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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수 식품명인의 추성주 댓잎 향 짙은 선비의 술이 익어간다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대숲에 이는 맑은 바람이 느껴지는 담양에서 1천 년의 전통을 잇는 명주 ‘추성주’가 익어간다. 술맛의 반이 재료에서 나온다면 나머지 반은 정성에서 나오는 법. 자연을 벗 삼아 한약재의 알싸한 맛과 댓잎 향 짙은 추성주 한잔을 곁들이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천 년의 혼을 담아 꽃피운 술
전남 담양은 대나무의 고장이면서 정자의 고장이자 가사 문학의 산실로도 불린다. 경치 좋은 곳마다 시인 묵객들이 모여 토론하고 시를 읊으며 붓질하고 잔질하던 정자가 그야말로 천지다. 소쇄원처럼 정자를 여러 개 앉히고 연못을파 아름답게 꾸민 원림(우리나라 전통 정원)도 많다. 고색창연한 정자 마루에 걸터앉아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세상일에 휘둘리느라 후끈 달아올랐던 마음도 몸도 착 가라앉는다. 담양에 풍치를 아는 선비가 많았던 까닭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선비 문화를 꽃피운 곳엔 술이 따르는 법. 담양의 진산인 추월산 기슭에서 1천 년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잇는 명주가 있으니 바로 댓잎 향 짙은 추성주秋成酒다. 추성은 통일신라 경덕왕(757년) 때부터 고려 성종(995년) 때까지 2백50년간 담양을 추성군으로 부른 지명을 본떠 그대로 이름 붙인 전설의 술이다. 명주는 어느 곳을 가든 명산과 명찰에서 유래된 경우가 많은데 추성주도 예외는 아니다.

1700년경 담양 부사 이석희가 이곳 풍물에 대해 쓴 담양군지 <추성지秋城志>를 보면 “고려 문종 14년(1060년) 참지정사를 지낸 이영간이 추월산 금성산성에 있는 연동산에서 공부할 때 스님들이 절 주변에서 자라는 여러 가지 약초와 보리ㆍ쌀을 빚어 곡차를 즐겼는데, 그 비법이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라고 나온다. 수행 중이던 스님들의 건강을 지키는 수단이었던 듯한데, 이후로는 약주藥酒로 허 약한 이들에게 약이 되기도 한 모양이다.

추성주가 장안의 명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선비 문화와 어우러지면서부터다. 술맛이 얼마나 기막힌지 마시면 신선이 된다 하여 ‘신선주’라고도 하고, ‘제세팔선주濟世八仙酒’로도 불렸다. 조선 말기까 지 그 명성이 서울에 자자할 정도로 인기가 매우 높아서 진상품 또는 고관대작에게 보내는 상납주로 널리 애용할 정도였다. 가사 문학의 대가인 면앙정 송순이 과거 급제 60주년 기념 잔치인 회방연回榜宴에서 당대 내로라하는 명사이던 송강 정철, 백호 임제 등과 함께 3일 동안 마음껏 추성주를 즐겼는데, 숙취가 없었다는 이야기가 한양까지 퍼져 명주의 반열에 올랐는 설도 있으니, 이만큼 풍류에 잘 어울리는 술도 없다.

(왼쪽) 명주를 잇는 식품명인이지만 술은 즐기지 않는다. 혀가 무뎌져 술맛을 놓칠까 염려되어서다. 이런 마음은 아들에게도 이어져 추성주는 5대째 양씨 가문의 가양주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추성주가 1천 년의 세월에도 흐트러짐 없이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남원 양씨 집안에서 가양주로 전래되어온 덕분이다. 1990년에는 국가 지정 민속주로 인증받았고, 그 중심에 양대수 명인이 있다. 지난 2000년에는 정부의 식품명인 22호로 지정되었는데, 추성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선친의 유언 때문이었다.

