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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리포트]부르고뉴 와인 기행 인생은 와인과 함께 발효된다
와인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관심은 애정을 뛰어넘어 삶 그 자체다. 특히 피노 누아르로 빚은 레드 와인의 주요 산지인 부르고뉴에서 와인 한 병은 수많은 삶의 장면으로 발효된다. 그들에게 와인은 흥겨운 축제이고, 노블레스 오블리주이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오래된 신뢰를 의미한다.

1 생명 농법으로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생산하는 ‘도멘 다비 뒤방’의 와인 메이커, 다비 뒤방 씨.

프랑스에서도 부르고뉴 사람들은 술을 좋아하는 편이다. 자신들의 땅에서 난 산물을 자랑으로 삼으니 물론 와인을 사랑한다는 얘기다. 저녁 식사가 시작되면 코스가 바뀔 때마다 다른 와인이 나온다. 음식과 와인을 즐기면서 수다를 떨다 보면 너덧 시간은 금세 지나간다. 메인 디시로는 이 지방의 자랑인 샤롤레 Charolais 쇠고기 스테이크가 올라오고, 그날의 하이라이트인 레드 와인이 올라온다. 좋은 음식과 와인, 오가는 대화에 곁들여 연주되는 음악을 들으면서 그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기도 한다. 부르고뉴 남쪽의 작은 마을 샤사뉴 몽라셰 Chassagne Montrachet에서 열린 연회는 그렇게 흥겨워진다. 마을 이름을 그대로 붙인 유서 깊은 샤토 샤사뉴 몽라셰에서는 김정일 위원장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내놓았던 와인 미셸 피카르 Michel Picard를 만든다. 오크 통으로 둘러싸인 지하 셀러에 테이블을 옮겨놓고 벌인 연회 자리가 깊어갈수록 사람들의 흥도 살아난다. 오랜만에 모인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은 눈치들이다.
와인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정책이 바뀌어가고 있다. 특히 사르코지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와인에 대한 규제가 점차 강화되고 있다. 평생 와인을 만들면서 살아온 부르고뉴 사람들은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와인 라벨에는 임산부에게 술을 자제하라는 표시까지 들어가지만, 부르고뉴에서는 아직 먼 얘기이다. 와인은 그들의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아이를 가진 며느리도 적당히 와인을 즐기는 게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 게다가 프렌치 패러독스라는 말처럼 와인은 건강식품이 아니던가.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물을 타서 마시면서 와인 맛을 배워간다.
부르고뉴 전역을 따라서 포도밭이 늘어서 있다. 볕이 잘 드는 모든 언덕은 숲 아니면 포도밭이다. 그들에게 포도 재배 는 단순한 농사가 아니다. 와인은 부르고뉴 사람들의 생명이자 역사다. 그들의 삶 자체이며, 젖줄인 것이다. 수백 년 전 그들의 조상도 같은 밭에서 같은 포도를 재배해왔다. ‘피노 누아르 Pinot Noir’라는 품종은 깐깐하고 보수적인 부르고뉴 사람들의 오랜 벗이다. 1492년 부르고뉴 공작의 명에 따라 부르고뉴 전역에서 피노 누아르 외 다른 품종은 모두 뿌리째 뽑혀 나갔다. 그때부터 5백 년 이상 레드 와인은 피노 누아르만으로 만들어오고 있다. 전 세계 어느 누구도 모방하기 어려운 부르고뉴의 순수성은 이렇게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2 구제원 내부에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모형이 설치되어 있다.


