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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야초 연구가 전문희 씨의 산중 일기 차 한 잔에 담은 지리산의 四李
사방천지가 하늘과 맞닿은 봉우리들로 둘러싸인 지리산 800m 고지. 신선이 머물다 갈 것 같은 풍경 안에 차를 덖는 여인, 전문희 씨가 산다. 통기타 가수, 패션 모델, 가구 사업가로 남부럽지 않은 화려한 시절도 보냈다.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운명처럼 시작된 지리산 생활. 한없는 평온을 선물해준 자연과 향긋한 산야초 차에 푹 빠진 그의 일상을 찾아갔다.

지리산에서 보내온 산야초 이야기 눈이 시리도록 짙푸른 산세, 코를 자극하는 강한 풀 냄새에 어지럼증이 날 지경이 되는 지리산 800m 고지. 대문만 열어도 천왕봉이 내다보이는 지리산 자락에 산야초 전문가 전문희 씨가 산다. 제아무리 풍광이 빼어나다 하더라도 인적 드문 이 첩첩산중에 여자 혼자 사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닐 터.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 맑은 눈, 희고 고운 손…. 그를 마주하고 앉아 차 한 잔을 건네받으니 어디선가 기분 좋은 풀 냄새가 느껴지는 듯하다. 30대를 갓 넘긴 곱디고운 나이에 산으로 들어와, 10년이 훌쩍 넘게 산사람으로 살게 된 사연을 듣기 위해 그동안 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전문희 씨는 통기타 가수, 패션 모델, 가구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화려한 20대를 보냈다. 스물여섯 나이에는 혼자 힘으로 ‘마론헨즈’라는 가구 사업체를 성공적으로 이끈 사업가로 여성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그를 한달음에 지리산으로 오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 임파선암 말기를 선고받은 어머니의 간호를 위해 전문희 씨는 고향으로 내려와 약이 된다는 산야초를 찾아 다녔다. 산과 들을 누비며 몸에 좋다는 약초와 야생초를 따다 정성으로 차와 탕약을 끓여드렸다. 병원에서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고서,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3년을 더 살다 가셨으니 여한은 없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산에 남아 있다. 벌써 12년째다. 여전히 이곳에 사는 이유를 물어오면 ‘그저 산이 좋고 풀 향기가 좋아서 산다’며 헛헛한 웃음으로 답을 건넨다.

“어머니를 위해서 산에 왔지만 어머니를 보낸 후에도 이곳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봄이면 산은 온통 매화향기로 뒤덮입니다. 산수유, 생강나무, 산복숭아, 산벚꽃 향기 또한 마음을 야릇하게 하지요. 봄, 여름, 가을, 겨울… 대자연의 경이로운 변화가 일상이 되니, 어디서도 이처럼 좋은 곳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어머니께 쏟던 사랑을 고스란히 지리산에 풀어놓는다. 어머니의 품처럼 자신을 넉넉하게 품어주었던 지리산 자락에 소박한 토담집도 지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계절에 따라 산야초를 따다 차도 만들고, 산야초와 과일을 함께 숙성시켜 효소도 담근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것을 더욱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눈다는 것. 그동안 시간 날 때마다 써왔던 지리산 생활과 산야초에 대한 기록을 모아 <차 한잔에 담은 산야초 이야기>와 <지리산에서 보낸 산야초 이야기>라는 책도 냈다. 그를 찾는 사람은 더욱 늘었다. 그의 정성 어린 손으로 내는 향긋한 차 한 잔을 맛보기 위해서다.

“<지리산에서 보낸 산야초 이야기>라는 책을 출간하고 제 인생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자연과 사람에 대해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지요. 세상에는 아픈 사람도, 자신의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너무나 많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제가 지리산에서 받은 선물을 나눠주려 합니다.”


1 산야초 채집에 나선 전문희 씨. 따가운 햇볕을 막아줄 밀짚모자와 산야초를 담을 광주리는 필수품이다.
2 그도 도시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욕심쟁이였다. 하지만 1년 365일을 광활한 자연을 마주 하고 살다 보니 끊임없이 버리고 비우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의 수명이 다한 후에 말없이 사라지는 토담집을 지었다.
3 ‘기똥차게’ 재미있는 것을 보여준다던 그를 따라간 곳에서 정겨운 경운기 주차장을 만났다.

