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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 떠나요] 봄에 걷는 전북 고창의 길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정신에도 습도라는 게 있다면 감성으로 채워진 젖은 정신으로 걷게 되는 동네가 고창이다. 청보리밭길, 요즘 뜨는 질마재길, 미당 서정주의 흔적을 따라 걷는 길, 벽화 마을로 유명한 돋은볕마을길까지. 청보리 까슬한 봄, 내가 걸은 고창의 길들에는 20여 년 전의 추억이 숨어 있었다.


학원농장의 청보리밭. 4월 말쯤에 그 푸른빛이 절정에 달하기 때문에 이 시기에 고창 청보리밭 축제가 열린다.

남도의 비옥한 들에 바람이 흐르고 보리밭에 물기가 감돈다. 나는 보리밭 사잇길을 휘적휘적 걷는다. 미끈한 포장도로에서 걷는 양 ‘뚜벅뚜벅’이 아니라, 밭도랑에 몸을 맡기고 ‘휘적휘적’ 걸어간다. 그 뒤 수풀 속에서 뻐꾸기가 봄기운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아양을 떨며 울어댄다.

김치 먹는 개를 보고 우는 기묘한 감수성을 가졌던 대학 시절, 난 고창에 와서 두 번 울었다. 역사학도의 연중행사인 춘계 답사길이 었던 것 같다. 해가 주춤주춤 산을 넘는 시간, 난 고인돌 유적지에 앉아 아랫동네를 내려다보며 울었다. 그 시간은 마치 오정희 선생의 글에 등장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 같았다(해가 설핏 기울기 시작하는 이 시간을 오정희 선생은 ‘저만큼 보이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미묘한 시간’이라 했다. 곧 빛과 어둠, 존재와 부재, 이편과 저편, 현실과 꿈,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면서 익숙하던 것들이 낯설어지는 두려움과 슬픔이 몰려드는 시간. 그래서 우리를 위로해주는 묘약처럼 취기가 필요한 시간이라 했다). 또 한 번은 바람에 술렁이는 청보리밭을 걸으면서였다. 대체 왜 울었느냐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나는 그저 김치 먹는 개를 보고도 우는 기묘한 감수성의 청춘이었다.

20여 년 만에 고창에 왔다. 그것도 청보리 익어가는 봄날 새벽에. 학원농장 30만여 평에 펼쳐진 청보리는 안개 속에서 바람에 술렁이고 있었다. 둘레둘레 바라보아도 푸른색밖에 없구나 생각한 순간, 봄 햇살에 안개가 걷히고 구릉지대의 풍경이 제대로 들어온다. 아직 보리는 첫돌 지난 녀석의 잠지만큼만 땅에서 올라와 있다. 드넓은 보리밭 사이사이에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오솔길이 있고, 군데 군데 정자도 있고,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인 밤나무 숲길도 있다. 그리고 황혼을 닮은 황토. 이곳은 전 국무총리 진의종 씨가 1960년대 광활한 야산을 개간해 만든 곳으로 지금은 장남인 진영호 씨가 꾸리고 있다. 매년 4월 말이면 이곳에서 고창 청보리밭 축제가 열린다(올해는 4월 23일부터 5월 8일까지). <웰컴 투 동막골>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어느덧 살가운 햇살이 내리쬐자 청보리밭에는 풋내가 오소소 퍼져나간다. 남풍이 보리 잎을 숫처녀 머리처럼 쓰다듬는다. 아름답다.


백제 때 창건한 고찰 선운사. 4월 하순에 절정인 동백나무 숲, 아직 가지만 있는 목백일홍을 보고 오길 권한다.

(왼쪽) 강학 講學과 수선 修禪의 도량’인 선운사에는 40명 이상의 스님이 계신다.
(오른쪽) 미당 시문학관에 전시된 서정주 선생의 탁자와 의자.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설운 날 말이에요
선운사의 3천 그루 동백나무에 핏빛 꽃송이 피어나려면 아직 멀었다. 그런데도 산도 깊고, 도솔 계곡도 깊고, 가로수 행렬도 깊은 이 절에 사람 행렬이 더 깊다. 초파일을 앞두고 복을 빌러 온 이들, ‘호남의 내금강’이라 부를 만큼 계곡과 숲이 아름다운 선운산으로 봄 마실 나온 이들, 요즘 뜨는 질마재길로 산행 온 이들로 인산인 해다. 4월 말쯤 3천 그루의 선운사 동백나무 숲(천연기념물 제184호)에 꽃이 만개하면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 것이다. 선운사 동백나무는 동백 자생지로는 북단에 있어 4월 중순이나 5월 초순에 꽃을 피운다. 그래서 춘백 春栢이라 부른다. 불발된 사랑처럼 일순간에 떨어져버리는 그 붉은 춘백에 사람들은 정신이 휘청인다. 선운사 동백나무 중엔 5백 살 된 고목도 있다.

