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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닉 라이프] 아소재 엄윤진 씨의 자연스럽게 살아가기 ‘살기’ 위한 집, 스스로 충만해지는 삶
아소재我蘇齋. 주인은 왜 집 이름을 지으면서 ‘되살아날 소蘇’라는 글자를 썼을까. 아소재는 자신의 원래 모습 그대로 ‘다시 살고 싶다’라는 집주인 엄윤진 씨의 간절한 심정이 담긴 이름이지만, 어쩌면 ‘소생蘇生’은 우리 모두가 집을 통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야산 자락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한옥 아소재에서 ‘자연스럽게’ 사는 법을 배우며 매일 ‘다시 살고’ 있다는 엄윤진 씨의 시골살이는 집과 자연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한다.


나를 살리는 집 ‘아소재’. 엄윤진 씨는 이 집에서 자연스러운 삶을 꿈꾼다.

아소재는 번듯한 대문이 없다. 입구에는 소박한 나무 현판만 걸려 있을 뿐이다. 심지어 도로에서 잘 보이지도 않아 처음 내려가면 입구 근처에서 한참을 두리번거리게 된다. 닫힌 듯 열려 있는 아소재의 입구로 들어서니 제법 수령이 되어 보이는 나무가 만드는 터널 저편으로 한옥이 살짝 자태를 드러낸다. 마치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 같다. 살다 보면 가끔은 ‘필연’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엄윤진 씨에게 아소재가 그랬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던 날, 길을 헤매다가 우연히 해인사를 찾았고, 해인사에 들러 돌아가는 길에 5년이나 방치되어 있던 이 집을 만났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집 둘레 가득 잡목과 풀이 웃자라 있던 집.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집주인에게 전화로 이것저것 물어보고 집을 나서는데, 머릿속에서는 벌써 그 집 대청마루에 그동안 살던 아파트 짐을 내려놓고 있더라고요. 내가 그 집을 찾은 게 아니라 그 집이 나를 부른 것 같아요.”


1 길 건너 과수원에서 딴 사과로 잼을 만들어 10월의 ‘뭘까 바구니’에 넣었다.
2 난방이 잘되지 않는 한옥의 특성을 고려해 특별히 만든 방.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나만을 위한 찜질방이 된다. 벽은 황토 벽돌을 사용했다. 이 집에서 가장 호사스러운 공간.
3 성우당 게스트룸 안에서 본 소미재. 지붕 뒤로 보이는 소나무가 멋스럽다. 집 뒤로 도로가 나면서 소나무가 많이 뽑혔는데, 그 와중에 살아남은 것들이다.


신선하게, 즐겁게 그것이 맛의 비결 발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서 니 맨드라미, 천일홍, 구절초 같은 식물들이 은근히 화려한 색을 뽐내며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직 초록색 기운을 품고 있는 본채 앞마당에서는 고추가 햇빛 샤워를 하면서 반짝거리고, 부엌으로 사용하는 소미재 뒤에는 멋진 자태의 소나무가 병풍처럼 서 있다. 창고인 기어대장간 앞 왕 버들나무 옆에는 잼을 만들기 위해 길 건너 과수원에서 가져온 햇사과가 바구니에 수북이 담겨 있고, 사람이 와도 짖지 않는다는 과묵한(?) 개 ‘레오’가 꼬리를 흔들며 손님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대청마루를 등지고 앞을 보니 엄윤진 씨의 야심작인 연밭 아래로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논이 펼쳐져 있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풍경이다.

본격적인 집 구경은 시작도 안 했는데, 집주인이 밥부터 먹으라고 성화다. 시간의 흔적이 자연스럽게 새겨진 커다란 나무 탁자 위에 투박한 그릇들이 하나둘 오르기 시작한다. 찬이 많은 것도 아니고, 조리법이 대단한 음식도 아닌데, 신기하게 입맛을 돋운다. “여기 오면 다들 이렇게 먹고 놀아요.” 상 위에 오른 채소 반찬들은 푸드 마일리지(식품이 생산된 곳에서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이동 거리)가 대부분 몇백 미터 이내다. 성주 5일장에서 사 온 것도 있고, 이웃들이 놓고 가는 것도 있고, 주변에서 자라는 것도 있고, 마음먹고 키우는 것도 있다.

