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원주 치악산에서 풀물 들이는 이성만, 김문정 부부 감부터 쪽, 치자까지 빛깔 참 곱지요?
푸른색을 내는 쪽, 노란색을 내는 치자, 붉은색을 내는 소목…. 그뿐이랴. 애기똥풀, 양파 껍질, 밤 껍질, 감, 석류, 국화까지 주위에 있는 모든 식물은 다 색의 재료다. 이들을 섞으면 또한 새로운 색이 탄생하기에 자연의 재료로 표현 못할 색이 없다. 원주 치악산 입구에서 매일 풀물을 들이는 이성만·김문정 부부는 그 같은 자연의 색에 빠져 20년을 한결같이 천연 염색을 하고 있다.

안흥과 원주의 경계선 부근, 치악산으로 가는 입구에 ‘풀물꽃물’이 있다. 푸근한 통나무집과 넉넉한 마당, 주변에 지천으로 자연이 펼쳐지는 이곳은 이성만·김문정 부부가 함께 천연 염색 작업을 하는 일터이자 천연 염색을 가르치는 학교이며, 이들의 일상이 시작되고 끝나는 집. 마당에는 1년 3백65일 중 1백 일은 염색하는 물이 끓어오르고, 해가 나는 날이면 어김없이 염색한 천이 가득 널려 바람에 나부낀다. 이들이 원주에 터를 잡고 이처럼 천연 염색 일을 한 지도 벌써 20년째.

지금은 풀물과 꽃물을 들이는 부부는 알고 보았더니 학창 시절에 풀과 꽃을 공부했다. 함께 조경학과 학생으로 캠퍼스 커플이었던 것.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이성만 씨가 대학교 3학년이던 해 5월에 결혼을 했다. 살아 있는 것을 무사히 잘 키우는 재능이 있다고 존경을 담아 아내를 설명하는 이성만 씨. 그는 지금도 고운 아내를 아끼는 마음이 풋풋했던 시절 그대로인 듯하다. 막 결혼을 한 두 사람은 나무와 풀꽃을 사랑하고 그 곁에서 살기를 꿈꾸는 마음이 같았다. 과감히 서울을 떠나 자연과 가까운 곳으로 터전을 옮겼고, 꽃과 나무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들이니 천연 염색을 해보아도 좋을 것 같았다. 당시는 ‘젠 스타일’이 유행하면서 동양적인 것, 자연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고 있을 때였다고. 부부는 점점 천연 염색의 매력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차곡차곡 그 세계의 비밀을 알아갔다. 강산이 두 번 변하는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제자를 가르쳐 내보내며 세상 밖으로 널리 천염 염색을 전파시키기에 이르렀다.


1, 2, 3, 7 염색이 끝난 천으로 옷, 침구, 방석 등을 디자인하고 바느질해 완성하는 것은 아내 김문정 씨의 몫.
4 천연 염료의 종류와 농도, 배합에 따라 만든 색상표. 
5 풀물꽃물의 천연염색학교에서 공부했던 의상디자인과 학생이 만든 작품.
6, 8 이곳에서 직접 염색한 천으로 완성한 침구, 방석, 옷 등 다양한 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채소와 염색 재료가 함께 자라는 텃밭 부지런한 이들의 하루는 새벽 5시에 시작된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배추·파·호박 등 각종 야채가 영글고 있는 텃밭을 돌보고, 쪽·메리골드·국화 등 염색 재료가 곳곳에 자라고 있는 마당과 뒤뜰을 점검한다. 염색만큼이나 요리 솜씨도 좋은 김문정 씨가 준비한 소박한 아침을 먹은 후 본격적인 일과가 펼쳐진다. 대학에서 천연 염색 수업을 맡고 있는 이성만 씨는 요즘 강의 나가는 날이 많다. 그렇지 않을 때는 집에서 아내와 함께 염색 작업을 하는데 주로 본인은 힘쓰는 일을 한다고 웃으며 설명한다. 재료 상태를 점검하고 물을 끓이고 염료를 붓는 일이 이성만 씨의 몫이라면, 아내 김문정 씨는 염색이 고르게 되도록 천을 풀어 담그고 염료를 헹궈내고 색이 잘 나왔는지 확인하는 보다 섬세한 작업을 담당. 주문받은 제품을 만들고 이런저런 새로운 디자인과 컬러 매치를 구상하고, 마당에 판을 벌이고 원단을 염색하다 보면 해가 금방 저물어간다.

“요즘은 한창 감물과 쪽물을 들일 때예요. 푸릇한 5백 원짜리 동전만 한 땡감과 싱싱하게 잎이 자란 쪽이 지금이 딱 제철이지요. 천연 염색은 이처럼 계절을 타요. 말린 재료로 염색을 하기도 하지만 어차피 그 재료를 말리는 작업은 제철에 해야 하니까요.” 쪽물 헹궈내는 작업에 손이 바쁜 김문정 씨가 귀띔한다. 염색 재료는 직접 키우거나 가까운 치악산을 다니며 채집하며 소목, 울금, 오배자, 꼭두서니 등은 한약재 도매상을 통해 구하기도 한다. 이렇게 구한 것을 종류에 따라 어떤 것은 생으로 쓰고 어떤 것은 말리고 발효시켜 쓴다. 물들이는 단계에서도 손이 많이 간다. 쪽물은 연하게 여러 번 반복해서 염색해야 하고, 감물은 염색 후에 천을 열흘 정도 햇빛에 말려야 한다. 감물 천은 햇빛을 쬐면서 점점 색이 짙어져 제 색을 내기 때문이다.