“추성주의 제조법을 대를 이어 유지하라는 것이 아버님의 마지막 당부 말씀이셨습니다. 증조부께서 연동사의 큰 시주셨는데, 약주를 퍽이나 즐기셨던 모양입니다. 그때부터 이어오던 추성주가 가양주가 되었지요.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주세령이 내려지는 바람에 가양주 씨가 마르기도 했어요. 조선시대까지는 집집마다 술을 빚었는데, 그 씨를 말린 겁니다. 그러고는 일본식 주조법을 들여온 거예요. 술도가가 사라진 자리를 일본 술이 메웠고, 광복 이후에도 전통주는 제자리를 찾기가 어려웠지요. 추성주도 그 맥이 뚝 끊길 뻔했는데, 다행히 구전으로 전해진 것과 함께 증조부께서 족자에 3백여 한자로 써넣은 것을 조부께서 한글로 풀어 쓰신 것이 대대로 남아 있어 비법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박 차고 나오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어릴 적 할머님이 추성주를 손님들에게 대접하면 술맛 좋다고 극찬하시던 모습이 새삼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가업을 잇기로 마음먹었어요. 우리 집 가업만 잇는 게 아니라 이 좋은 술도 살리고 더불어 쌀도 살리는 길이니까요.”

(오른쪽) 한약재를 넣어 빚은 추성주는 혈액순환과 신경통에 좋고 강장 효과가 뛰어나다. 게다가 숙취가 오래가지 않고 뒷맛이 담백하며 속 쓰림이 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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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의 어린순인 죽순은 담양의 특산물이기도 하다. 식품명인의 아내 전경희 씨는 죽순회무침과 죽순 영양채볶음을 안주로 자주 곁들이는데, 무침은 새콤달콤해서 입맛을 돋우는 데 좋고, 볶음은 아이들도 잘 먹어 밥반찬으로도 좋은 실속 있는 메뉴라고.
2 요즘 소비자들은 알코올 도수가 낮은 술을 선호한다. 담양 대나무의 풍취를 느낄 수 있는 15% ‘대통대잎술’이 단연 인기다.


명인의 우직한 성품이 빚어낸 추성주
“원래 담양의 옛 고을명인 추성의 ‘성’ 자는 이룰 성成이 아니라 재 성城입니다. 모든 것이 가을에 이루어지니 이룰 성으로 바꾸어 ‘추성주秋成酒’라 했지요. 술 빛도 가을 벼를 물에 헹군 듯 옅은 황금색입니다. 추성주는 눈으로 먼저 마시고 코로 향기를 즐긴 후 입에 넣으면 혀끝의 감각을 하나 하나 자극할 만큼 맛이 부드럽고 깊지요.”

향기로운 술을 얻는 데는 좋은 쌀과 좋은 물, 좋은 누룩 이 세 가지만 갖추면 된다는 것이 정한 이치. 추성주도 순곡주로, 맑게 떠내는 술이다. 밑술에 누룩과 10여 가지 한약재를 섞어 빚은 이양주로, 한약재의 그윽한 향과 알싸한 맛이 특징이다.

추성주 빚는 법은 모든 곡주가 그러하듯 밑술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한다. 우선 멥쌀과 찹쌀을 3:1의 비율로 섞어 정성껏 씻어 10~12시간 물에 담가 불린 후 고두밥을 짓는다. 고들고들하고 되게 지어지면 차게 식힌 뒤 누룩과 엿기름 물을 잘 버무려 25~30℃에서 3일 동안 1차 발효한다. 이것을 다시 30~35℃에서 이틀간 2차 발효하면 밑술 빚는 과정이 끝난다. 이 밑술 온도를 25℃ 정도로 낮춰 덧술 빚기에 들어가는데, 이때 밑술에 누룩과 함께 한약재 추출물을 넣는다. 이렇게 덧술 빚기가 끝나면 20~25℃에서 본격적으로 발효ㆍ숙성에 들어간다. 12일 정도 지나면 발효가 끝나고, 다 익은 덧술에서 술지게미(술을 거르고 남은 찌꺼 기)를 걸러내면 알코올 15%의 약주가 된다. 이를 증류하면 알코올 40% 소주가 되고, 여기에 한약재 추출물을 2차로 가미하고 20℃에서 숙성해 대나무 숯으로 걸러내 1백 일 이상 재우면 알코올 25%의 추성주가 된다.