(왼쪽) 이 황토가 고창의 청보리와 복분자를 힘 좋게 키운다.

절 앞마당에 수천 개 연등이 나부끼고 있다. 대웅전 뜰 돌계단 위에는 그 유명한 ‘선운사 목백일홍’ 두 그루가 서 있다. 맨살로 배배 틀어 오른 폼이 가부좌 틀고 앉은 듯 보이는 나무다. 불심 깊은 불자들은 이 나무가 오랜 수행으로 가지가 굽고 삼매경에 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이 목백일홍 앞에서 눈을 감으면 정토가 아른거린다는데, 그래서 이 앞에선 꼭 두 손 모으라는데, 지은 죄가 하도 많아 부처님도 예수님도 내 안에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사는 나는 차마 눈도 못 감겠다. 대신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라는 미당의 시를 입안에서 읊는다. 목백일홍 앞을 비껴나니 대웅전 문 활짝 열고 앉으신 부처님이 보인다. 4백 년 된 대웅보전 안에 노스님의 독경 소리 가득하다.

일주문을 나와 사하촌으로 내려오는데 삼삼오오 모인 좌판에 향기로운 쑥떡 냄새, 복분자술 달큰한 향기가 자꾸 추파를 던진다. 20여 년 전 그 시절, 스무 살의 치기 어린 우리는 집에서 훔쳐온 양주 한 병을 사하촌 여관의 변기 안에 병째로 넣어 차게 해서는 보약처럼 나눠 마시며 웃었다. 나는 오늘, 점심밥으로 양주 대신 복
분자술 몇 병 눕히며 마음의 허기를 달랜다.

미당이 위로한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복분자 술 몇 잔으로 봄 불에 짚단 스러지듯 시름이 사라진 나는 미당 서정주 선생이 나고 자란 진마마을로 향했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던 미당의 시처럼 이 동네엔 바람이 많다. 바다가 건너다 보이는 자리에 앉아 곰소만 갯벌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온몸에 받는 집이 미당의 생가다. 1970년경부터 방치된 이 집은 2001년 옛 모습으로 복원했다. 우물, 여남은 개의 항아리가 놓인 장독대, 툇마루가 고즈넉한 기운을 더한다. 문구멍으로 방 안을 들여다보니 그늘이 먼지와 함께 가라앉아 있다. 미당은 이 집에서 아홉 살때까지 살았다. 이미 다섯 살부터 고독한 영혼을 품은 소년이었다.

“그런저런 걱정에 가위 눌려서/ 툇마루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까닥이다간/ 툇마루의 다듬잇돌에 머리 대고 뺨 대고/ 그렁저렁 어느 사이 잠이 듭니다/ 먼 산에서 울려오는 뻐꾸기 소리/ 다듬잇돌에도 스미는 뻐꾸기 소리에/ 무섬무섬 안기어 잠이 듭니다.”(서정주 ‘어린 집지기’ 중에서)

그는 아홉 살에 고향을 떠나 생의 팔 할을 바람처럼 떠돌았다. 그래서 그의 호가 미당 未堂(미완성의 집)인가. 후에 제자들과 문학 기행 다녀오다 이 집에 들렀을 때 미당은 “내가 난 집일세. 버섯같이 생겼지?”라고 물었단다. 이마에 베레모 얹고 눈 지그시 감은 선생과 잘도 어울렸다는 초가다.

(왼쪽) 미당 시문학관에서 3분 정도 걸으면 미당의 생가를 만날 수 있다. 1970년경부터 방치돼 있다가 2001년 옛 모습으로 복원했다.


조선 단종 때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만든 고창읍성. 성곽 위로 산책로가 조성돼 있는데, 둘레가 1684m에 달한다.