3 환자와 빈민을 돌봤던 병원, 구제원. 부르고뉴 부유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일 년에 한 번 부르고뉴에서는 자선 경매가 열린다. 부르고뉴 와인 생산의 중심지는 본 Beaune이다. 성곽의 자취를 따라 아직도 해자가 파여 있고, 옛 다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시내 중앙에는 오래된 구제원(Hospice) 건물이 있다. 반 다이크의 그림도 방문객을 반기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보면 구제원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알 수 있다. 1443년 부르고뉴 공국의 재상이었던 니콜라 롤랭 Nicolas Rolin은 사재를 출연해 이 건물을 지었다. 알록달록한 기와는 부르고뉴의 고전적인 건축 양식이며, 높이 솟은 탑은 신에게 가까워지려는 의지이다. 여기에는 환자와 빈민을 돌봤던 병원이 있었다. 부유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이 구제원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정신을 기리고자 와인 경매를 연다. 구제원에서 소유한 밭에서 수확한 포도는 즙이 되어 오크 통에 담긴다. 경매 며칠 전부터 와인 생산자들은 그 즙을 맛보면서 구매하고 싶은 와인을 고른다. 경매 당일이 되면 부르고뉴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았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몰린다. 경매사가 와인 이름을 연호하면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번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세계 각지에서 전화로도 가격을 부른다. 그렇게 낙찰된 와인은 그때부터 구매한 사람의 이름을 붙인 채 숙성에 들어간다. 부르고뉴에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지 않더라도 라벨에 자기 이름을 넣어 와인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경매 수익은 전부 자선사업에 기부한다. 오스피스 드 본 Hospice de Beaune이라는 라벨이 붙은 와인은 이처럼 자선의 의미를 담고 있다.


4 김정일 위원장이 식사 자리에서 내놓았던 와인으로 유명한 미셸 피카르. 부르고뉴 남쪽 작은 마을의 샤토 샤사뉴 몽라셰에서 만든다.
5 부르고뉴 와인의 성자로 포도나무와 와인을 보호하는 성인인 생 뱅상 Saint Vincent의 조각상. 부르고뉴 마을 입구마다 이런 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


전통적인 와인을 만든다는 것은 그들의 정신세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오랫동안 각 집안에서 소유한 포도밭에서 와인을 만든다. 시간이 흐르고 아버지가 은퇴할 나이가 되면 다른 지방에서 일하던 자녀가 돌아와 대를 잇는다. 그래서 부르고뉴 와인 생산자 중에는 패션 디자이너, 은행가, 엔지니어 출신이 많다. 포도는 그들의 가족이자 자식과도 같기 때문에 때가 되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고향으로 돌아와 포도를 재배하며 와인을 생산한다.
한동안 부르고뉴에도 화학 비료가 침투했었다. 한시적으로 수확량은 늘었으나 어머니인 대지가 아프기 시작했다. 이끼가 끼고 말라붙으면서 땅은 고통을 호소했다. 대지를 사랑하던 많은 이들이 생명 농법(biodynamic agriculture)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밭에서 사라졌던 말들이 돌아와 쟁기를 끌기 시작했으며, 염소들은 잡초를 뜯어먹는다. 헛간에 들여놨던 재래식 농기구를 다시 닦고 손질해 인간의 손으로 농사를 짓는다. 아직 30대 후반인 다비 뒤방은 자기 이름을 걸고 와인을 만든다. 그도 생명 농법의 신봉자다. 도멘 다비 뒤방 Domaine David Duband 와인은 그런 생각과 행동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주목받고 있다. 생명 농법으로 기른다고 하여 갑자기 맛이 변하거나 품질이 급속도로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신뢰가 존재한다. 인간이 자연을 보살필 때 드는 산물로써 화답하는 것이다. 작은 포도원 클로 살로몽 Clos Salomon도 마찬가지다. 생명 농법을 시행하면서 이전과 다른 점은 비용이 조금 더 들어가는 것뿐이라고 한다. 그것도 잡초를 제거할 때 들어가는 인건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그렇게 인간과 자연이 만나면서 둘 사이에는 먼 과거와 똑같은 신뢰가 회복되고 있다. 한 병의 부르고뉴 와인을 통해 인간의 사랑을 받는 대지의 따사로움을 느끼게 된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