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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의 고향을 찾아서 한산] 나장연 씨가 백 일 정성 들여 빚는 술, 한산 소곡주 성정 性情이 맑아야 술맛이 단 법이다
맑으면 달고 탁하면 떫다. 조급하면 탁해지고 과한 욕심에는 사나운 맛으로 답하고야 만다. 절제를 알고 대하면 명약이 되지만 탐심이 지나치면 탈이 난다. 빚는 것도, 마시는 것도 사람이련만 사람 맘대로 되지 않기에 술은 어렵다.

(왼쪽)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은 어머니 오희열 씨와 그 뒤를 잇는 아들 나장연 씨. 
(오른쪽) 술맛에 반해 주막에 주저앉아버린 탓에 과거 시험을 놓친 선비, 도둑질하러 들어갔다 훔쳐 먹은 술에 취해 붙잡힌 도둑 등 ‘안 일어나려다 못 일어난’ 사람들의 전설을 간직한 술, 소곡주. 들국화, 메주콩, 생강, 홍고추 등이 1백 일의 숙성 기간 동안 오묘한 조화를 이뤄 소곡주만의 입에 붙는 술맛을 만들어낸다.


모두 근본만 알면 쉬운 게 세상 이치라고들 한다. 근본만 지키면 수월하게 살아낼 수 있는 게 삶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사는 건 결코 만만치 않다. 삶 자체가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삶을 살아내기 때문이다. 술 또한 그렇다. 좋은 물과 좋은 쌀 그리고 좋은 누룩, 이 세 가지만 갖추면 향기로운 술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정한 이치다. 그러나 그 좋고 나쁨을 판단하며 빚는 과정이 사람 손에 달렸기에 수만 번을 거듭해도 매양 같은 술맛을 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한산 소곡주는 맑게 떠내는 술이다. 밑술에 누룩과 찹쌀을 더해 덧술을 빚는 이양주로, 잘 익은 술은 옅은 호박색을 띠는데 달착지근하면서도 깊은 맛이 특징이다.

1백 일 정성으로 빚는 한산 소곡주

모든 곡주가 그러하듯 한산 소곡주도 밑술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한다. 멥쌀을 정성껏 씻는 과정인 백세가 첫 번째 단계. 씻은 쌀을 물에 담가 불리는 동안 술 담글 독을 물에 삶아 물기를 닦거나 짚불을 피워 소독한다. 불린 쌀은 소금기 없이 빻아 가루를 내고 쪄서 떡을 만든다. 떡에 누룩을 넣고 치대는 것을 ‘밑술 치대기’라고 하는데 정성을 들여 치대야 술맛이 편안하다. 밑술 치댄 것을 독에 넣어 발효시키면 밑술 빚는 과정이 끝난다. 온도를 지켜가며 80% 정도 발효시키면 덧술 빚기에 들어간다. 밑술은 멥쌀로 하지만 덧술은 좋은 찹쌀을 쓴다. 꼬들꼬들한 고두밥을 찐 다음 다시 누룩을 넣고 치대는데, 이때 한산 소곡주만의 맛을 내는 재료들을 더한다. 생강과 말린 국화 잎, 메주콩을 넣은 다음 마지막에 마른 고추를 꽂으면 덧술 빚기가 끝난다. 술이 시지 말라는 의미에서 콩을, 부정 타지 말라는 바람을 담아 고추를 넣는 것이다. 덧술 빚기가 끝나면 곧바로 발효에 들어가는데, 온도를 일정하게 맞춰야 하기 때문에 과정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술이 끓을 때 온도가 너무 높으면 시고 너무 낮으면 술이 끓지 않아 망치기 쉽다. 한산 소곡주 나장연 대표의 할머니 때부터 써왔다는 독은 그 크기가 어른 키에 닿을 정도로 크다. 실내 온도를 10℃ 정도로 맞추고 본격적으로 술을 숙성시키는데, 만 하루가 지나면 술이 끓기 시작한다.

술이 끓는 소리를 어디에 비할까? 갯벌 구멍으로 게들이 들락날락하며 뽀글뽀글 피워내는 갯물방울 소리를 듣는 듯도 하고 상큼한 샴페인의 기포 같기도 한데 첫 술이 끓어오르는 소리는 어쨌거나 반가운 신호다. 술은 2주일 정도만 지나면 발효가 끝난다. 대부분의 청주가 열흘 정도만 익혀서 걸러 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한산 소곡주는 1백 일이 지나야만 맛을 볼 수가 있다. 일주일을 뺀 나머지는 맛이 드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만 하루가 지나 발효가 시작되기 전의 독을 열고 저어보면 어찌나 뻑뻑한지 장정들이 젓기에도 힘에 부치지만, 만 하루가 지나면 젓기가 제법 수월해진다. 한산 소곡주의 묘미는 기실 그 뻑뻑함에 있다. 다른 곳의 술은 익어감에 따라 맑은 술이 위로 떠오르고 술지게미인 주박이 밑으로 가라앉는 데 반해, 한산 소곡주는 익어도 술이 밑이요 주박이 위다. 다른 술에 비해 물의 양을 훨씬 적게 잡아 담그기 때문이다. 물의 양이 적으니 당도가 높고 배틀한 맛을 내는 것이다. 술이 어느 정도 익었다 싶을 때 마지막 단계인 용수 박기에 들어간다. 길쭉한 거름망처럼 생긴 용수를 술독에 박아두면 그 안에 맑은 술이 고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고인 술을 떠내면 청주요, 밑에 가라앉은 것을 걸러서 마시면 막걸리다. 예전에는 술이 귀하니 용수에 고이는 술을 떠서 먹고 술지게미를 가운데로 몰아넣은 후 물을 타서 다시 떠냈다는데 두 번째 술은 아무래도 싱겁게 마련이다.

