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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존 멍크스John Monks의 아틀리에 세심한 붓으로 그린 찬란한 빛
취재를 위해 낯선 사람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드는 기분, 마치 그들의 일기장이라도 몰래 훔쳐보는 것 같은 묘한 설렘이 있다. 더구나 그 낯선 사람이 나와 다른 문화 속에 자리한 외국인이라면 설렘은 배가 되는 법. 그런데 그 주인공이 보통 사람이 아닌, 세계의 화단에서 주목을 끌고 있는 예술가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지고 만다. 감히 거장의 일기장을 훔쳐본 뒤 장문의 감상문이라도 한 편 써 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랄까.

1 런던 시내 남쪽 클래펌에 있는 존 멍크스의 작업실은 30년 가까이 그의 손길을 거치면서 세상의 모든 빛을 끌어안는 따뜻한 공간이 되었다.
2 마드리드에서 주워 온 침대 프레임으로 만든 소파와 그가 학생 시절 아르바이트하던 구청에서 쓰던 책장을 들여놓은 거실은 정갈하고 소박한 느낌이다. 그가 설명하지 않았다면 이들 가구의 정체는 절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깔끔한 모습이다.

평범한 일상을 빛으로 밝히는 신인상파 화가 런던 시내 남쪽 클래펌Clapham에 아틀리에 겸 집을 갖고 있는 화가 존 멍크스. 거친 듯한 붓 터치 안에 깃든 섬세한 감수성이 매력적인 그림을 선보이는 그는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현재 그의 작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Metropolitan Museum of Art과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Victoria&Albert Museum 등 유명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세계적 화단에서 제법 ‘거장’의 위상으로 향하는 그가 이방인에게 선뜻 자신의 일기장을 활짝 펼쳐 보였다. 구레나룻을 기르고 미간을 찌푸린 그의 모습은 영화 <카미유 클로델>에 나왔던 젊은 시절 로댕과 무척이나 닮았다. 조각도 대신 붓을 들었다고 하면 딱 맞는 표현일까. 30년 넘게 화가라는 한길만을 걸어온 예술가의 고단한 행보와 끊임없이 ‘자아 찾기’를 시도하는 구도자가 오버랩되는 존 멍크스의 모습은 그 옛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장의 그림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런 외향과 달리, 적당히 아담한 그의 작업실에서 맞닥뜨린 그림 속 주인공은 작은 공간에서 발견한 소소한 일상으로 집중되어 있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볼 수 있는 작업실 창문과 의자, 그림 도구들이 캔버스 위에 살포시 들어앉아 있는 듯하다. 거창한 개념을 담은 추상화도, 시대 의식을 담은 역사적 그림도 아닌, 그저 일상적인 공간을 담은 그림. 평범하고 정겨운 공간에 대한 그의 애착은 수십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사람들은 왜 이 작은 작업실에 집착하고 이를 그리는지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보는 창문은 어제 보았던 창문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에요. 매 시간마다 달라지는 빛처럼 사물도 1분 1초가 다른 거죠.”

그는 항상 유동적인 빛에 대한 깊은 철학을 펼쳐놓는다.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사물과 공간은 모두 ‘빛’에 의해 다른 색깔, 다른 형상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존 멍크스의 ‘빛’에 대한 미학은 이미 빛을 그린 19세기 인상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한 줄기의 빛’ ‘작업실-이른 아침’ ‘요동치는 빛’ 등 작품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듯 빛에 대한 그의 애정은 특별하다. “빛이 비추어진 사물을 그리는 건 다시 해석하면 내 자신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그리는 일입니다. 화가 났을 때 꽃을 보는 것과 기분이 좋을 때 보는 것, 그 느낌이 다르지 않나요? 사물을 보고 그걸 캔버스에 담는 일도 마찬가지죠.” 결국 빛을 그리는 일은 작가의 내면을 비추어내는 일이 아닐까. 그의 작품은 빛을 붓 끝에 옮겨 담는 작가의 고뇌가 담긴 그림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작업실과 집을 살펴보면 빛에 대한 해석 이면에 작가의 공간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느껴진다. 25년 동안 줄곧 한자리를 지킨 그의 삶은 고스란히 공간 곳곳에 대한 사랑으로 번지고, 그 애정은 캔버스를 물들인다.

3 ,4 작업실 곳곳에 스며드는 빛을 탐구하는 존 멍크스는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주목받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평범함에서 발견하는 빛의 미학을 느낄 수 있다.

