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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놀이 여행]봄에 떠나는 야생화 기행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3월, 수많은 야생화가 우리 산과 들과 내를 따라 햇살 업고 피어납니다. 그 고운 자태에 홀려 반평생을 산 야생화 전문가 김태정 선생이 3월의 야생화 기행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도 꾹꾹 눌러씁니다. 생각 없이 화적 떼처럼 꽃구경하러 몰려다니기 전, 우리의 허튼 발놀림에 그 고운 아이들이 상처받고 소멸할 수 있음을 생각하라고.

한반도의 중추 역할을 하는 큰 산줄기 백두대간에는 겨울이면 많은 눈이 쌓이기 때문에 수많은 생명체가 겹겹이 쌓인 눈을 이불처럼 덮고 겨울잠을 충분히 잡니다. 그러다 봄이 되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꽃을 피우고 씨를 맺는데, 바로 아름다운 우리 땅의 야생화들입니다. 이 식물들처럼 산기슭에서 눈을 듬뿍 덮고 긴 겨울잠을 자지는 못하지만, 이 땅의 사람들도 봄이 되면 꽃을 찾아 떼 지어 산과 들의 따스한 산기슭을 헤맵니다.

겨우내 제주도 바닷가 숲을 붉게 물들이던 동백꽃 물결은 이미 북상해 얼마 안 있으면 끝물이 다가올 것입니다. 겨울 동안 빌딩 숲 속에 갇혀 있던 내 마음도 이제 온통 남녘의 꽃밭에만 가 있습니다. 40년이 되도록 늘 겪는 일이지만 올해도 똑같네요.

우리 땅에는 3~5월이면 많은 야생화가 지천에 피어납니다. 특히 3월 하순께는 산수유꽃, 진달래, 살구꽃, 개나리, 백목련 등 우리의 전형적인 봄꽃들이 골짜기마다 형형색색으로 피어나지요. 그래서 ‘울긋 불긋 꽃 대궐’이란 동요도 생긴 듯합니다. 이맘때쯤 나는 야생화 중 산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복수초를 만나기 위해 항상 강원도 화천군 광덕산을 찾습니다. 복수초는 2월에 한반도 남쪽 제주도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식물이지만, 한반도 최북단에 위치한 백두산 기슭에서는 6월, 눈 속에서 핍니다. 제주도에서 2월에 기지개를 켠 화신 花神은 구름처럼 북으로 이동해 6월에 백두산에서 끝맺음하는 것이지요. 남부 지방은 3월 중순께, 중부 지방은 4월 중순께에 복수초꽃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느 산, 어느 쪽, 몇 시쯤에서 이 고운 아이들과 마주할 수 있는지를 알기에 당일치기로 그 꽃들을 만나러 가지요. 서울에서 버스로 2시간, 산을 오르는 데 1시간 정도 예상하고 집에서 나서는 시간까지 합하면 4시간 후엔 도착합니다. 복수초꽃은 햇빛이 있을 때 활짝 피었다가 오후 3시가 넘으면 꽃이 다시 오므라들어 꽃봉오리처럼 되는 꽃입니다. 꽃봉오리를 감싸는 꽃싸개잎(포엽)의 색깔이 땅바닥에 뒹구는 가랑잎과 비슷하기 때문에 발밑에 짓밟고서도 모르는 꽃입니다. 일찍 피어나는 작고 귀여운 꽃들은 대개 따스한 양지 쪽에 피지 않습니다. 산봉우리의 북쪽 산기슭 그늘 또는 냇가처럼 봄 늦게까지 눈과 얼음이 쌓여 있는 곳에 핍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양지 쪽 따스한 언덕만 찾아다닙니다. 산봉우리의 북쪽 산기슭은 오전 11시가 되어도 완전한 햇볕은 들지 않지만, 나뭇가지들 사이로 햇빛이 조금씩 비치고 기온이 올라가면서 가랑잎 사이 여기저기에서 노란 꽃, 분홍 꽃, 하얀 꽃, 자주색 꽃들이 톡톡 튀어나옵니다.

1000m가 넘는 산 입구에 오를 때였습니다. 야생화를 찾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줄지어 내려오다 나와 마주쳤습니다. 그들은 인사를 건네더니 “오늘은 꽃 한 송이도 피지 않았어요. 작년 이맘때쯤 낮에 왔을때는 꽃이 많았는데 이번 겨울에 모두 얼어 죽은 모양이에요. 헛수고하지 마시고 우리가 대절해온 버스로 같이 나가시죠” 합니다. 복수초를 보기 위해 어젯밤 도착해 산 밑에서 자고 아침 6시에 산에 오른이 무리는 괜히 헛걸음만 했다고 하더군요. 오전 11시 이전에 이곳 북쪽 기슭에서는 원래 꽃이 피지 않습니다. 나는 다른 일로 왔다고 하고 그들과 헤어져 11시쯤 산기슭의 약 7부 능선에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르면 그곳 야생화들은 발길에 짓밟혀 쑥대밭이 되기 때문에 욕심쟁이 같지만 나 혼자 올랐지요. 산기슭에 도착하니 가랑잎 사이로 수많은 복수초꽃이 노란 꽃을 피워 흡사 노란색 옷감을 펼쳐놓은 듯했습니다. 다른 골짜기의 꽃들도 잘 있는지 이쪽저쪽 헤매다 보니 벌써 오후 3시가 넘어갔습니다.