이 집에서 나와 미당교를 건너 미당 시문학관에 들렀다. 선운초등 학교를 개조해 만든 이곳은 왠지 쓸쓸하다. 사진 몇 장, 육필 원고, 생전에 쓰던 장롱, 그 안에 고스란히 담긴 세간, 통장, 구두 따위가 남아 있다. ‘순창고추장, 딸기, 아내 과자’라고 쓴 시인의 메모지를 진열장 안에서 발견하곤 그 정다움과 알뜰함에 웃었다. 미당은 친일 시 쓰고 군부 독재자 손 들어줬다고 세상 떠난 후에도 지탄받는데, 임영조 시인이 ‘질마재 추신’에 쓴 것처럼 그저 ‘어린애처럼 천진해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아주 잠시 생각한다.

미당 시문학관의 6층 전망대에 오르면 눈앞으로 변산반도와 곰소만이 들어온다. 그리고 마을을 감싼 질마재의 바람이 몸 뒤에서 불어온다. 미당이 세상 떠나기 전 세계의 산 이름을 주문처럼 외웠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나는 질마재에 오른다. 질마재는 진마마을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옛적 이 동네 사람들은 고기를 잡고 소금을 채취해 식솔을 건사했는데, 이 질마재를 넘어 정읍과 장성 장터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질마’는 소나 말의 안장을 뜻하는 ‘길마’의 전라도 사투리다. 800m 정도 되는 야트막한 고갯길인 질마재 둘레길을 생각한다. ‘정말 자신이 원해서 가는 길인지 묻지 않고 가는 길이란 얼마나 공허한가. 나도 지금보다 푸릇한 청춘일 때는 그저 시간에 따라 상투적인 삶에 이르는 굴복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내가 걷는 인생의 길은 정말 내가 원해서 가는 길인가’. 좀 전 미당 시문학관에서 구입한 <미당 시전집>의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이라는 시가 나를 위로한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포근히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낯이 붉은 처녀 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울고/ 웃고/ 수그리고/ 새파라니 얼어서/ 운명들이 모두 다 안기어 드는 소리/ 큰놈에겐 큰 눈물 자죽, 작은놈에겐 작은 웃음 흔적,/ 큰 이야기 작은 이야기들이 오보록이 도란거리며 안기어 오는 소리/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질마재를 되짚어 내려와 미당의 고향 마을을 거쳐 10분 정도 여여히 걷자 돋은볕마을이 나온다. 미당의 ‘국화 옆에서’를 소재로 집집의 담벼락에 국화를 그린 벽화 마을이다. <패밀리가 떴다>라는 TV 프로그램에 소개돼 유명해지면서 연간 10만 명이 다녀간단다. 이 마을 뒷산에 미당과 부인 방옥숙 여사가 누워 있다. 그가 나고 자란 진마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가을이면 눈물처럼 피어나는 국화 옆에서 그가 잠들어 있다.


미당의 ‘국화 옆에서’를 소재로 담벼락에 국화를 그린 돋은볕마을.

(왼쪽) 이른 새벽 차를 타고 학원농장 주위를 돌다 보면 이렇게 신비로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오른쪽) 2천기 이상의 고인돌이 산한 고창 고인돌 유적지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고인돌 공원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고인돌 유적지가 나온다.


고인돌 사이에서 찾은 행복
‘개와 늑대의 시간’이 다가오기 전, 잠시 고창읍성에 들렀다.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때 전라도의 여러 고을 주민들이 왜구의 침입을 막으려고 축조한 성이다. 요즘 말로 이야기하면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최전방 기지라 할 수 있다.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 승천한다”는 입구의 표지판을 보고는 둘레 1684m의 성곽을 따라 걷는 ‘답성놀이’를 시작한다. 아찔아찔 비탈길을 오르면 평평한 성곽 위 산책길이 펼쳐진다. 천국에 오르는 길도 이러할까. 목 타는 세상일 잠시 내려놓고 이렇게 하늘과 가까운 길로 오랫동안 여여히 걷고 싶다.

흙빛을 닮은 황혼이 퍼질 무렵 나는 고인돌 유적지로 향한다. 누군가의 무덤인지도 모를 바윗덩어리에 앉아 아랫동네를 내려다보며 울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고인돌은 말하자면 부디 죽어 편안한 잠 들라고 덮어준 돌이불이다.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3만 기의 고인돌 중 2천 기가 넘는 고인돌이 흩어져 있는 ‘고창 고인돌 유적지’(고인돌박물관을 뒤로하고 조금 걸으면 된다)는 세계적으로도 밀집도가 가장 높다. 또 바둑판형인 남방식, 탁자형인 북방식 등 다양한 형식의 고인돌이 산재해 있다. 고창 고인돌 유적지는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10년 전만해도 이 ‘돌이불’들은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 할매들의 해바라기 장소, 인부들이 잠시 쉬며 음식 추렴을 하던 곳이다.