“곰보배추, 머위, 매실, 차조기, 민들레, 질경이, 씀바귀, 원추리, 유채꽃… 우리 집에서 자라는 풀들은 대부분 먹을 수 있는 것이에요. 이곳에 내려온 이후로 손님이 와도 ‘뭘 해 먹나’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요. 그냥 가까이에 있는 것을 식탁에 올리면 되지요. 예전에는 반찬 가짓수나 요리 솜씨 같은 게 신경이 많이 쓰였는데, 여기서는 신선한 제철 재료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맛있다는 소리를 들어요. 이젠 먹는 일도, 주방에서 하는 일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처럼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즐거움이 떠나면 음식 맛이 없어지더라고요. 그걸 이 집에서 배웠어요.” 아하, 그래서 이곳 이름이 ‘웃으며 맛을 내는 곳’이라는 의미의 소미재笑味齋로구나.


4 본채에 마련한 방. 단체 손님이나 프로그램 진행을 할 때 사용한다. 그중 한 곳은 엄윤진 씨의 서재 공간.
5 성우당 게스트룸 내부.


스스로 살기 위한 집을 만들어가다 남들처럼 “아니, 어쩌다가…” 로 말문을 열었더니, 엄윤진 씨는 오랜 도시 생활을 접고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무 연고도 없는 경북 성주로 덜컥 이사를 온 사연에 대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아소재에 처음 온 사람들은 “집이 멋있다”라는 칭찬으로부터 말문을 열지만, 결국은 “어떻게 살래, 뭐 먹고 살래, 무섭지 않냐”라는 질문을 던진 후에 “용감하시네요”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고 한다. “잡초인지 나물인지 구별도 못 하는 도시 사람이 가족, 친구, 일터를 뒤로하고 시골에 내려가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때 개인적으로 상황이 그리 좋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움보다 ‘다시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지요. 그런 생각이 들자 앞뒤 재지 않고 짐을 꾸렸습니다.” 그렇게 과감하게 내려오긴 했지만,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덩치 큰 한옥이라는 특별한 공간에 적응하는 게 만만치 않았다. 애초에 살림집이 아닌 다목적 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집이었기 때문에 일단 ‘살기 위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급선무였다. 무시무시하게 자란 풀과 나무 정리하기, ‘푸세식’ 화장실 고치기, 주방 만들기, 전기 시설과 보일러 교체하기, 창호지 갈기, 대나무 울타리 만들기, 불편한 동선 개선을 위해 마루 달기 등. 비용 문제가 만만치 않다 보니 이 모든 것을 하나하나 아는 사람들과 친절한 이웃사촌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해결해나가기 시작했다.


1 소미재 옆에 딸린 작은 방을 침실로 사용하는데 방문을 열면 마당과 성우당이 보인다.
2 황토방을 장식하고 있는 소품들. 박스는 시골 장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됫박으로 엄윤진 씨가 직접 옷칠을 해 아주 은은한 빛깔이 도는 멋진 수납공간을 완성했다.


1 연밭에서 딴 연잎을 손수 덖어 만든 연잎차를 대접한다.
2 직접 만든 천연 화장품. 천연 모기약과 버물리 연고, 립밤은 아주 인기가 좋다.
3 아소재표 유기농 사과 잼.


“자고 먹고 씻고 볼일을 보는 데 필요한 최소의 것들만 준비하는 데도 상당한 기간이 필요했고, 집이라는 것을 마치 처음 가져본 사람처럼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어요.” 대화 몇 마디로도 이곳에 뿌리내리기 위한 기초 작업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았다. 하지만 이웃들이 제초제를 뿌리라고 하는데도 이름 모를 아름다운 풀과 나무들을 꿋꿋하게 지켜낸 것, 아궁이가 달린 집주인 전용 황토방을 만들기 위해 만만치 않은 과정을 거쳐야 했던 일, 마을 어른들과 지난한 의사소통 과정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작은 연못 위에 한 송이 연꽃을 피울 수 있었던 일 등은 생각할수록 흐뭇해진다며 엄윤진 씨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번진다. 이곳으로 삶의 거처를 옮긴 지 3년째 접어들었지만, 아소재는 집주인의 삶을 제대로 담아내는 그릇이 되기 위해 지금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아마도 아소재와 엄윤진 씨는 서로의 모습을 더 닮아가게 될 것이다.


