨, 뮤지컬 배우 전수경ㆍ배해선ㆍ이경미 씨, 소프라노 박성희 씨, 국악인 박정욱 씨, 힙합 댄서 팝핀 현준과 명창 박애리 씨 부부, 가수 유열 씨 등 쟁쟁한 예술가들의 무대로 이어졌다. 세대와 장르를 초월한 벗들의 무대를 보며 많은 이가 박정자 선생의 덕성과 인품을 짐작했다.
매일 저녁 7시 30분부터 <맥베스> 낭독 공연이 마당 멍석 위에 펼쳐졌는데, 두 시간이 넘는 공연을 연출가 한태숙 선생이 40분으로 압축하고 다듬은 것이다. 박정자 선생과 배우 김성녀ㆍ정동환ㆍ서이숙ㆍ박상종ㆍ김은석 씨가 그야말로 ‘낭독의 힘’을 ‘들려준’ 공연. “내가 죽은 사람이 아니잖아. 배우로서 아직 살아 있고 박정자 하면 많은 이가 목소리를 연상하니까 전시장에 오는 사람들과 내 목소리로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서 낭독 공연을 연 거예요. 여태 내가 한 일 중에 <박정자 전> 이건 상을 줄 만해. 내가 나한테. 지금 난 행복하다고. 일흔한 살에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했잖아요. 너무 행복한 나머지 기절해 일찍 죽어버릴까 걱정이야. 하하.

자료 제공 수류산방

구성 최혜경 기자 | 사진 김용호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