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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의 고향을 찾아서-양평] 김영환ㆍ박애경 부부의 귀농일기 가을향기 농장의 정월장 담그는 풍경
부뚜막, 가마솥, 황토 방, 항아리…. 아담한 농장 주인의 정겹고 푸근한 시골 살림과 구수한 시골 밥상 구경.
장맛은 정월 장이 으뜸이요, 그중에도 말(馬)날에 담근 장이라고 했다. 조상들이 대대로 그렇게 알고 지켜온 풍습이라기에 무슨 심오한 뜻이 담겨 있으려니 내심 기대했었다. 그런데 웬걸,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장맛이 달게 되라고 ‘닭날’, 맛있으라고 ‘말날’을 택했을 뿐이란다. 음력설부터 시작해 첫 번째 열이튿날까지의 첫 상십이지일 上十二支日 중에서 그렇게 날을 뽑아 장을 담갔다는 것이다. 첫 말날을 놓치면 다음 말날을 잡아 담그고…. 말이 좋아하는 콩이 장의 원료이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말의 핏빛처럼 장 빛깔이 진하기를 바라는 기원을 담은 것이라고도 한다. 그럼에도 굳이 정월 장을 고집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전국 최초로 유기장 인증받은 전통의 맛
하늘 파란 날 하루를 잡아 양평에 들렀다. 거기서 달고 구수한 장맛이 그만인 장을 만들어낸다는‘가을향기 농장’ 주인을 졸라 정월 장 담그는 구경을 할 요량이었다. 날이 풀린 줄 알았더니 하늘빛은 짱짱해도 코끝에 닿는 바람은 여전히 맵다.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1리. 서울에서 40분 거리에 있는데도 첩첩 산으로 둘러싸인 것이 산골의 모양새를 제법 갖췄다. 아담한 황토 집 별채가 눈에 띄기에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바닥에 깔린 짚 위에 가지런히 늘어놓거나 새끼줄로 엮어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메주의 양이 만만치 않다. 메주 띄우는 방인 모양이다. 사방 벽과 바닥이 온통 붉은 황토색이다. 어쩐지 맛을 보지 않아도 이 집 장맛은 진득하니 구수할 것만 같다. 농장 주인인 김영환 씨와 부인 박애경 씨는 도시 생활을 접고 양평으로 들어간 귀농인. 남편은 자동차 회사, 아내는 은행에서 일하는 맞벌이 부부로 살다가 하루아침에 시골 사람이 되었다.

“1997년의 일이네요. 인천에 살 때였는데 하루는 강원도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가 길이 막혀 중간에 잠깐 쉬어 간다고 양평에 들렀지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그대로 발이 묶여 눌러앉았어요.”
아주 인연이 없지는 않았다. 박애경 씨의 이종사촌 오빠인 신부님 한 분이 양평에서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고 있었던 것. 여행길에 들렀다가 바쁜 일손을 도우면서 김영환 씨는 어릴 적 꿈을 떠올렸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나? 장래 희망을 평소 생각했던 대로 써 냈다가 선생님께 아주 혼이 났어요. ‘아담한 농장 주인’이라고 썼거든요. 사내자식이 좀 더 웅대하고 그럴듯한 목표를 안 대고 장난이나 친다며 친구와 불려 나가 한 대씩 맞았죠. 그 당시 친구 아버지가 고물상을 하고 계셨는데 친구가 장난 삼아 ‘아담한 고물상 주인’이라고 쓴 거예요. 나는 진심이었는데….”
몇 번의 부부싸움 끝에 결국 아내도 남편 따라 양평 사람이 되어 생면부지의 노인들 수발 들며 살게 되었다는데 얄궂게도 밤마다 눈물바람은 박애경 씨의 친정어머니 몫이 되었단다. 그때까지 딸네와 함께 살다가 떨어진 것만도 기막힌데 팔자에도 없는 시골살이 택한 딸이 밤낮으로 ‘콩밭 매며’ 사는 게 속상했기 때문이다. 7년을 밤마다 울다가 안 운 게 이제 3년이란다. 친정어머니 역시 거처를 양평으로 옮겨 온 것이다. 공동체 생활 2년 끝에 독립한 부부는 본격적인 농부가 되었다. 어르신들이 농번기에 손이 딸려 쩔쩔맬 때마다 못자리도 봐드리고 모판도 나르며 농사를 배웠다. 얼떨결에 개를 잡았던 기억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추억.