그를 산에 잡아두던 산야초는 불로초같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야생의 산과 들에서 자생하는 온갖 풀과 꽃을 뜻한다. 식물은 성장과 생명 유지에 필요한 물질을 스스로 만들고 저장한다. 말하자면 싹 틔우고, 성장하고, 꽃 피우고, 열매 맺고, 다시 기나긴 겨울을 나기까지의 과정에서 인체에 약이 되는 성분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태양과 바람 그리고 청정수를 먹고 자란 지리산의 작은 생명들이 산의 정기를 고스란히 담은 것은 당연지사. 특히 산야초에 듬뿍 담겨 있는 엽록소의 화학구조는 인체의 적혈구와 비슷하다고 하여 예로부터 한방에서는 약용으로, 민간요법에서는 식용과 차 재료 이용해왔다. 그는 바로 이러한 산야초를 채집하여 차로 만든다.

<야생초 편지>의 저자이자 생태공동체 연구가인 황대권 씨는 그가 손수 달인 ‘백초차’를 맛보고 ‘한 잔의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지리산을 통째로 내 몸에 모시는 느낌이 들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지리산 800m 고지에서 채취했다는 온갖 나무와 넝쿨, 야생초의 조그마한 새순이 그득하게 담긴 바구니를 들여다보고 다시 한번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초차는 불가에서 구두로만 전해지던 백 가지 새순을 넣어 만든 귀하디귀한 차를 고스란히 재현한 것. 사실 험준한 산비탈을 넘나들며 채취한 작은 새순으로만 바구니를 채우려면 어지간한 정성과 인내가 아니고서는 엄두조차 내지 못할 일이다. 네 명이 이틀 동안 하루 여섯 시간씩 일해도 100g짜리 백초차 한 통이 나올까 말까 하니 도시 사람의 수지 타산으로는 도저히 계산이 안 나온다. 아무리 산야초의 효능이 뛰어나다고 한들 누가 가공비와 일당만 해도 20만 원이나 되는 차를 선뜻 사 먹을 사람이 있을끼?

하지만 전문희 씨는 여전히 산야초 차를 만든다. 앞으로도 그럴 작정이다. 값비싼 중국산 차나 일본 녹차에 한 치도 뒤지지 않는 산야초 차의 효능과 맛을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다. 매일같이 솔잎이나 쑥처럼 훌륭한 차의 재료가 되는 풀과 꽃을 부지런히 채집하고 정성으로 덖어서 차로 만들고 있다. 고맙게도 그가 터전으로 삼고 있는 지리산은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온갖 산야초의 보고다. 봄이 오면 매화·으름덩굴잎·쑥·솔잎·민들레·아카시아꽃·찔레꽃이, 여름에는 뽕잎·연잎·안동초·칡이 난다. 또 가을에는 국화·감국·대추·구절초가 난다. 산 능선을 누비며 온갖 꽃과 풀을 생으로 씹어보고 차로 만들어보기를 거듭했다. 그의 토담집에 늘어가는 차통 수만큼 그의 일상은 더욱 바빠지는 셈이다.


4 전문희 씨가 직접 만든 감물로 염색한 모시옷.
5 산야초는 산을 오르며 일일이 손으로 딴다. 10년을 넘게 차를 따다 보니 이제는 산야초를 생으로 씹어보아도 차로 만들었을 때 어떤 맛이 나올지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자연은 언제나 신비롭다. 잘 살펴보면 돌 위에서도 새싹이 자라고, 꽃이 핀다.
6 그는 말 그대로 지리산 속에 산다. 사방이 풀이고 나무고 하늘이다. 매일 달라지는 산의 표정을 살피는 것도 일과 중 하나다. 집 앞에는 다람쥐도 산토끼도 다닌다.

밭을 가꿔 재배하는 녹차와는 달리 산야초 차는 산속을 헤매며 일일이 손으로 따내는 것부터 시작된다. 모두 수작업이다. 순수한 생잎만을 하나하나 살펴 골라내고, 이를 물에 깨끗이 씻어 산바람 부는 그늘에 말린다. 다음은 차의 맛과 향을 끌어내기 위한 덖는 단계. 아홉 번 덖고 아홉 번 비비는 우리나라 전통 제다법인 구중구포법을 사용한다. 나무 주걱으로 쉼 없이 휘젓고 뒤집기를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가마솥 앞을 떠나는 법이 없다. 비비기에 들어가기 전에는 찻잎의 열기를 충분히 식혀야 풀 냄새가 가시고 청량한 향기가 유지된다. 그래서 쉴 새 없이 선풍기도 틀고 부채도 부친다. 차가 만들어지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정성 그 자체다.