(왼쪽) 좋은 재료에 대한 애착이 유독 강한 나장연 대표는 누룩을 직접 만들기 위해 넓디넓은 평원을 가꿔 유기농법으로 직접 밀농사를 짓는다. 찹쌀과 콩, 생강 등도 최고 품질만을 고집한다. 맛에 대한 욕심때문이다.
(오른쪽) 알코올 도수 18%의 한산 소곡주를 소줏고리를 통해 증류시키면 43%의 깨끗하고 맑은 소주인 불소곡주가 만들어진다. 한산 지방 특유의 철분이 포함된 물맛이 술맛의 또 다른 비결이다.



소곡주 담그는 순서
1 술맛을 좌우하는 첫 번째 조건은 누룩이다. 직접 농사지은 밀로 누룩을 만들어 꼭꼭 밟아 숙성시키고 잘 말려 1년 내내 사용한다.
2 덧술 담그기. 멥쌀과 누룩으로 1차 숙성시킨 밑술에 찹쌀로 만든 고두밥, 누룩, 콩, 국화 잎 등을 넣어 치대고 1백 일을 숙성시켜 덧술을 빚는다.
3 독 안에 덧술 재료들을 꼭꼭 눌러 담은 후 마지막에 마른 고추를 꽂아 완성한다. 장을 담글 때와 마찬가지로 부정 타는 것을 막기 위한 액막이 역할을 한다.
4 소곡주를 증류시켜 소주를 내린다. 처음에는 소식이 없지만 일정 온도 이상 올라가면 작은 구멍으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곧이어 맑디맑은 소주가 한 방울씩 떨어진다. 알코올 도수 43%의 독하지만 향기로운 술이다. 5 잘 익어 용수에 고이기 시작한 한산 소곡주. 달콤하고도 구수하고 은근한 여운을 남기는 명주로 표주박으로 떠서 먹는 맛이 기가 막히다.


기막힌 밀주 솜씨 덕에 무형문화재가 된 할머니
한산 소곡주는 백제시대부터 내려오는 명주다. 백제 마지막 태자가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산으로 들어가 술을 빚어 통곡하며 마셨다 해서 소곡주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의 술이다. 이름이야 어찌 되었든 통곡은커녕 단맛에 콧노래 불러가며 먹을 만큼 맛은 기막히다. 달고 향기로운 맛도 그렇지만 은은한 호박색을 띠고 있어 더욱 그렇다.
쌀이 귀해 수시로 금주령이 내렸으니 마시고 싶어도 맘껏 만들어보지 못한 것이 우리 조상들이다. 한산 소곡주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나장연 대표의 할머니 역시 밀주를 담그다 근동에 그 밀주 맛이 소문나 무형문화재 지정까지 되었다니 아이러니다. 다른 집은 달거나 시거나 그 맛이 일정치 못했건만, 할머니는 언제나 달고 향기로운 맛을 내는 재주로 가을 벼 타작하면 몰래 방아를 찧어 술을 담그곤 했다고. 약주를 즐기지 않았던 할아버지와 달리 하필 할머니가 퍽이나 술을 좋아하셨기 때문이란다. 여든둘에 돌아가신 할머니는 평생 반주를 즐기셨다는데 술을 입에 대지 않았던 할아버지는 예순도 못 채우고 돌아가셨다. 알맞게 즐기는 술이 명약이 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신 할머니 덕분에 우리는 지금 향기로운 술을 마실 수 있게 된 셈이다.

할머니에 이어 어머니 오희열 씨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게 13년 전. 그 중간에 맛에도 변화가 있었다. 집안의 장남인 나장연 대표가 대학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다. 술을 무척 좋아하던 그는 대부분의 주당들이 그러하듯 술맛이 너무 달아 불만인지라 일부러 술맛을 쓰게 해보았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는 술을 담글 때 물의 양을 좀 넉넉하게 쓴다고 한다. 재료의 220%까지 잡는데 그렇게 하면 완전 발효가 된 후 술 양이 많게 마련이다. 뭔가 부족한 맛은 감미료로 해결한다. 그 역시 처음에는 물의 양을 많이 잡아 담갔는데, 단맛을 줄이고 쓴맛을 키우는 데는 좋았지만 결정적으로 감칠맛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결국 할머니가 담그던 방식으로 다시 돌아갔고 그 이후로는 전통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술을 지고는 못 가도 먹고는 간다”고 할 만큼 술을 좋아하는 그와 어머니 오희열 씨는 거의 매일 한산 소곡주를 맛본단다. 여러 가지 안주도 곁들일 터. 경험상 회나 짙은 맛의 안주는 어울리지 않지만 미나리를 넣은 부침개, 전 같은 명절 음식이 알맞은 것 같다고. 마침 용수에 술이 고인 독을 하나 열었다. 술은 역시 용수 박아서 표주박으로 떠먹을 때의 첫맛이 최고인 까닭이다. 달고 향기롭다. 그 맛을 못 잊는 사람들은 백화점이나 대리점에서 구할 수 있는데도 굳이 전화로 주문을 한단다. 생주를 맛보기 위해서다. 살균을 거친 병맥주보다 생맥주가 맛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생주는 반드시 냉장고에 보관해야 맛의 변질이 없다. 한 잔 두 잔 끝을 모르다 종내는 주저앉고 만다 해서 앉은뱅이 술이라고도 불린다는 한산 소곡주. 그 술 한잔 곁들이는 올 추석 차례상은 한결 풍성하고 향기로울 것이다. 문의 041-951-0290

이명아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