우리에게 죽음은 그렇게 삶과 밀접하다. 떫고 신 세상 소리를 들으며 누워 있는 고인돌 무더기 사이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 찾아온다. 하루의 양명함이 물러가면서 사물 형태가 불분명하게 뭉개지는 그 시간. 빛과 어둠, 이편과 저편, 현실과 꿈,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시간. 20여 년 만에 찾아온 고창에서 내가 만난 건 단지 이 시간이었을까. 보리밭길을, 질마재길을, 마을길을 걷는 동안 내가 인생의 길에서 찾는 게 무언지 백 점짜리 답은 얻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숙제 같은 인생을 기꺼이 걷고 있는 중임을 알았다. 그것이 비록 개와 늑대의 시간처럼 뭉개지고 불분명한 시간이라 해도. 인생이란 대체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고창 가기 전 이것만 알고 가세요!
선운사 3미 중 장어! 선운사 3미, 곧 복분자술, 풍천 장어, 작설차 중 풍천 장어는 전국의 맛 사냥꾼들이 입맛 다시는 별미 중 별미다. 바닷물과 강물이 합쳐지는 고창 ‘풍천’에서 잡은 장어가 유명한 건 바닷물의 염도가 높아 장어 맛이 특별하게 좋기 때문.
장어구이는 양념이 맛의 관건이라 할 수 있는데, 신덕식당의 장어구이는 장어를 고아 뽑아낸 육수에 고추장과 갖은 양념을 넣고 다시 고아 양념을 만든다. 초벌구이한 장어를 이 양념에 푹 담가 간이 배게 한 후 다시 네다섯 번 장을 덧발라가며 굽는다. 곰삭은 젓갈, 할머니 손맛이 나는 전라도표 김치까지 반찬도 맛나다. 아는 술꾼들이 장어구이와 복분자술의 궁합이 일품이라고 추천했지만, 먹어보니 맛이 ‘찐한’ 장어구이에는 소주가 제격이다. 풍천장어구이 1인분 2만 2천 원.
위치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29-34
문의 063-562-1533

복분자술 먹은 다음 날엔 백합탕!
선운사의 정취에 취하고, 복분자술에 취한 다음 날 생각나는 음식이 바로 백합탕. 15년 전통을 자랑하는 호수가든의 백합탕을 추천한다. 고창과 가까운 변산반도에서 잡은 백합으로 끓인 탕으로, 잡맛 없이 백합 고유의 맛이 살아 있는 데다 상에 내기 직전 넣은 생미나리 향이 일품이다. 백합탕, 백합죽 각각 1만 원. 백합회무침, 백합전골도 있다.
문의 063-563-5694

‘고창’스러운 숙소 여러 루트로 수집한 정보에 의해 엄선한 고창의 숙박지가 바로 축령산 자락에 자리 잡은 통나무집 휴림(061-393-0409, 예약 가능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숲에 깃들여 자신을 돌아보는 집’이라는 뜻처럼 광활한 편백나무 향 은은한 툇마루에 앉아 산마루를 굽어보며 마음을 들여다보는 집이다. 편백과 황토로 지은 통나무집이라 도시에서 고생한 몸을 호강시킬 수 있다.

고인돌·질마재 따라 100리 길 모두 수백 년 이상 된 옛길로, 전체 길이가 43.7km로 100리에 달한다. 이 중 3코스가 질마재길이다. 시작점과 도착점이 같은 순환형 코스로 걷는 데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고인돌박물관에서 시작하는 1코스는 오베이골 생태 연못과 운곡저수지, 동양 최대 크기의 운곡 고인돌을 지나 원평마을로 이어진다. 인천강을 따라 걷는 2코스에서는 할매바위, 병바위 등 기암괴석을 만날 수 있다. 1・2코스는 각각 2시간 10분,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보은염 소금길’이라 부르는 4코스는 선운사를 출발해 검단소금전시관을 거쳐 좌치나루터까지 가장 긴 코스는 4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네 개 코스 모두 경사가 완만해 트레킹 초보자나 아이들도 힘들지 않게 걸을 수 있다. 5월에 가장 아름다운 길은 3코스다.
글 최혜경 기자 사진 민희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