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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연보다 더 기까운 공동체 가족]장애인 생활 공동체 캠프힐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이 바로 가족입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마음의 실타래로 묶인 가족이 있다. 이른바 ‘장애인’이라 불리는 이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삶의 매 순간을 나누는 캠프힐. 교육 공동체와 생활 공동체를 꿈꾸는 스코틀랜드의 뉴튼 디 캠프힐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한 김은영 씨가 이 특별한 가족 이야기를 들려준다.


뉴튼 디 캠프힐 정원에서 앤과 안나.

“Wake up! Wake up, Eunyoung!!” 데비가 방 안까지 들어와 나를 흔들어 깨웁니다. 늦잠을 잔 모양입니다. 시계를 보니 벌써 8시가 다 되어갑니다. 서둘러 눈곱을 떼고 주방으로 달려가니 어느새 도널드가 포리지 porridge(곡물에 물이나 우유를 넣고 푹 끓인 죽)를 끓여놓았고, 또 누군가는 내 커피잔을 채운 채 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럴 때면 도대체 누가 장애인이고 누가 보살피는 사람인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굳이 구분하려 드는 내가 오히려 잘못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함께 식사 기도를 하고, 그렇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저는 독일에서 발도르프 특수 교육을 공부하고 돌아오는 길에 캠프힐 Camphill 공동체에서 6개월 동안 코워커 coworker로 일했습니다. 장애인은 성인기 삶에 대한 준비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찾아간 곳이 스코틀랜드 애버딘의 성인 공동체 뉴튼 디 캠프힐입니다. 이 일은 그곳에 머문 지 한 달이 지났을 때의 일입니다.
캠프힐 공동체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가족을 이루며 사는 곳입니다. 전체 스물세 가구가 있는데 가족을 구성하는 형태는 제각각 다릅니다. 어떤 집은 비장애인 가족과 장애인이 더 큰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는 경우도 있고, 어떤 가구는 싱글 남녀가 가정의 엄마, 아빠의 역할을 하며 가족 구성원을 이루기도 합니다. 그동안 알던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니라 정신적 가치로 맺은 가족 공동체지요.
영국의 캠프힐 공동체는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의 인지학 人智學이라는 철학에 영향을 받은 유대인 의사 칼 쾨니히 Karl Koenig가 스코틀랜드 애버딘 지역(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정책을 피해 망명지로 택한)에서 시작한 가정 공동체입니다. 망명자로서 삶도 어려웠을 텐데 장애인들과 함께 사는 가족 공동체를 이상으로 삼고 그것을 실천한 것이지요. 1940년에 시작된 이 공동체는 현재 전 세계 1백여 곳의 가족 공동체로 발전했고, 가까운 인도에도 한 곳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없지만 머지않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장애인들은 매일 아침 정확한 시간에 각자의 일터로 향하는데,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해보이지만, 그들은 그 속에서 리듬을 갖고 평화와 안정을 누리며 산다.

혈육보다 살가운 가족 공동체 캠프힐 가족 공동체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의 가치와 이상을 위해 만났다는 데 그 특별함이 있습니다. 장애인과 더불어 살기를 원하는 이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가족의 구성은 하우스를 운영하는 부모인 하우스 페어런츠 house parents가 있고, 하우스 페어런츠를 도와 함께 일하는 코워커들, 그리고 장애인(빌리저 villager라 부르는)이 함께 삽니다. 이들은 함께 살면서 가족 구성원의 역할을 해나갑니다. 아침 식탁은 누가 준비하고, 점심은 누가 요리할 것이며,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 것인지 매일 반복적인 일상이 평화롭게 유지됩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각자 취미 활동을 합니다. 이 모든 게 캠프힐 공동체 내에서 가능합니다. 스물세 가구가 모여서 마을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마을 회의를 통해 해결하기도 하고, 캠프힐 공동체를 오가는 사람들과 친교도 나누며 행복한 일상을 꾸려갑니다.
제가 머문 캠프힐의 ‘크로프트 하우스 croft house’에는 하우스 페어런츠인 독일 태생의 아스트리와 러시아 태생의 블라디미르 부부가 성인 장애인 3명과 함께 가정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저는 캠프힐 공동체를 배우기 위해 그곳에서 코워커로 함께 산 것이지요.


119캠프힐 내 이스테이트 루돌프 슈타이너 학교의 코워커와 아이들.