“차 맛은 첫 솥과 둘째 솥에서 결정됩니다. 차를 덖는 일은 그만큼 아주 중요한 작업이죠. 첫 솥은 물을 살짝 떨어뜨리면 톡톡 튀어오르는 200℃ 정도에서 10분, 둘째 솥은 7~8분 덖어야 합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차향이 더욱 풍부해지도록 불을 끈 후 뚜껑을 덮고 15분 정도 기다립니다. 흔히 ‘향 덖기’라고 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찻잎이 품고 있는 여러 가지 성분이 스멀스멀 올라온답니다. 코로 들이켰을 때 생잎의 상큼한 향내를 많이 품고 있을수록 잘 만들어진 것이죠.”

차를 만드는 일은 긁히고 데인 상처로 손발이 성할 날이 없는 고된 작업이지만 마음만은 더없이 평온해진다. 뜨거운 가마 앞을 한시도 떠나지 못하는 도공의 마음도 그러했을까? 노곤하게 땀을 빼고 가마솥 옆에 앉아 향긋한 차향에 취해 있으면, 전생부터 해왔던 일이구나 싶을 때도 있다.


1 전문희 씨가 “노래 한 곡 불러줄까요?” 하며 ‘찔레꽃’을 멋지게 뽑았다. 찔레꽃은 하얀 꽃잎에 분홍빛이 살짝 물든 매혹적인 모습만큼 향기 또한 일품이어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꽃. 지리산의 5월은 찔레꽃이 지천으로 핀다. 흥이 나면 지금처럼 ‘찔레꽃’을 목청 높여 부른다. 사실은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노래다.
2 집 안 곳곳에는 항시 넉넉하게 찻잔을 준비해둔다. 언제 얼마나 많은 손님이 찾아올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 책을 내고부터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차를 달라 한다.
3 겨울을 이겨낸 나무의 새순과 풀의 첫 잎을 따서 만드는 것이 백초차. 이름 그대로 백 가지 산야초를 넣는다. 각각의 식물마다 시기가 조금씩 다르지만 주로 이른 봄부터 5월까지 새순이 돋는다. 이때 딴 잎으로 1년 내내 먹을 차를 만들기 때문에 1년 중 가장 분주한 기간임은 말할 것도 없다.
4 지난해 한 한국화 작가가 그를 찾아왔다. 그가 내주는 차 한 잔을 맛보더니 지리산에서 며칠을 더 묵었다. 그러고는 쇠비름, 진달래, 산 쑥… 그가 만드는 온갖 차 이름을 가득 적은 감동적인 선물을 주었다.

“사람들은 산야초 만드는 일이 어렵지 않냐고 물어옵니다. 그럴 때마다 직접 차를 따고 덖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깊고 진한 차 맛에 대해 얘기해줍니다. 술에 취하는 기분이 아닌 차에 취하는 기분을요. 산에서 채집을 하다 보면 갑자기 나타나는 뱀이나 지네에 놀라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두려움도 잠시죠. 깊은 골짜기 아래로 한없이 굴러 떨어지는 와중에도 아픔마저 잊게 하는 황홀경이 밀려옵니다. 온통 짙푸른 초록빛과 새소리로 뒤덮인 지리산 한가운데서 느끼는 정신을 아득하게 하는 야생의 풀 냄새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요?”

작년 가을, 산야초 향기만 한 사람이 없어서 혼자 살았던 그에게 새로운 식구가 생겼다. 지리산 생활 12년 만에 그에게 고운 감물 웨딩드레스를 입게 해준 사람은 지금의 남편 최익호 씨. 아이처럼 거침없고 순수한 모습의 전문희 씨에게 한눈에 반해 그의 평생 반려자가 되었다. 살아생전 짝을 지어주는 것이 소원이었던 어머니, 이제야 그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 같아 전문희 씨는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늘 혼자 명상하듯 마시던 차를 늦은 밤까지 함께 나눌 친구가 생긴 것이 가장 좋다 한다. 봄이면 어김없이 꽃을 피우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는 지리산에서 전문희 씨는 남편 최익호 씨와 그저 자연 속의 풍경처럼 살아갈 것이다. 산야초의 짙은 향기와 매일 매일 변신을 거듭하는 자연에 대한 감탄을 멈추지 않으면서….

성정아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