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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 떠나요] 강변 도보 여행 3선 강을 따라 봄 풍경 속으로
집 안에 가만히 있는 것이 미안해질 정도로, 햇살은 따뜻하고 달게만 느껴진다. 강은 봄의 정취를 즐기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본래의 풍경을 잃거나 어수선한 곳도 많지만, 우리나라 곳곳에는 아직 예전 모습을 간직한 강들이 흐르고 있다.꽃망울을 터뜨린 나무들 사이로, 물 오른 봄 강변을 걸어본다.


빛에 반짝이는 정선의 조양강 풍경. 강의 양편을 오가는 줄배는 일흔 넘은 사공이 젓는다.

향긋한 봄 내음과 ‘아우라진’ 정선 꽃벼루재길
한강의 발원지는 강원도 태백의 검룡소다. 이곳에서 솟아난 물이 골지천을 따라 흐르다 송강과 만나 조양강이 되는 정선의 아우라지는 한강의 원류를 즐기며 봄나들이하기에 좋은 곳이다. 봄볕이 내려앉아 유난히도 반짝이는 강물을 따라 걷다 보면, 애절한 가사에 굽이치는 가락이 어우러진 정선아리랑이 왜 이곳에서 탄생했는지 알 것 같다. 강물 위에 놓였던 섶다리가 눈 녹아 불은 강물에 쓸려가고, 늙은 사공이 끄는 줄배가 강의 양편을 분주히 오가는 풍경 속에서 아우라지의 봄은 서서히 무르익는다.

아우라지는 레일바이크(철로 위를 달릴 수 있도록 만든 자전거)로 유명세를 탔다. 그 때문인지 구절리 역에서 출발한 레일바이크가 도착하는 아우라지역은 사시사철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산나물로 유명한 정선 오일장과 연계해 찾는 이들도 많다. 역 한편에는 천연기념물 259호인 어름치를 쏙 빼닮은 카페가 서 있다. 그 앞에서 추억을 사진에 담는 사람들의 모습은 참 정겹다. 아우라지를 정선 여행의 종착지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곳은 좀 색다른 강변 도보 여행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1 산나물 향기와 감자부침개, 메밀 전병 냄새로 가득한 정선 오일장.
2 정선 꽃벼루재는 송림욕을 즐기기에 좋은 천혜의 장소다.


‘오곡이 풍성해 먹을 것이 남아돈다’는 그 이름처럼 넉넉한 인상의 여량면 소재지를 지나면, 북평면의 나전역까지 이어지는 12킬로미터 남짓한 산길이 열린다. 진달래가 일찍 피어 ‘꽃벼루재’라 불리는 이 길은 42번 국도가 놓이기 전까지 여량면과 북평면을 이어주던 주요 교통로였다. 짧고 가파른 오르막과 길고 완만한 내리막이 어우러진 산길은 고즈넉한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편하고 빠른 길을 찾아 자동차들이 떠나버린 덕분이다. 승용차 한대 지날 정도의 넓이로 시멘트 포장된 길이 나전역까지 이어져 있어 드라이브 삼아 즐겨볼 만하다. 하지만 이 길의 참맛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 제대로 느껴진다. ‘느림의 미학’을 아는 걷기 애호가, 자전거 마니아들이 이 길을 주목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산마루를 향해 지그재그로 오르며 만끽하는 아우라지의 정경. 강과 산이 어우러진 산수화 같은 풍광에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산 정상을 지나면서부터 펼쳐지는 소나무 숲은 초록의 터널을 이루며 길게 이어진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란 천혜의 송림 욕장을 걷는 동안 어깨가 절로 펴지고, 숨을 쉴 때마다 그 푸름이 폐부 깊이 빨려 들어오는 느낌이다. 특별한 이정표는 없다. 자전거 이용자를 위해 설치한 거리 표시와 바닥에 쓰인 O2라는 글자 정도가 전부다. 이 길은 강원도가 인증한 명품 산책길 ‘산소길’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강변 도보 여행에 왜 산길을 소개하는지 의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길을 걷는 내내 강은 시야에서 떠나지 않는다. 산 저 아래로 흐르는 조양강을 즐기며 걷는 이 특별한 강변길은 아기자기하기까지하다. 봄이면 파릇하게 싹을 틔우는 풀잎, 여름이면 그늘을 드리우는 소나무, 가을이면 꽃을 피운 야생화가 친구가 되어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향긋한 나물도 지천이다. 눈 쌓인 이곳의 설경도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사람 없는 길가에 앉아 수리취떡을 우물거리다 보면, 바람을 타고 저 아래에서 흐릿하게 물소리도 들려오는 듯하다. 교통편을 이용할 수 있는 나전역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3~4시간정도 걸린다. 하지만 걸을수록 지치기보다 힘이 솟는 것은 봄이면 꽃 벼루재길의 매력이 더욱 빛을 발하기 때문이 아닐까?