이들 부부는 캠프힐에서 거주하며 딸 둘을 낳아 독립시켰고, 작은딸은 결혼해 같은 캠프힐에 거주하며 한 가정을 맡아 일하고 있습니다. 아스트리에게는 장애인과 비장인에 대한 구별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마을 전체 회의에서 돌아오는 길에 장애인들의 소극적인 발언에 대해 “장애인 스스로 자신의 인권을 위해 더 많은 발언을 해야 한다”며 흥분한 사람입니다. 함께 사는 장애인을 돌보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동반자로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크로프트 하우스 가족 중에서 로지(65세) 아줌마와 도널드(65세) 영감님은 동갑내기입니다. 로지 아줌마는 정서적 문제를 갖고 있어 흥분하면 딸 같은 데비(45세)에게 폭력을 휘두르기도 합니다. 가끔 제게험담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금방 후회하고 사과합니다. 로지 아줌마의 이런 성격 때문에 젊은 시절부터 여러 캠프힐을 전
전하며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매력 있는 여성이라는 것을 캠프힐의 뭇 남성들에게 각인시켜줍니다. 캠프힐 내에서 스무 살 연하의 장애인 남성과 열애 중이랍니다.
도널드 영감님은 일생 동안 자폐를 갖고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90세의 나이로 아직 잉글랜드에 살고 계셔서 생일이면 멋진 셔츠와 좋아하는 <007> 비디오 시리즈를 선물로 보내주시곤 합니다. 도널드는 영국 신사라서 두 여자가 싸우는 일에 결코 나서지 않습니다. 자신이 조금만 실수를 하면 미안하다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순수한 심성을 지닌 분입니다. 매일 아침은 도널드가 요리합니다. 포리지를 끓여 준비하는데, 요리하는 감각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아침 식사를 할 때마다 물어봅니다. “Who’s cooking today?”
저와 특별히 가깝게 지낸 데비는 청각 장애와 지적으로 어려움이 있어 이곳에 왔습니다. 데비는 보청기를 끼지 않으면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다보니 가끔 꿈꾸는 듯 자기 세계에 빠져 있습니다. 데비의 역할은 퇴근길에 목장에 들러 가족이 마실 우유를 가져오는 일입니다. 자신이 맡은 일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수행하며 살아갑니다.

무소유를 실천하는 장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들이지만, 살면서 급작스러운 사태에 부닥치면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이들입니다. 그런 이유로 누군가 상주하며 이들과 함께 생활해야만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잠들 때까지 이들이 일하는 곳, 생활하는 가정에는 늘 비장애인이 함께 상주하며 이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급작스러운 상황을 해결해주는 것이 함께 사는 가족의 역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족의 경제 활동은 공동 생산과 최소한의 소비로 이루어집니다. 이곳에서 일한다고 해서 월급이 지급되지는 않습니다.
캠프힐의 창시자 칼 쾨니히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캠프힐에서 생활하는 우리가 우리의 노동력에 대한 대가를 덜 요구하면 할수록 공동체의 삶은 풍요로워집니다.” 이렇듯 캠프힐은 무소유를 실천하는 장
場입니다. 자본주의 시대의 각박한 세상에서 무소유를 실천하는 게 어울리지 않는 일같습니다만, 그것을 아직도 실천하는 곳이 캠프힐입니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옷과 읽고 싶은 책이지요. 매달 최소한의 용돈(코워커에게는 한 달에 30만 원 정도의 용돈)이 지급됩니다. 용돈을 받는 날이면 모두 싱글벙글입니다. 저는 그 30만 원을 모아 비행기 값을 마련하느라 쓸 돈이 없었습니다. 월급을 받은 다음날 점심 식탁에서 영화 관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영화를 보려면 1파운드가 있어야 했지요. 제가 농담 삼아 “난 돈이 없어 영화를 못 보게 생겼어”라고 하자 데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은영, 걱정하지 마. 내가 영화 관람비를 내줄 테니 함께 가자”라고 말하더군요. 아무리 돈이 없기로서니 1파운드가 없었겠어요? 그러나 데비의 따뜻한 배려심을 느끼고 마음이 훈훈했던 기억이 납니다. 돈이 없으니 무엇을 살 생각에서 자유로워지고, 돈이 생기면 무엇을 할 것인가 작은 기대감으로 생활하던 캠프힐 공동체의 소박한 생활이 그립습니다.

(오른쪽) 캠프힐에선 장애인도 공동 소유의 농장과 작업장에서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맡아 한다.

따로 또 같이 사는 가족 주말이면 온 가족이 시내로 나갑니다. 서커스 공연이 있는 날이면 서커스 관람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러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한 컵씩 사들고 돌아옵니다. 일상에서의여가 생활 중 문화활동은 이들에게 큰 의의가 있습니다. 인간이 일만 하며살 수 없음을 문화 생활을 통해 확인하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것입니다.특별한 외출 일정이 없는 주말에는 방문하고 싶은 친구를 찾아가거나 종교 생활을 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이처럼 이곳에선 ‘따로 또 같이’가 잘 실현됩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면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함께 모든 것을 억지로 해야 하는 불편한 관계가 될 수 있는데 말이지요. 이 울타리는 가족이라는 범주에 있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은 철저히 개인의 삶이 보장된 가족 공동체지요. 그렇기 때문에 캠프힐의 가옥 구조는 1인 1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호화스럽진 않지만, 침대와 책상 그리고 옷장이 121놓여 있는 그곳은 자신만의 취미 생활과 비밀 그리고 편안함을 보장해주는 물리적 공간입니다. 이러한 환경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60년 이상의 캠프힐 공동체 전통이 고스란히 녹아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혈연 중심의 가족에서 좀 더 확장된 가족 개념을 실천한 하우스 페어런츠들의 이상과 그 이상을 실천하기 위한 눈물겨운 책임이 만들어낸 것이지요.


