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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스타일] 미술가 김기호ㆍ구현숙 씨 부부 씨앗을 뿌리고 기다리는 농부처럼, 붓 대신 호미 잡고
충남 당진, 7km에 이르는 벚꽃 터널을 지나면 아미산 아래 작은 마을에 미술관이 있습니다. 폐교를 손수 고쳐 만든 ‘아미 갤러리’는 도시의 젠체하는 여느 갤러리와는 다릅니다. 밭일이 더 재밌는 화가 박기호 씨와 바느질로 세상과 소통하는 설치미술가 구현숙 씨 부부가 지난 10년간 공들여 일군 작지만 ‘큰 삶’의 현장입니다.


붓 대신 호미 잡고 흙일에 매진하는 부부. 미술관에서 집으로 올라가는 작은 언덕에는 목련, 진달래, 원추리가 활짝 피어 봄소식을 알린다.

“어휴, 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오늘 오신다고 해서 어제 제 키만 한 동백을 저쪽으로 옮겼어요. 그 큰 감이 뭐지요? 아, 대봉. 그 감나무를 뒷마당에 심었어요. 아침에도 목단 열 그루를 심었어요. 5월에 피면 참 예쁠 텐데.” 서울 손님이 도착하자마자 꽃 자랑을 늘어놓는 박기호 씨. 예쁜 꽃이 채 피지도 않았는데, 너무 일찍 찾은 손님들에게 못내 서운한 마음을 드러낸다. 기워 입은 듯 여기저기 조각천이 붙어 있는 청바지 차림의 그의 모습은 화가라기보다 정원사에 가깝다.

“그 옷요? 작년에 ‘핸드메이드 데이’할 때 리폼한 거예요. 이걸 보고 친구가 재활용하라고 옷을 몇 보따리 보내줬어요. 마음에 들어서 입으려고 몇 개 꺼내두었죠. 저희는 사서 쓰는 게 없어요.” 설치미술가인 구현숙 씨도 한마디 거든다. 대청마루에 턱 걸터앉아 바느질거리를 챙기는 아내와 손님을 맞기 위해 찻상 다리를 고치는 남편. 여느 시골 촌부의 일상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며 ‘전원생활 취재인가?’ 잠시 착각에 빠진다.

흙일하는 미술가
당진의 한 폐교를 손수 일궈 미술관을 개관했다는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찾은 것은 4월 첫째 주. ‘폐교’를 염두에 둔 탓일까. 아직 황량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하얗게 칠한 학교 건물과 소담한 한옥, 그리고 조금 이르게 핀 꽃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무심히 흙일 하는 부부. 바로 지난 10월 개관한 아미갤러리의 박기호, 구현숙 관장이다. 멀리 아미산 봉우리가 보인다고 하여 지은 이름 ‘아미’ 갤러리. 문득 제주도를 사랑한 사진가 김영갑 씨의 두모악 갤러리가 오버랩된다.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전시한 작품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담겨 잔잔한 울림이 있는 이곳은 부부가 지난 18년 동안 일군 터전이다.

“외국은 시골에도 작은 미술관이 많아요. 식물이 잔뿌리로 영양분을 흡수하는 것처럼 문화도 마찬가지지요. 큰 갤러리 하나보다 문턱 낮은 작은 미술관 여럿이 생활 속에 스며들어 전하는 감동이 더 클 수 있어요. 우연히 들렀다가 소박한 미술 작품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그 여운을 안고 대형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다시 찾지요. 문화 불모지인 이런 시골 마을에서 작은 미술관을 통해 그런 다리 역할을 하고 싶어요.”

박기호 씨는 이곳 충남 당진이 고향이다. 그가 어린 시절 에피소드를 이야기한다.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한테 크게 꾸중을 들은 적이 있었어요. 책을 읽으라고 하셨는데 못 읽었죠. 첫 장부터 끝까지 빼곡히 그림을 그려 글씨가 안 보였거든요.” 당시 크게 꾸짖던 선생님은 훗날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파리 유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이 폐교를 소개해준 분이기도 하다. 반골 기질이 강하고 자유분방하던 그는 실력 없는 교수를 탓하며 수업을 빼먹기 일쑤였지만(추계예술대학 1회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오히려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거머쥔다. 서른 살에 훌쩍 떠난 파리 유학. 파리 보자르에 입학하고 우연히 姑 이응노 화백의 아틀리에를 작업실로 얻는 행운까지 갖게 된다. 그리고 아내 구현숙 씨를 만난다. 당시 구현숙 씨는 프랑스 국립미술대학교를 졸업하고 영국에서 지내고 있었다. 마침 한국에서 유학 온 한 청년이 이응노 화백의 아틀리에에서 작업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경 갔다가 박기호 씨를 만난 것. “전시가 있으면 전화할 테니 연락처를 쪽지에 적어두라”며 그는 은근슬쩍 애프터를 신청했고, 둘은 1년 후 재회한다.