자동화된 기계로 온갖 선명한 색과 화려한 패턴을 빠르게 찍어내는 합성염료 염색에 비하면 천연 염색은 그야말로 번거롭고 노동집약적인 일. “천연 염색의 단점 중 하나로 지적되어온 것은 색의 재현성입니다. 어떤 표준화된 색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쉽지가 않지요. 천연 염색은 변수가 많아요. 염료를 얼마나 끓이느냐, 비벼서 염색하느냐 담가서 하느냐, 재료 상태가 어떠냐, 하다못해 누가 염색하느냐에 따라서도 색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이성만 씨가 조목조목 분석하며 설명을 해준다. 그러나 색의 재현성이 과연 불가능한 일일까? 이들은 현대화된 색상표처럼 천연 염색의 색상표를 만들고 있다. 쪽으로 염색했을 때 염료의 비율에 따라 색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치자·감 등 다른 염료와 섞었을 때 그 배합 비율에 따라 빛깔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수년에 걸쳐 그 지표가 될 색상표를 만드는 중이다. “식물에서 얻는 색은 복합 색소예요. 식물 각 부위에 다양한 색소가 있어서 동일한 식물에서 채취한 염료라 해도 매염제에 따라 여러 가지 색을 낼 수 있답니다. 따라서 식물에서 얻은 색은 채도가 낮아 전체적으로 튀지 않고 가라앉은 톤이 되지요. 한 가지 색소만으로 된 합성염료가 이 같은 색을 내려면 여러 종류의 염료를 섞어야만 해요. 천연 염색의 경우 특별히 배색 조화를 하지 않아도 서로 잘 어울리는데, 이는 자연 속 식물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어울리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천연 염색은 자연 고유의 멋을 아는 사람들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또한 친환경적인 삶의 방식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지지를 받으며, 아토피나 신체 질환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건강한 소재의 옷과 침구로 각광받는다.


9 김문정 씨는 틈이 날 때마다 컬러를 매치해 크고 작은 조각보를 만들어둔다. 천연 염색은 1956년 합성염료가 개발되기 전까지 인류가 사용해오던 오래된 염색 방식이다.
10 천연 염색으로 완성한 색이 고운 모자는 김문정 씨가 평소 애용하는 아이템이다.
11 풀물꽃물에서 판매하는 천연 비누. 12 하늘색부터 깊은 바다 빛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쪽 염색 털실.

천연 염색 옷은 치유의 옷이다 “천연 염색을 20년 했잖아요. 처음 10년 동안은 천연의 재료들이 내는 색에 매료되었어요. 어쩌면 그리 은은하고, 또 어떤 것은 어쩌면 그렇게 선명한지요. 자연을 닮은 빛깔을 천으로 옮기고, 이를 다시 조각보에, 옷에, 침구에 담아내는 일이 신났습니다. 이후 지금까지의 10년은 천연 염색이 약리적으로 어떤 작용을 하는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운영하는 풀물꽃물에는 아이에게 아토피가 있거나 가족 중 몸이 아픈 이가 있는 분들이 찾아와 제품을 구입해 가는 것은 물론이고, 천연염색학교 워크숍에도 참여해 제품을 직접 만들어 가기도 한다. 천연 염색한 옷과 침구를 쓰면서 증세가 호전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이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큰 보람. 때로 낫기 위한 진통 과정인 명현 현상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아토피로 고생하던 아이가 말끔히 낫고 전신무력증이 있던 어르신이 혈행이 원활해져 생기가 돌게 되는 것은 천연 염색이 그저 무해한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치유 효과가 있다는 의미. 한약을 한 재 먹으면 그 성분의 6%가 몸에 흡수되고, 천연 염색의 경우 0.6%가 흡수된다고 한다. 그런데 한약은 한 달쯤 먹지만 천연 염색 옷과 침구는 몇 년이고 사용한다. 이것이 천연 염색의 효과를 가벼이 볼 수 없는 이유다.

이성만·김문정 씨는 천연염색학교를 운영하며 이 같은 천연 염색의 방법과 효과를 보다 전문적으로 교육하려 한다. 기존에는 도제식으로 천연 염색 방법이 전수되는 경우가 많은데, 물론 그것에도 장점이 있지만 개인의 지식은 한정되기 마련이고 때로는 아집까지 배우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이들은 의상디자인과 천연 염색, 그리고 섬유 전문가들로 강사진을 구성, 천연 염색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마련했다. 이들의 소신에 의하면 천연 염색은 감각이나 경험만이 아니라 과학이므로. 이 모든 일의 배경에는 자연을 가까이하고 벗하는 일상이 조용한 힘이 된다. 텃밭에서 기른 채소로 밥을 먹고, 장독에는 해마다 담근 장이 차곡차곡 더해지고, 마당에서 강아지가 가족을 이루며 뛰어다니는 풍경 말이다.


1, 2, 3 이곳 통나무집으로 옮긴 지는 6년이 되었고, 그 전에는 훨씬 더 깊은 시골에 살았다. 이들의 집은 쇼룸이자 작업실, 손님을 맞는 카페 같은 역할을 하는 통나무집과, 학생들과 워크숍을 진행하는 또 하나의 건물, 그리고 염료를 끓이고 염색 천을 널 수 있는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4, 5, 6 김문정 씨가 해마다 담그는 장을 보관하는 장독대와 마당에서 키우는 식물. 어릴 때부터 나무와 풀꽃을 좋아했던 그는 식물이건 동물이건 생명을 잘 키워낸다.


항상 염료를 손질하고 염색하고 널어 말리는 부모의 생활을 지켜보던 아들은 장성하여 섬유디자인을 공부하는 대학생이 되었다. 
2 염색 재료가 되는 석류 껍질, 홍화, 밤 껍질, 오리나무 열매.
3, 4 마당에 지천으로 자라는 메리골드와 쪽도 천연 염색의 재료가 된다.

손영선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