매일 퇴근길에 목장에서 우유를 가져오는 데비.

문제가 없으면 가족이 아니다! 한번은 하우스 페어런츠가 여름휴가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코워커로서 하우스 페어런츠를 대신할 때였지요. 하필 깐깐한 로지 아줌마의 방에 전구가 나갔습니다. 전구를 교체하는 것쯤이야 저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 전구를 갈아주었습니다. 그래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없었습니다. 다음 날에는 더운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짜증을 부렸습니다. 아무리 돌려도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싶어 수도꼭지를 잠그고 기술자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격이 급한 로지 아줌마는 제가 아래층으로 내려온 후에 또 수도꼭지를 틀어보고 잠그지 않았던 겁니다. 아침에 일터로 가서 일하고 점심때가 되어 집에 돌아오니 물이 흘러넘쳐 집 안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잠깐 단수가 되었다 복구되면서 생긴 일이었습니다. 낮에 우리 집에서 요리를 해주던 코워커도 그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욕실이 넘쳐 젖은 물건을 밖에 내다 말리며 뒷수습을 하느라 엄청 고생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로지 아줌마만 탓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 일이 있은 후 로지 아줌마는 제게 수줍게 고맙다는 말을 하더군요.
이렇듯 가족이 살면서 문제는 늘 있게 마련입니다. 가족은 구성원 상호 간의 잘잘못을 따져 비난하거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일어난 일을 함께 힘을 합쳐 해결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장애인과 함께 사는 하우스 페어런츠나 코워커는 이렇듯 한 가정이 잘 유지될 수 있도록 중심에 서 있는 사람으로, 장애인이 잠자리에 드는 저녁 9시 이후에 개인적인 자유 시간을 갖습니다. 일주일간 요일을 정해 교대로 저녁 9시까지의 생활을 책임지는 겁니다. 코워커는 단기간 그곳에서 함께 살지만 하우스 페어런츠는 일생을 함께 사는 사람으로 그 책임의 무게가 코워커와는 비교되지 않습니다. 하우스 페어런츠가 휴가에서 돌아온 날 저녁, 그들이 제게 수고했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제가 먼저 그들에게 가족의 행복을 위해 그동안 얼마나 수고해왔는지 고맙다는 말을 연신 하고는 ‘자유!’를 외치며 동네 퍼브로 달려간 기억이 납니다.
가족은 늘 어떤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든 정신적인 유대로 연결된 가족이든 크고 작은 문제와 갈등이 늘 생활 속에 함께하게 마련입니다. 캠프힐 공동체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독특한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서 이브닝(Bible Evening)’입니다. 매주 토요일 저녁 6시가 되면 캠프힐의 모든 가족 구성원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구성원의 종교나 이념과 상관없이 성서를 읽고 각자 일주일간의 생활을 돌아보며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때 좀 특별한 저녁 먹을거리도 준비합니다. 촛불을 켜고 둘러앉아 조용한 가운데 라이어 연주도 들려주고 일주일간 생긴 문제도 이야기하며 그곳에서 새로운 한 주를 준비합니다. 이러한 ‘성서 이브닝’은 전 세계 캠프힐 가정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매우 뜻깊은 시간입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뿐 아니라 세계의 정세나 기타 관심사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속한 작은 공간에서, 더욱 확장된 자신이 속한 현시대의 사람들 이야기를 나누며 세상을 이해하는 폭을 넓혀갑니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치부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해하는지 못하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가족 구성원들은 그냥 서로 인정해주고 들어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겨울이면 벽난로에 불을 지펴 공기를 덥히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자신이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여는 공간을 만듭니다.
비록 피로 맺은 부모와 형제는 아니지만 피를 나눈 피붙이보다 더 끈끈한 가족 관계를 맺고, 함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부족함도 더함도 없는 공기와 물 같은 일상입니다. 저는 머지않은 장래에 이 땅에서 혈육보다 더 살가운 가족 공동체 캠프힐을 시작하려 합니다.

캠프힐에서 온 한 장의 편지
김은영 씨가 스코틀랜드의 뉴튼 디 캠프힐에서 보낸 6개월간의 이야기는 <캠프힐에서 온 편지>라는 책에 담겨 있습니다. 무언가 시작하기에도, 포기하기에도 ‘어정쩡한’ 나이 마흔 살에 떠난 유학 생활의 끄트머리에서 그는 캠프힐의 아름다운 공동체 생활을 체험했습니다. 그곳에서의 충만한 일상을 편지 형식으로 담은 책이 바로 <캠프힐에서 온 편지>입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교육 공동체이자 생활 공동체인 이곳을 ‘지구 상에 존재하는 파라다이스’라고 극찬하는 그는 현재 한국에서의 캠프힐 공동체 건립을 위해 양평에 발도르프 교육을 실천하는 ‘슈타이너 학교( www.steiner.or.kr)’를 설립하고 그 첫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캠프힐에 대해 궁금하다면 www.camphill.org 또는 cafe.daum.net/camphill을 참고하세요.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