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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리포트]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의 슬로 시티 비엘라의 자연생활
1백여 년 전의 생활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산골 마을 문화와 세련된 도시 문화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도시 비엘라. 대를 이어 가장 건강한 방법으로 소를 키워 버터와 치즈를 만드는가 하면, 이탈리아 최고의 정육점을 겸한 델리 숍도 바로 비엘라에 있다.


여름이면 소들을 몰고 산 위 오두막에 올라 버터를 만들며 지내는 올가 씨.

이탈리아 서북쪽에 자리한 도시 비엘라 Biella, 여행 가이드북에도 나와 있지 않은 곳. 하지만 이곳은 에르메네질도 제냐 Ermenegildo Zegna와 로로 피아나 Loro Piana 같은 유럽을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의 본사가 있는 섬유 도시다. 밀라노에서 차로 불과 1시간 거리인 이곳에는 1백 년 전의 모습 그대로 생활하는 ‘마르가리 margari’라고 불리는 이들이 살고 있다. 마르가리들이 사는 산에서 내려와 30분 남짓한 거리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이탈리아에서 올해 뽑은 최고의 정육점을 겸한 델리 숍도 바로 이곳에 있다. 비엘라가 정말 매력적인 이유는 이처럼 이탈리아 전통의 산골 마을 문화와 놀랄 정도로 세련된 도시 문화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면적의 70%가 산인 이곳에서는 대대로 소를 키우며 살았다. 한데 18세기 들어 섬유산업이 발달하면서, 마을의 모직물 공장에서 일하며 사는 사람과 옛 방식대로 산에서 소를 키우고 우유와 치즈를 만들며 사는 사람으로 생활 방식이 자연스럽게 나뉘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도시인들과 마르가리들이 어울려 살고 있는 것. 마르가리들은 전기, 차, 트랙터, TV, 냉장고 등을 사용할 뿐 그 외의 것은 거의 1백여 년 전 방식 그대로 생활하고 있다. 여름이 되면 표고 1600~2000m까지 소들을 데리고 올라가 오두막에 살면서 산속의 맑은 물과 신선한 풀을 충분히 먹여 키운다. 그곳에 우유를 짜서 버터와 치즈를 만들어 최소한의 돈을 벌고, 정부의 농업 보조금으로 생활한다. 먹을거리는 자급자족하며 욕심내지 않고, 자신들의 생활에 자부심을 가지고 산다. 또한 땅을 소유하고 유지하려는 의식은 강하지만 좋은 차나 학력, 해외여행, 옷 등 요즘 사람들 대부분이 흥미를 갖는 부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의 생활에 반감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타인의 시선은 개의치 않으며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 자기 주변의 것에 만족하며 그들만의 리듬으로 생활하면서도 도시인들과 어울리며 잘 살고 있다.


1 진한 우유 향과 풀 향기를 내는 핸드메이드 버터.
2 버터를 만들기 위해 우유의 지방분을 통에 쏟아붓는 과정.


3 손꼽히는 버터 장인인 리사 할머니.
4 소들은 산 위에 올라 목초를 뜯으며 여유롭게 여름을 난다.


버터 만들기의 명인, 리사 할머니 여든 살인 리사 Lisa 할머니는 비엘라의 소르데볼로 Sordevolo 마을에 사는 손꼽히는 버터 명인이다. 그렇다고 많은 양의 버터를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이틀분의 우유를 모아 400g가량의 버터 5~6개를 만들어 이웃에 파는 정도다. 가격도 몇 년 전 그대로인 5유로. 유기농이라고 비싸게 받거나, 물가가 올랐다고 해서 더 올려 받지도 않고, 자신이 일한 대가만큼의 돈만 받는다. 한데 요즘은 리사 할머니가 고령인 데다 다리까지 다쳐 여름이면 딸이 대신 소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오두막에서 지내고 할머니는 마을에 있는 농가에서 지낸다. 이웃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좋은 할머니는 명쾌하고 따뜻한 인상이다.
리사 할머니가 살고 있는 마을의 집은 이층집인데, 집 옆에 우사가 있고 버터나 치즈 작업장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마르가리의 집이다. 마당과 밭 그리고 주변이 매우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소박하지만 구석구석 주인의 손길이 닿아 정감이 느껴진다. 부엌의 세간은 모두 오래된 골동품이지만 모두 반질반질하니 빛나 마치 1백 년 전쯤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낯선 동양인을 반갑게 맞으며 할머니가 직접 빚은 리큐어를 따라주신다. 그라파 grappa(와인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발효・증류해 만든 술)에 로즈메리, 세이지 등의 허브를 넣어 만든 혼성주인데 그냥 마시기도 하지만 주로 에스프레소에 넣어 드신단다. 이 리큐어가 감기에 걸렸거나 소화가 안 될 때는 물론, 늘 즐겨 마시는 건강 유지 비법이라고.
좀처럼 다른 사람에게 버터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는다는데, 딸이 오늘 버터를 만든다며 산 위 오두막집에 올라가보라 하신다. 차로 갈 수 있는 곳까지 간 뒤, 20분쯤 걸어 올라가자 작은 돌집에서 40대의 딸 올가 Olga가 소들을 돌보고 있다. 집 옆 돌 개수대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파이프를 타고 졸졸 흘러내리고, 부엌 페치카의 장작불 위에 건 냄비에서는 물이 끓고 있다. 수수한 돌집은 어느 곳을 둘러봐도 그림이다. 창가의 병에 무심하게 꽂은 마거리트가 그렇고, 오래되었지만 깨끗이 닦아 반짝이는 냄비, 빗자루, 양동이, 돌 틈에 핀 들꽃까지 모두 들떠 있지 않고 평온한 모습이다.