3월에 많이 볼 수 있는 야생화는 지역에 따라 약간씩 다를 수 있지만 대개는 복수초, 노루귀(자주색 꽃, 흰 꽃, 분홍 꽃), 너도바람꽃, 앉은 부채, 만주바람꽃, 얼레지, 미치광이풀, 변산바람꽃 등입니다. 이 꽃들은 대개 키가 10cm 안팎입니다. 주변의 작은 나무에도 히어리꽃, 생강나무꽃, 개암나무꽃, 갯버들꽃 등이 피는데 봄 햇볕을 받아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꽃 동네 식구들이 계속 늘어나지요.

근래 들어 변산바람꽃은 어디를 가야 찾을 수 있느냐는 전화가 자주 걸려옵니다. 변산바람꽃은 광주 무등산, 거제도 남쪽 해안가의 높은 산골짜기, 동해안의 설악산 신흥사 계곡, 제주도 한라산, 지리산 깊은 골짜기 등 여러 곳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산의 북쪽 기슭 그늘진 숲 속 가랑잎 밑에서 고개만 내밀고 꽃이 핍니다. 또 일부 서해안의 섬에서 꽃이 피지만, 떼 지어 많이 가면 그 동네 사람들에게 원망을 듣습니다. “당신들이 야생화 사진을 찍는다고 모두 짓밟아서 죽어버렸다”고 원망을 하지요.

변산반도의 산골짜기 냇가 등에도 많이 피는데 꽃 보러 간 사람들이 마을의 밭을 마구 헤집고 다녀서 시골 할머님들이 카메라를 메고 온 사람만 보면 우리 밭 봄 채소 다 망쳐놓았다고 얼씬도 못 하게 막아섭니다. 한 할머니 말씀이 “버스가 3대씩이나 와서 사람들을 풀어놓더니 우리 밭을 모두 망쳐놓았다”며 내 손을 이끌기에 가보니 시금치, 쪽파, 대파, 갓을 심어놓은 밭입니다. 그 귀한 채소밭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나는 죄인처럼 카메라를 접고 떠나오며 아름답고 귀여운 꽃을 보자고 남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는데 싶어 참으로 말이 안 나오더군요.
남녘의 들이나 낮은 지대 산자락 근처에서는 남의 밭을 밟지 않고도 얼마든지 어여쁜 야생화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대개는 걷지 않고 차를 타고 휙 지나가니까 그 작은 꽃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한낮에는 길가 양지바른 언덕에 큰 개불알꽃, 중의무릇, 산자고, 머위꽃, 할미꽃, 솜방망이, 솜나물, 양지꽃 등 귀여운 야생화가 무리로 피어 있으니 험한 산을 오르지 않아도 많은 꽃을 보고 사진에 담을 수 있습니다.

몇 해 전 광주 무등산 자락의 골짜기에 가랑잎 사이로 피어나는 변산 바람꽃을 보러 갔습니다. 질퍽한 땅바닥에 엎드려 바람이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휴일이라 왁자지껄 산을 오르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합니다. “어, 저 아저씨 개구리 잡나?” “벌레들 사진 찍는 모양이야.” 작은 꽃송이가 내 카메라 렌즈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건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이 무렵 산기슭 개울에는 아직도 살얼음이 어는 쌀쌀한 날씨지만, 이 작은 생명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후세를 만들기 위해 한 송이 꽃을 피웁니다.

3월 말부터 남쪽의 들녘에서는 제법 푸른빛이 납니다. 하지만 중부 지방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일부 지방은 남녘과 기온차가 많이 나지요. 이 무렵 산기슭 높은 곳에는 얼레지, 처녀치마, 모데미풀, 노랑제비꽃, 홀아비바람꽃 등 많은 야생화가 피는데 산에 오르기 싫어하는 이들은 “동강 어디에 가면 동강할미꽃을 볼 수 있느냐”고 또 내게 전화합니다.

3월 말부터 영월 동강의 바위 언덕이나 양지바른 언덕에는 할미꽃과 동강할미꽃이 핍니다. 할미꽃은 꽃이 고개를 숙인 채 검붉은 꽃을 피우지요. 반면 동강할미꽃은 짙은 벽자색 꽃이 고개를 숙이지 않고 하늘을 보고 활짝 피어납니다. 동강할미꽃은 동강 주변 석회암 지대 바위틈이나 근처 언덕 그리고 강을 따라 정선군 지역에도 많이 핍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이 동강할미꽃을 찾기때문에 이곳 주민들이 씨를 받아서 근처 밭에 재배도 하지요. 수많은 사람이 봄이면 몰려와서 동강할미꽃을 훼손해 들고 가기 때문에 보호도 할 겸, 수익도 얻을 겸 재배합니다.

근래에 저는 야생화를 만나러 멀리 북녘의 백두산에 오르기도 했는데, 백두산에도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예전 같은 아름다움을 찾아볼순 없습니다. 제가 가장 안타까워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글과 사진 김태정(한국야생화연구소 소장)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