(왼쪽) ‘그리 크지 않은 삶’을 추구하며 만족해하는 부부.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청년’으로 살아가는 노하우다.


(왼쪽) 작은 것 하나 허투루 버리지 못하는 박기호 씨. 수년간 구독한 미술 서적과 논문 자료, 마을 어귀에서 주운 항아리가 벽면을 한가득 채웠다.
(오른쪽) 폐교 미술관 공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작업대도 만들고, 문도 새로 다는 등 하나씩 만드는 재미가 쏠쏠하다.


평생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살고 싶었던 자유분방한 남자 박기호와 작가로서 뉴욕에 자리 잡을 것을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던 여자 구현숙은 그렇게 우연이 필연이 되어 결혼하고 엉뚱하게도 남자의 고향, 이곳 당진에 자리 잡는다. 7년간 장기 임대한 폐교를 10년 전에는 아예 사들여 하나씩 차근차근 고쳤고 지난 10월 미술관으로 등록했다. 그리고 6개월 후, 긴 겨울잠을 마친 부부는 첫 전시회를 앞두고 있다. 주제는 ‘시차놀이’. 프랑스에서 유학한 50여 명의 작가들의 기획전이다. “파리에서 8년 유학하고 고국인 한국에 왔는데 낯설었어요. 결손된 시간, 그래서 ‘시차’예요. 파리에서 한국으로, 또 이곳 당진으로 지금 저희 상황도 마찬가지지요. 고향에 뿌리를 내렸지만, 이곳에서도 묘한 이방인으로 지난 17년이라는 세월을 섞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죠. 솔직히 그동안 저와 기호 씨 모두 작품 활동을 한참이나 못 했어요. 폐교를 고치는데만 10년이 훌쩍 지났지요. 레지던스도 가장 먼저 했을걸요?”

그들이 밥 지어 먹이며 키운(?) 작가는 서너 명이 된다. 요즘은 폐교를 작업실로 쓰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많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교장의 사택이던 뒷마당 한옥에서는 3년동안 동양화가가 묵었고, 한 조각가는 이곳에서 작업하며 대학 강의를 하다 서울로 장가를 갔다. 당진의 한 고등학교 교사는 이곳에서 그림을 배우고 전시까지 열어 평생 품고만 있던 화가의 꿈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제 세상에 숨어 있는 보석 같은 작품을 더 많이 내보내려 한다.

구현숙 씨는 요즘 바느질해 그릇을 만든다. 조각천으로 단단한 밥그릇을 만들어 소통의 메시지를 담고 싶다고.