5 1백 년 전의 모습을 간직한 산속 돌집. 왼쪽 여름이면 소들을 몰고 산 위 오두막에 올라 버터를 만들며 지내는 올가 씨.

진한 에스프레소 한잔을 대접받고, 올가가 버터 만드는 모습을 가만 지켜보는데 마치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했다. 그의 버터 만들기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버터를 만드는 나무통을 뜨거운 물로 한번 헹군 다음 부엌 안쪽의 시원한 창고 안에 이틀 동안 모은 우유의 지방분을 넓적한 나무 주걱으로 떠서 통에 쏟아붓는다. 테이블 위에 놓인 통 아래에는 양동이를 받치고, 15분가량 통을 돌리니 버터 덩어리와 우유가 분리된다. 버터 덩어리가 우유와 분리되면 밸브를 열어 양동이에 우유를 받아낸다. 버터를 분리하고 남은 우유로는 치즈를 만든다고 한다. 버터 덩어리를 통에서 꺼내 저울로 400g씩 여섯 개의 덩이로 나누고 재빨리 하나씩 손으로 치대 모양을 빚는다. 그런 뒤 하트 모양의 나무틀로 버터에 문양을 찍어 물속에 담근 후 하나씩 꺼내서 종이에 싼다. 금방 만든 버터를 조금 떼어 입안에 넣자 놀랍게도 풋풋한 풀 향기가 입안 가득 퍼진다. 기름지거나 느끼한 게 아니라 스르르 입안에서 녹아버린다. 우유의 진한 향도 나면서 단맛도 나는 것이 도무지 버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올가는 이 버터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 중 하나로 질 좋은 안초비를 반으로 갈라 ½작은술 정도의 버터와 함께 먹어보라고 권했다.
버터를 만들고 나더니 세제는 한 방울도 쓰지 않고 그저 팔팔 끓인 물로 통을 헹군 후 나무판과 큰 주걱도 뜨거운 물과 계곡물로 깨끗이 헹굴 뿐이다. 30여 분 남짓 올가가 덤덤한 표정으로 버터 만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잔잔한 감동이 밀려온다. 어느덧 내 마음이 평온해졌다.


1 , 5 정육점이자 델리 숍인 모스카의 쇼케이스에는 온갖 요리와 반조리 제품이 갖춰져 있다.


2 모스카의 고객은 산속 마르가리들과는 전혀 다른 세련된 모습이다.

이탈리아 최고의 델리 숍 ‘모스카’ 리사 할머니 집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비엘라 시내 중심가에는 올해 이탈리아에서 전통적인 맛을 지닌 가게 중 가장 맛있는 가게로 뽑힌 ‘모스카 MOSCA’라는 정육점 겸 델리 숍이 있다. 1916년 정육점으로 시작해 4대째 운영하고 있는데, 현재는 5명의 가족과 35명의 직원이 다양한 요리와 반조리 제품을 만들어 팔고 있다. 언제나 활기가 넘치는 가게에는 얼룩 하나 없는 흰색 가운을 입은 종업원들이 손님들과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치즈도 조금씩 잘라 맛을 보여주기도 하고, 적은 양이라도 깔끔하게 포장해준다. 매장 안쪽의 주방에서는 요리사들이 파스타나 살라미를 이용한 다양한 요리를 선보이고, 쇼케이스 안에는 전채 요리부터 고기, 파스타, 폴렌타, 치즈, 와인, 디저트까지 모두 갖추고 있다.
조그만 도시에 이렇게 큰 델리 숍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모스카를 찾는 사람들도 마르가리들과는 전혀 다른 세련된 모습이다. 비엘라인들에게 모스카는 미식의 성지나 다름없을 정도로 절대적 신뢰를 얻고 있다. 육류도 다른 정육점에 비해 20%가량 비싸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스럽게 인정한다. 또한 개인 가게로는 유일하게 도축 면허를 가지고 있어 소를 도살하는 시기까지 조절해 고기 맛을 유지하는 데 세심하게 신경 쓴다. 와인도 와이너리와 직접 계약하여 ‘모스카’ 레이블을 붙여 파는데, 사람들은 모스카가 선택한 와인이라면 틀림없다고 믿는다.


3 1916년 정육점으로 문을 연 모스카는 이탈리아에서 전통적인 맛을 지닌 가장 맛있는 가게로 뽑혔다.
4 숙련된 장인이 수제 소시지를 만드는 모습.