3 ‘대통대잎술’을 직접 자연 대나무 통에 주입하면 자연스럽게 2차 숙성이 이뤄진다. 이 통은 일회성이다.

“한약재가 첨가되는 추성주는 술 빚는 과정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닙니다. 한약재 특성에 따라 달이거나 찌고 볶는 방식이 저마다 다르거든요. 약재 다루는 법을 모르면 추성주도 제대로 빚지 못할 것 같아 한약방이고 약재상 등을 열심히 찾아다녔죠. 구기자와 갈근은 달이고, 오미자와 우슬은 볶고, 연뿌리는 쪄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알맞은 정도로 판단하며 빚는 과정이 사람 손에 달렸기에 수만 번을 거듭해도 매번 같은 술맛을 내기는 어려웠을 터. 술을 빚어 처음 주위 사람들에게 맛을 보였을 때 “술이 싱겁다” “냄새가 난다”는 등 반응은 시원찮았지만,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했던가. 꾸준히 숙성 과정을 조절하고 약초를 연구하다 보니 지금은 전통 비법을 제조 원리로 한 현대식 설비까지 갖춰 대량생산도 가능하다.


4 선친의 유언에 따라 추성주의 명맥을 잇는 식품명인 22호 양대수 씨.
5 소곡주를 증류해 소주를 내리는 것이 전통 방식. 일정 온도 이상 올라가면 작은 구멍으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곧이어 맑디맑은 소줏고리를 통해 소주가 한 방울씩 떨어진다.


6 대나무 속의 얇은 비닐막인 죽황. 한약재 중 최고로 꼽히는 것 중 하나다. 열을 내리고 가래를 없애며 고혈압과 노화 방지에 좋다.
7 추성주를 빚는 과정에서 나오는 증류수에 댓잎을 넣어 만든 ‘대잎술’과 죽력(누룩 냄새를 중화하는 대나무 진액), 천연 사과 과즙, 오미자를 넣은 ‘기대주’는 젊은 층에게 제법 인기몰이 중이다.


“옛 방식만 고수하면 온종일 추성주를 빚는 데 매달려도 20L 밖에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전통 비법을 원리로 현대적 방법을 모색했지요. 전통주 제조의 핵심은 누룩인데, 전부 누룩으로만 만들면 발효 기간이 길어지니 누룩에서 발효균사만 뽑아서 고두밥에 섞었지요.” 그뿐만 아니라 제품의 다양화를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알코올이 25%인 추성주와 40% 증류식 소주인 ‘타미앙스’, 15% 약주인 ‘통대잎술십오야’, 이외에 최근에는 12% ‘대잎술’, 13% ‘기대주’, 16% ‘복분자주’ 등 와인 타입의 전통주까지 선보이고 있는 것. 추성주 기능 전수자로 나선 아들 재선 씨가 대학에 들어가 식품영양학을 전공하는 것이 물심양면으로 도움이 된다고.

“5대째 명주를 잇는 가문이니, 전통주의 대중화에 보탬이 되고자 숙박을 겸한 펜션 형태의 체험장도 짓고 있습니다. 선조들은 집에서 직접 술을 담가 이웃과 벗들을 초대해 함께 마시며 정을 나눴지요. 담양을 찾는 이들이 이 고장의 전통주인 추성주를 직접 빚어보고 이를 보관, 숙성한 후 가정에서 받아보면 의미가 클 것 같습니다.”


촬영 협조 추성고을(www.chusungju.co.kr, 061-383-3011) 

글 신민주 기자 사진 박우진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