3 정선의 조양강을 바라보며 철로 위를 달릴 수 있는 레일바이크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사진 제공 한국관광공사
4 나주평야의 젖줄이 된 영산강.


역사와 맛이 어우러진 영산강의 ‘식도락길’
영산강을 마시고 살찌운 나주평야를 배경으로 오랜 기간 ‘작은 한양’으로 군림한 나주. 한창 진행 중인 ‘영산강 살리기 공사’로 인해 나주를 관통하는 영산강의 정취를 즐기기에는 모자람이 있지만, 그래도 봄이 무르익는 4월이라면 나주로 떠나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나주의 3대 별미(홍어, 곰탕, 장어)를 즐기며 보내는 하루는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하다. 나주 여행은 시내 구경으로 시작해 영산강을 따라 외곽으로 진행하는 것이 좋다. 나주목과 나주읍성의 흔적 위에 도시가 발달해 있어, 넓지 않은 시내에 볼거리가 많다. 둘레가 3700m에 달하는 나주읍성의 출입구 남고문과 동점문, 지방 궁실인 금성관, 현존하는 대성전 중 가장 뛰어난 건물로 인정받는 나주향교 대성전, 그리고 900여 년간 전라남도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나주의 역사와 만날 수 있는 나주목문화관 등은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시내 구경의 백미는 나주목문화관 앞에 형성된 곰탕 거리에서 맛보는 곰탕 한 그릇. 질 좋은 한우로 끓인 곰탕은 맑고 개운한 맛이 일품이다. 조선시대 나주 상류층의 생활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박경중 가옥과 최석기 가옥까지 구경했다면, 이제 봄이 한창인 영산강변으로 향할 때다.

5 홍어 하면 흑산도를 떠올리지만 지릿하게 삭은 홍어의 맛은 나주 영산포가 원조다.
6 900여 년간 전라도의 군사,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나주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나주목문화관.


4월의 영산강은 노란빛으로 물든다. 강변을 따라 조성되었던 수십만 제곱미터의 유채밭 중 일부가 영산강 살리기 공사로 인해 아쉽게 사라졌지만, 그래도 강변 둔치공원에 조성된 유채밭은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기에 충분하다. 유채가 만발하는 4월 말이면 영산강변에서 ‘영산포 홍어축제’도 열린다. 흑산도에서 잡힌 홍어가 영산강 수운을 타고 들어와 가공되던 영산포에는 지금도 홍어의 맛을 잊지 못하는 미식가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영산포 옛 선창가에 조성된 ‘홍어의 거리’는 공기부터 다르다. 삭힌 홍어 냄새에 이끌려 들어가 맛본 홍어 정식은 홍어를 즐길 수 있는 최적의 메뉴다. 보리순을 넣어 끓인 홍어애탕은 깜짝 놀랄 맛의 경지를 보여준다.

일본 식민지시대의 흔적을 간직한 영산동과 이창동의 뒷골목을 구경하는 일도 흥미롭다. 영산교를 건너 옛 영산포역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길은 두 개로 갈린다. 왕건과 오씨 부인의 인연을 맺어준 완사천을 지나 다시 나주 시내로 돌아오는 코스와 영산강이 흐르는 방향으로 조금 더 걷는 코스. 선택은 자유다. 영산강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호남 유학의 거물인 미수 허목의 미천서원과 조선시대 시인인 백호 임제의 영모정을 만나게 된다. 미천서원에서 영모정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구진포는 나주의 3대 별미인 장어를 맛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배꽃이 피는 4월의 나주는 화려하다. 나주배의 고향답게, 시 외곽 지역이 배꽃으로 하얗게 뒤덮인다. 금천면의 나주배 박물관 일대는 배꽃을 즐기기에 좋은 지역. 드넓은 과수원에서 농부들이 인공수정을하는 목가적인 풍경도 아름답다. ‘이화에 월백하고’로 시작하는 시조때문일까? 달빛 아래에서 배꽃의 달큰한 향기를 즐기던 옛사람들처럼, 풍류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봄 마실로 찾아가는 무주 ‘벼리길’
무주구천동 단풍과 무주리조트를 먼저 떠올리기 때문에 무주를 가을, 겨울 여행지로 생각하지만 사실 무주는 봄과 여름에 더 가볼 만한 여행지다. 산이 깊은데다 금강의 상류지역인 까닭에 손대지 않은 강 본연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 곁에 보물 같은 강변길이 포진해 있다. 무주를 걷는 재미가 쏠쏠한 것은 그런 이유다.