4대 경영자인 30대의 알베르토의 업무는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고, 좋은 와인이나 맛있는 치즈를 만드는 농가를 찾아내고, 소를 키우는 농가에 일주일에 한번씩 찾아가 사료부터 철저하게 관리하는 일이다. 그런 노력 덕에 작년에는 몬칼보 Moncalvo에서 열리는 거세우 품평회에서 그랑프리를 획득했다. 소의 무게가 무려 1200kg 이상인데, 모스카는 송아지를 구입해 노부부에게 사육을 위탁했고 노부부는 4년 동안 이 소 한 마리만 온 정성을 다해 키웠다고 한다. 그랑프리를 받은 소는 일반 고기보다 2배나 비싸게 팔리지만 일찌감치 예약이 끝나버린다. 이처럼 유난스러우리만치 비엘라에는 미식가가 많은데, 이들은 단순히 탐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재료의 생산 과정을 무척 중요시한다. 모스카는 그런 점에서 꾸준히 신뢰를 쌓아온 결과 오랜 시간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1 거세우 품평회에서 그랑프리를 획득한 모스카 소와 이 소를 4년간 위탁 사육한 노부부.


2 , 5 매일 아침 50호가량의 마르가리의 집을 돌며 우유를 모아 만드는 토마 치즈. 4대째 치즈를 만드는 신뢰받는 치즈 공방이다.
3 칸티나 바르니의 와인 저장고.


포도를 말려 만드는 디저트 와인 ‘파시토’ 비엘라에는 개성이 강하고 특색 있는 먹을거리를 만드는 사람이 많다. 그중 디저트 와인인 ‘파시토 passito’를 만드는 바르니 Barni 씨를 빼놓을 수 없다. 와인 판매상이던 그는 포도밭이 딸린 칸티나 Cantina(이탈리아어로 와이너리)를 사들인 후 ‘자신이 마시고 싶었던’ 네비올로 품종의 와인과 파시토를 만들었다. 네비올로는 피에몬테를 대표하는 포도 품종이지만, 피에몬테의 북쪽 끝에 있는 비엘라는 땅의 산도가 높아 남쪽에 비해 불리한 점이 많다. 하지만 와이너리를 구입할 때 심어져 있던 크로아티나종을 전부 베어내고 네비올로종을 심어 자신이 원하는 와인을 고집스럽게 만들어냈다. 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포도밭만 제초제나 농약을 쓰지 않고 매일 예초기로 풀을 베어내며 관리한다.
파시토 역시 마찬가지다. 파시토는 포도송이째 건조해 당도를 높인 디저트 와인인데, 포도 수확 후 자신의 거주지이기도 한 칸티나의 제일 위층에서 건조한다. 방에 올라가 4만 송이의 포도가 빨래집게로 줄에 매달려 있는 광경을 보니 가히 장관이다. 곰팡이가 생기거나 송이가 터지지 않도록 일일이 줄에 걸어 통기성을 좋게 하는 것이다. 수확 철이면 인근 아주머니를 수십 명씩 불러 작업하는데, 줄에 걸고 나서도 매일 들이는 정성이 대단하다. 9월부터 이듬해 1월 중순까지 실내에서 말리는 동안에도 낮에는 창문을 열고, 기온이 떨어지는 밤에는 창문을 닫아 온도를 조절한다. 이렇게 해서 매년 2월 초에 3천 병의 파시토를 생산한다. 갖은 품과 시간을 들여 처음으로 선보인 ‘칸타갈 Cantagal 2001’은 엑스포 데이 사포리 Expo dei Sapori에서 이탈리아 톱 100 와인에 뽑혔다.


4 디저트 와인 파시토를 만들기 위해 포도 4만 송이를 빨래집게로 매달아 말리는 모습.



마르가리의 우유만으로 만든 치즈 ‘토마’ 비엘라에서 모스카만큼 지역 주민들에게 인정받고 신뢰받는 치즈 공방이 있다. 1894년 창업한 이래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이곳은 2008년 토리노에서 열린 슬로푸드 대회에 참가해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은 치즈 공방이다. 엔리코 씨는 지금도 어머니와 아내, 남동생과 함께 최소한의 인원으로 피에몬테를 대표하는 ‘토마 toma’ 치즈를 만들고 있다. 이곳의 특징은 매일 아침 50호 정도의 마르가리 집을 돌아다니며 50톤가량의 우유를 모아 치즈를 만드는 것. 산속에 있는 마르가리의 집을 일일이 다니며 우유를 모으는 일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결코 쉽지 않지만 엔리코 씨는 4대째 변함없이 마르가리의 우유만 고집한다. 마르가리의 소들은 먹이도, 자라는 환경도, 키우는 방법도 모두 유기농이어서 이 소의 우유만 사용한다고. 맛있는 치즈를 만들기 위해서는 원료인 우유가 맛있고 신선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기본 원칙이기 때문이다.
비엘라의 작은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의 욕심 없는 생활은 그 어떤 유적지보다 큰 감동을 주었다. 가끔 세상살이에 자꾸 욕심이 생길 때마다 버터 만드는 할머니를 생각하며 마음 한 자락을 접는다. 이런 것이 내가 여행을 하는 진짜 이유다. 문의 비엘라 관광청(www.atl.biella.it)

구선숙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