문화? 싹 틔우듯 키워야지
박기호 씨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끼’가 있었다면, 아내 구현숙 씨가 미술가가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자 학습의 결과였다. “중학교 때 친한 친구 어머니가 미술 애호가였어요. 그 집에 가면 거실에 김기창, 김은호 화백의 그림이 걸려 있었지요. 당신의 딸과 친하다는 이유로 덕수궁에서 열리는 국전, 현대화랑, 진화랑 등에 데리고 다녔죠. 그렇게 그림을 보는 일이 반복되던 어느 날, 막연히 그림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구현숙 씨는 좋은 화가가 되기보다는 좋은 그림을 많이 보고 공부하고 싶었단다. 체험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결과였다. 그렇게 미술 교육을 받은 그는 프랑스로 유학을 다녀왔고, 그 경험을 토대로 현재 새 희망을 키우고 있다. 당진 지역에서 프랑스로 유학 간 아이들이 꽤 있는데 모두 이 ‘폐교’ 출신이다. 그것도 1, 2등 하는 모범생이 아닌, 이른바 문제아로 낙인찍힌 아이가 대부분. “프랑스 입시는 학생의 잠재된 재능을 봅니다. 국립 미술학교는 학비가 없지요. 일주일에 세 번씩 그림 수업을 하고 프랑스어 수업을 병행하며 꿈을 키우라고 조언했어요. 운 좋게도 가르친 학생들은 모두 프랑스 국립대학에 입학했고, 아주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어느 한 동네에 외지인이 들어간다는 것은 물에 물감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전혀 다른 문화 코드의 사람이 등장함으로써 암암리에 그 마을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곳 당진은 문화적 불모지다. 문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실무를 맡고 있기는 어디나 매한가지. 박기호 씨가 당진에 처음 내려와서 한 일은 벚꽃 심기다. “당진에서 여기까지 7km 조금 넘으니 길 양쪽으로 15km가 되는 거죠. 환경운동연합에서 첫 사업으로 무얼 하면 좋겠냐 묻기에 단번에 ‘나무를 심어야죠’ 했어요. 군청에 나무를 신청했더니 안 된다고 하더군요. 여기저기 알아보다 한 대학 조경학과에서 나무 5백 그루를 기증받았지요. 우리 학교(폐교)에서 그림 수업을 받는 아주머니들이 스무 명 정도 있었는데 몽땅 나가서 같이 나무를 심었어요.” 그렇게 해마다 조금씩 심어 십수 년이 지난 지금은 딱 미술관 앞까지 벚나무 길을 완성했다. 그 길에 벚꽃이 피면 당진 시내에서 학교까지 꽃길이 뚜렷하게 생긴다.

문화라는 것이 그렇다. 결코 화려해서 감동을 주는 게 아니다. 조그맣게 싹트듯 나오는 것인데 대부분 그것을 간과하고 큰 것, 표나는 것만 앞세운다. 그러던 중 재능은 있지만 꽃필 기회가 없던 그 아이들을 만났다. 파리의 패션 학교에 들어간 한 아이는 어린 시절부터 옷 만드는 게 좋았지만 그게 ‘패션’인지는 몰랐단다. 옷 짓는 것도 ‘아트’라며 드로잉을 가르 쳤다. 대학 강의도 해봤지만(얼마 전까지 추계 예술대학교 겸임 교수직을 맡았다), 수백 명을 가르치는 것보다 눈이 반짝이고 맑은 한두 명의 새싹을 키우는 일이 훨씬 보람 있고 의미 있었다. 물론 레슨비는 없었다.

(왼쪽) 전시관 복도를 꾸며주는 하늘과 구름 설치 작품. 동심이 느껴진다.
(오른쪽) 담박한 그들의 삶의 철학이 묻어나는 침실 공간.

(왼쪽) 책의 글자를 한 자 한 자 오려 밥그릇에 담아 연출한 구현숙 씨의 설치 작품. 마음의 양식을 쌓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른쪽) 구현숙 씨는 요즘 바느질로 드로잉하는 작업에 열심이다.


작지만 밀도 있는 삶
피터 멘젤의 <물질세계(meterial world)>를 보면 우리가 소비생활을 하기 때문에 더 나은 삶을 누리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이 책은 사진작가 열여섯명이 세계를 여행하며 각 나라의 중산층 가정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진가들은 그 가정집의 모든 살림살이를 집 앞에 내놓고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몇 안 되는 조리 도구와 청소 도구에 의미를 부여한 가족이 있는가 하면, 네 대의 자동차와 10m가 넘는 소파에 파묻혀 본연의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 가족도 있었다.

이러한 일례로 우리의 삶을 다 들여다볼 수 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과 그로 인해 소요되는 시간이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부부의 삶은 ‘작지만 밀도 있다’ 할 수 있다. 부부가 손수 일군 미술관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정갈하게 잘 정리되었고, 최소한의 가구가 놓인 살림집은 검박하다. 전시실은 모두 세 곳. 누구나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연습실과 DIY를 할 수 있는 창고, 박기호 씨의 작업실 겸 수장고가 있다. 구현숙 씨의 작업실은 이 넓은 학교 건물에서 고작 거실 한쪽이다. 굳이 커다란 공간이 필요 있겠나 싶어서다.

거실 한쪽을 장식한 오브제의 재료는 은행잎. 수많은 은행잎을 쌓아 만든 그 기둥은 단단해 보이지만 사실 무척 유연하다. 고양이가 제일 좋아하는 놀잇감이기도 하다.