무주의 강변길이 ‘벼리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무주의 지형적인 특색 때문이다. 평야지대를 흐르는 강과 달리, 산이 많은 무주에서는 산과 산 사이를 비집고 강이 흐른다. 강을 낀 산허리로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이 쌓여 길이 되었고, 신작로가 놓이기 전까지 벼랑 아래로 난 길들이 마을과 마을,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유일한 루트였다. ‘벼리길’은 ‘벼랑길’이 변해 생긴 이름인 셈이다. 무주의 벼리길이 온전히 걷는 이들을 위한 길이라는 사실이 꽤나 인상적이다. 내 집 앞에서까지 차 조심을 해야 하는 도시인에게 ‘사람만 다닐 수 있는 길’을 걷는 쾌감은 상상 이상이다.

(왼쪽) 무주 벼리길에서 만나는 각시바위. 정으로 쪼아 바위를 뚫은 동굴길이 바위 뒤편으로 나 있다.

무주군 부남면 대소리에서 시작하는 ‘무주벼리길’은 호젓한 강변길의 종결자다. 벼랑 밑으로 1.5km 정도 이어진 길을 걷는 동안 들리는것은 새소리와 물소리뿐이다. 조금 더 귀 기울이면 나뭇가지가 연한 새잎을 틔우는 소리까지 들릴 것만 같다. 원시림처럼 우거진 나무 사이로 다듬어지지 않은 길은 걷는 게 힘들지만 재미가 있다. 햇살이 내려앉아 금빛으로 반짝이는 금강이 길동무가 되어준다. 여름이면 래프팅을 즐기는 젊은이의 함성이 울려 퍼지긴 하지만, 그 외의 시간이면 강은 오롯이 물새들의 차지다. 정지된 듯 보이는 풍경 속으로 푸드득 날아드는 새들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이 길에서 얻는 덤이다. 길 중간을 가로막은 각시바위에는 정과 망치로 쪼아 만든 4~5m 길이의 터널이 나 있다. 지나가는 이의 편의를 위해 고생을 아끼지 않은 누군가의 마음이 고맙다.

봄이 되면 무주벼리길의 끝자락, 밤송이마을에는 복사꽃이 꽃망울을 터뜨린다. 땀을 식히려 과수원 곁 강둑에 앉으면, 꽃 내음만큼이나 달콤한 바람이 피부에 와 닿는다. 무주군이 조성한 예향천리 백두대간 마실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 보면, 금산으로 넘어가는 37번 국도변에 또 하나의 벼리길이 펼쳐진다. 마을의 모습이 누에의 머리를 닮아 잠두마을이라 불리는 이곳의 봄 풍경은 흥미롭다. 해발 480m의 갈선산이 분홍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 정체는 바로 ‘잠두마을 옛길’의 벚꽃이다. 잠두2교에서 시작해 잠두1교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흙먼지 날리던 마을의 신작로였다. 새 길이 놓이면서 잊혀진 옛길이지만, 최근 길의 가치가 조명되면서 ‘무주의 걷기 좋은 길’로 입소문을 탔다. 벚나무가 도열한 비포장도로는 둘이 손잡고 걷기에 딱 좋은 넓이다. 벚꽃을 즐기며 나무 밑으로 싹튼 초록빛 풀과 봄나물을 구경하는 봄에 이 길의 매력은 절정에 달한다.

4월, 무주의 벼리길은 동요 ‘고향의 봄’을 떠오르게 한다. 콘크리트 빌딩 숲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아이들이 꽃피는 산골의 서정적인 풍경을 기억할 수 있도록, 올봄 마실은 때 묻지 않은 무주의 금강 강변길로 떠나보는 것이 어떨지.

한혜경(<강으로 그린 풍경: 강변 도보 여행 13선> 저자) 사진 한혜경, 노중훈, 한국관광공사 

담당 최혜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