엄윤진 씨가 손님들이 오면 주로 차리는 자연 밥상. 그때그때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신선한 식재료를 이용한다.

“뭐, 그냥 사는 거죠. 자연스럽게, 즐겁게” 사는 건 그렇다 치고 밥벌이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도 쿨한 대답이 돌아온다. “쟁여놓은 돈? 당연히 없죠. 돈은 없는 대신 시간을 쓰면서 살면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엄윤진 씨가 생각한 것이 한옥 체험이었다. 처음에는 혼자 잠자는 게 무섭기도 했고 ‘심심한데 누가 오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아이디어였다. ‘별이 비처럼 쏟아지던’ 날, 작은 방이 세 개 있는 한옥 한 채에 성우당星雨堂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예쁜 한지를 바르고, 난방 장치를 갖춘 후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인들이 하나둘 내려와 머물고 갔는데, 지금은 조금 입소문이 나서 근처 해인사나 가야산을 방문하는 사람들이나 가족 단위의 방문객이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가기도 한다. 출판사에서 일한 적도 있고 아이들 독서 지도를 한 경험을 살려 여름이면 초등학생을 위한 독서 캠프와 시골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내년에는 창고로 쓰고 있는 ‘기어대장간’을 북 카페로 바꿔 좀 더 많은 사람이 이곳에 들러 놀고 쉬고 먹고 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 계획도 있다. 엄윤진 씨는 이 집이 나를 살리듯 누군가를 소생시키는 공간, 누군가와 소통하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지금도 끊임없이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궁리하며 산다. 성주에 내려와서 만난 토박이 시인과 의기투합해 성주의 농산물과 자신의 텃밭에서 키운 건강한 먹을거리를 ‘가야산 아소재 수미재의 텃밭’이라는 이름으로 도시에 배송하는 일도 했고, 머위 데이, 창포 데이, 연잎 데이 등 계절에 맞는 이벤트를 한 달에 한 번 진행하기도 한다. 특히 ‘뭘까 바구니’는 아소재의 히트 상품이다. 아소재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먹을거리나 소품을 넣은 선물 바구니를 회원에게 발송하는데, 연회원이 되면 1년 동안 매달 뭐가 들어 있을까 궁금해하며 ‘뭘까 바구니’를 받게 된다. “사실 이익이 남는 일은 아니에요. 근데 바구니를 받는 사람들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아소재와 나랑 연결된다고 생각하면 엄청 신바람 나는 일이지요.”

혼자서 무섭고 외로울 것 같은데, 엄윤진 씨는 오히려 이곳에서 함께하는 즐거움이 뭔지 매일 깨닫는다고 말한다. 먼 곳에 있어도 아소재라는 공간을 통해 이어져 있다고 느끼게 하고 싶고, 이곳에 오면 늘 편안한 느낌,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하고 싶은 것이 그의 소망이다.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고받고 의지가 되는 주변 농가의 어른들도 이곳에서 만난 새로운 소중한 사람들이다.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 같아요. 자연이 제공한 선물을 살짝 빌려 제공하는 것뿐인데 사람들이 이곳을 좋아해주니까요. 비누ㆍ스킨ㆍ샴푸ㆍ모기약까지도 만들어 쓰는 반자급자족 생활을 하고, 계속 몸을 부지런히 놀려야 하는 노동 집약적인 환경이지만 이 집과 함께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손수 덖어 만든 연잎차와 신선한 잼을 얹은 쿠키 한 조각을 간식으로 먹고, 숯불에 구운 돼지고기에 성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막걸리까지 곁들인 성대한 저녁 식사를 했더니 바람 빠진 풍선이 다시 빵빵해지는 것처럼 ‘소생’한 듯하다. “때가 되면 일하고, 때가 되면 놀고 그런 거죠.” 해가 뜨고 지고,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아주 일상적인 삶이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 사람을 만나는 것도, 먹는 것도, 일하는 것도, 무엇을 해도 기꺼이 하려는 마음이 드는 것. 이 집은 그런 ‘자연스러운’ 삶을 꿈꾸게 한다. 문의_http://cafe.naver.com/asoje

(오른쪽) 새집처럼 생긴 대문 옆 우편함.

글 전은정(디자인하우스 출판부) 사진 임민철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