가족의 합심으로 완성한 그림 같은 집 두 개 층으로 이루어진 그의 집은 19세기 후반에 공장으로 지어진 건물로, 위층은 아틀리에, 아래층은 살림집으로 이뤄져 있다. “아틀리에가 있는 집, 참 그럴싸한 이상적인 공간이죠? 하지만 25년 전 처음 여기 왔을 땐 한마디로 폐허였죠. 그 당시엔 버려진 창고로, 밤엔 택시도 오길 꺼리는 곳이었답니다.” 1979년, 존 멍크스는 흉물스럽게 철골만 서 있는 이 건물을 본 순간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마치 화가의 붓질을 기다리는 캔버스처럼 자신만을 기다려온 건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 재학 당시, 오래된 건물의 철골과 버려진 공간을 그리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다녔어요. 그러다 우연히 이곳을 발견했죠. 당시 1층에 살고 있던 백발이 성성하던 주인은 건물을 팔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더군요. 사정사정해서 2층만 빌려서 작업실로 사용했고, 16년이 지난 후 주인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이곳을 온전히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이쯤 되고 보니 그토록 애착을 가졌다는 1층의 살림집이 궁금해진다.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작업실에서 내려와 조심스럽게 들어선 그의 살림집은 아치형의 대형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눈부신, 그의 그림을 꼭 닮은 공간이다. 보태니컬botanical(식물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 그림을 그리는 부인 수 허버트Sue Herbert, 동물학을 전공하는 아들 조Joe와 딸 앨리스Alice와 함께 단란한 가족을 이루고 있는 존 멍크스. 그는 위층에서는 세계가 알아주는 화가로, 아래층에서는 네 식구의 가장으로 행복한 ‘이중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벽돌 한 장 쌓는 것에서 페인트 마감에 이르기까지 가족이 함께 만들었다는 그의 집에는 가족의 따뜻한 사랑이 배어 있다. “물론 처음엔 건축 업자에게 집수리를 의뢰했어요. 그런데 운이 없게도 실력도 없는 악덕 업자를 만났어요. 돈과 시간만 낭비하다 결국 가족이 나서게 된 거죠. 당시 열 살이던 아들, 딸은 예전에 살던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졸랐지만, 나중엔 집 고치는 일에 재미를 붙였죠.” 이 말을 들으면서 존에게 눈을 흘기는 아내는 아이들을 너무 고생시킨 것 같아 늘 마음 한구석에 안쓰러움이 남아 있단다. 지금처럼 ‘집다운’ 모습이 된 것이 겨우 5년 정도라니 예술가 가족이 아니라면 엄두도 못 낼 작업인 것 같다.


1 영감을 줄 만한 사진들과 화구가 놓여 있는 테이블. 커다란 팔레트를 연상시킬 정도로 테이블 주변은 오래전부터 쌓여온 물감으로 가득하다.
2 가장 친숙한 일상을 캔버스에 담는 일이 더 힘들다는 존 멍크스. 때문에 그렇게 익숙하던 창문들도 어느 날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고 한다. 이는 빛이 주는 영감이자 화가가 풀어내야 할 숙제인 셈이다.
3 미술 서적이 가득한 서재 겸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부부의 모습.

재활용 가구처럼 소박한 행복으로 빛나는 보금자리 마무리 작업은 모델 클라우디아 시퍼의 집을 디자인했던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친구가 제안하는 ‘디자인 가구’는 마치 박제된 동물을 들여놓는 듯, 좀처럼 내키지 않았단다. 궁리 끝에 그는 ‘재활용 가구’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여기 있는 가구들은 대부분 길거리표, ‘메이드 인 로드made in road’입니다. 서재에 있는 소파는 스페인 마드리드에 갔다가 길에 버려진 침대 프레임을 가져와서 만든 것이고, 주방 문은 옆집이 이사 가면서 버린 것을 손질한 겁니다. 앤티크 책꽂이도 제가 학생 때 아르바이트하던 구청에서 버린 것을 가져온 겁니다.” 가구 쇼핑을 위해서는 지갑 대신 ‘드라이버’ 하나만 들고 거리로 나선다는 존 멍크스. 그는 이제 친구들 사이에서도 재활용 인테리어 전문가로 소문난 재주꾼이다. 덕분에 가끔 필요 없는 가구나 인테리어 소품을 들고 찾아오는 친구들의 가구를 협찬받는 일이 종종 생긴다고. 정원 연못 근처에 놓아둔 불상도 친구가 여행지에서 구입했다가 그에게 가져다 준 것으로, 이곳 정원에 잘 어울린다는 강요에 못 이겨 받았단다. 그러나 볼수록 자신의 집에 잘 어울리는 불상 덕에 아시아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직 한국을 방문해본 적은 없지만, 이미 다녀온 화가 친구한테 한국에 대해 많이 들었어요. 관광 기념품도 선물로 받았는걸요.”

1 빛의 잔상을 그리는 화가의 작품이라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존 멍크스의 회화 작품. 그의 집 실내 한 부분을 모델로 그린 것으로 제목 또한 ‘Filtered Light’이다.
2 주방 곁에 있는 작은 공간은 존 멍크스가 아끼는 곳으로 프랑스 앤티크 시계가 걸려 있다. 부인 수가 말하길 이 시계는 집 안에 자리한 살림 중 존 멍크스가 유일하게 ‘돈을 지불하고’ 구입한 시계라고 강조한다.

전시회 때문에 한국을 방문했다는 친구가 기념품으로 가져온 선물, 그건 다름 아닌 부채였다. 그런데 그 부채는 여름에 흔히 광고용으로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것으로 한 보험회사와 어린이 교재 브랜드 로고가 있는 것이었다. 솔직히 웃음이 났지만, 이국적인 문자와 그림에서 한국을 느낀다며 이를 소중하게 간직하는 부부의 모습을 보니 그 ‘진실’이 무색해지며 엷은 미소로 그 수간을 대신하게 된다. 이렇게 하찮은 물건 하나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서 언젠가는 꼭 한국을 방문하겠다는 존 멍크스 부부. 그들의 사연 많은, 하지만 그림 같은 일기장 속에서 찬란한 빛으로 일상을 아름답게 비추는 소중한 ‘인생철학’ 한 페이지를 스크랩해본다.

* 존 멍크스의 개인전이 2월 28일~3월 24일, 런던 Long & Ryle Gallery에서 열린다.
- 홈페이지(www.longandryle.com).

김미영, 이정민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