“요즘 설치 작업이 굉장히 요란스러워졌어요. 뭐든지 다 갖다 놓으면 설치라 생각하는데 사실 개념적으로 함축되어야 하지요. 저는 생각의 공간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작업실을 둘러보니 밥그릇에 작게 오려진 글자가 한가득 담겨 있다. 1993년, 어느 날이었다. 도시에서는 늘 바쁜 생활이었기 때문에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좋아하는 책을 읽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근데 폐교에 내려오니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책을 읽는 시간도 많아졌다.

어느 날 책을 보다 “글은 말로 다할 수 없고 말은 뜻을 다할 수 없다”라는 글귀를 발견했다. 즉흥적으로 그동안 읽은 많은 책을 잘랐다. 읽은 책들을 거꾸로 다시 읽으면서 한 자 한 자 오려내는 반복되는 작업에서 묘한 쾌감을 느꼈다. 이것이 작품이 되어 세 번의 개인전을 연다. 미술관 두 번째 전시실 바닥에 있는 하얀 백자는 그때 설치미술의 한 부분. 노자의 도덕경 같은 경우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너무 소중해 그릇에 담아 벽에 걸었던 기억이 난다. 모든 작업의 소재는 일상에서 나오는 것. “그릇요? 저는 그릇이 영혼을 담는 집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믿어요.”

18년 동안 손수 일군 미술관, ‘아미 아트 갤러리’
1년에 두번 두세 달씩 여행을 떠나는 부부. 도시보다는 시골을, 오지를 많이 찾는다. 50대가 되니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예술, 문화의 문턱이 그만큼 낮아지려면 나부터 바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박기호 씨. 대형 미술관은 관람객을 유치하기 위해 외국 유명 작가 전시 위주로 프로그램을 짠다. 그 때문에 몇몇 잘나가는 작가 빼고는 우리 작가들이 설 곳을 찾기 어렵다. 그는 우선 소외된 곳에서 열심히 작업하고 있는 작가들에게 편한 전시 공간을 내주고 싶단다. 그렇게 꼬박 10년을 준비했다. “한국의 피카소라 칭하는 이응노 화백의 아틀리에는 원래 신발 공장이었어요. 건축가들이 자주 찾아오는 거예요. 앞집에서 지붕을 걷어내면 그걸 주워다 벽에 붙여 콜라주를 했대요. 주운 막대기로 담을 만들고 그냥 하얗게 칠하기만 했는데, 한 건축지에 아름다운 담으로 소개 되기도 했지요.”

(왼쪽) 지난 10년간 정성껏 가꾼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돌담. 손으로 하나 하나 쌓은 돌담 아래 수선화를 옮겨 심어 소박한 정원이 되었다.
(오른쪽) 작지만 짜임새있게 구성된 소박한 한옥. 구정만 지나면 온통 문을 열고 지낸다. 이곳에서는 매주 작은 바느질 모임이 열린다.


멋을 부린 곳 하나 없고, 한 군데도 반듯한 곳이 없는데 그 아름다움이 만국 공통어처럼 전해지듯 소소한 감동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미술관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박기호ㆍ구현숙 씨. 그들이 생각하는 시골 미술관은 그저 시골스럽게 그림도 보고 꽃도 보며 촌스럽게 나무 그늘에 앉아 김밥도 나눠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이 부부는 아이가 없다. 20년 전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서로를 ‘기호 씨’ ‘구현숙’이라 부른다. 바라보는 곳이 한곳이라 다툴 일도, 후회할 일도 없단다. 내 작업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작업실, 더 나아가 미술관만 바라보고 달리던 부부는 이제 지역과 좀 더 넓게 소통하려는 노력을 한다. 문화적인 프러포즈를 많이 할 예정. 꽉 막혔다 생각한 이곳 군청의 문예진흥원에서 기금을 지원받아 개관식과 첫 전시를 치를 예정이다. “개관식 날 운동장에서 콘서트가 열려요. 요즘 세시봉으로 인기를 얻는 송창식과 조영남이 공연을 펼치지요. 소란스러운 것은 싫었지만 제법 큰 동네잔치가 될 것 같아하기로 했죠. 동네 어르신들도 좋아할 것 같고요.”

간디의 말처럼 세상을 바꾸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과 의무로 꽉꽉 찬 ‘큰 삶’을 꾸리고 있다. 하지만 정말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비록 그것이 ‘그리 크지 않은 삶’일지라도 스스로 변하면 행복할 수 있다.

글 이지현 기자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