(오른쪽) 전통 방식의 유기장 가을향기농장의 유기장은 유기농법으로 수확한 콩, 볏짚 등을 사용해 만드는 것이 특징. 예전에는 대두로만 메주를 만들었지만 요즘은 몸에 좋다는 쥐눈이콩 메주도 만든다. 거무스름한 색을 내는 게 쥐눈이콩 메주다. 된장은 해를 묵힐수록 색이 짙어진다. 하지만 오랜 기간 묵힌 간장인 청장은 오히려 맛과 색이 순해지며 향기로워 최고의 조미료 역할을 한다.

(왼쪽) 일일이 손으로 발라 완성한 황토 벽. 메주 틀의 크기도 여러 번 바뀌었다. 시골 할머니들이 만드는 것에 비해 훨씬 작은데 이 부부만의 황금비율을 찾아 끊임없이 연구한 결과이다. 
(오른쪽) 3년째 들어서는 묵은 된장.독 몇 개는 헐지 않고 오래도록 보관해 농장을 찾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생각이다.


“시골 살림을 하면 꼭 개를 키우게 돼요. 새끼를 낳은 집에서 키워보라며 강아지를 주는 게 시골 인심인데 첫해에 무려 다섯 마리를 받아서 키우기 시작했지요. 새벽에 나갔다 해가 떨어져야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의 연속이다 보니 개밥 주는 게 만만치 않더군요. 일에 지쳐 곯아떨어지면 개밥을 줬는지 안 줬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때도 많았고…. 어쨌거나 한 2년 키워 팔았는데 75만 원이나 벌었어요. 아하, 농사보다 낫구나 싶데요. 그래서 또 몇 마리 얻어다 키웠는데 이번에는 개 값이 뚝 떨어져 그야말로 ‘개 값’이 되더라고요. 마침 복날도 다가왔겠다, 동네 어르신들께 개 한 마리 내겠다고 했지요. 시골서는 복날 젊은 사람들이 고기 추렴을 해서 어르신들에게 드리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런데 개만 가져다 드리면 되는 줄 알았더니 직접 잡아야 한다더라고요. 그렇게 한 번 잡아봤어요. 다음 해에는 직접 끓이기까지 했는데 인기가 영 없어 2주일 내내 혼자 먹어치우느라 혼이 났지요.”
4년째 되던 해에 겪었던 호박 농사에 얽힌 추억도 잊을 수 없다. 애호박 풍년이 들어 값이 형편없이 떨어지더니 급기야는 8kg들이 한 박스에 5백 원을 받고 가락시장에 넘길 수밖에 없게 된 것. 차라리 안 팔고 만다며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길가에 내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공짜로 나눠주었다. 그때 호박 횡재를 한 사람 중에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해주는 시민단체인 생활협동조합(생협) 회원이 있었고 그의 소개로 생협에 납품하게 되면서 새롭게 판로를 얻게 되었다.

숨을 쉬는 옹기는 생각보다 까탈스러운 용기이다. 고무 호스로 시원하게 물을 뿌려 닦으면 좋으련만 물기가 스며 들어가 벌레가 슬고 장이 뒤집어지기 때문에 일일이 행주로 닦아가며 간수해야 한다. 볕이 좋은 날엔 수시로 뚜껑을 열어 볕을 쬐게 하고 바람을 맞힌다.
전라도 독, 경상도 독, 경기도 독 등 각 지방의 독을 사용해 장을 보관해두었는데 이제는 어떤 독이 맞는지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단다. 예전 같으면 당연히 경기도 독을 써야겠지만 평균 기온이 자꾸 올라 이제는 전라도 독으로 바꾸는 것이 맞지 않겠나 싶다고. 지구 온난화는 이제 된장과 간장독의 형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된 것이다. 마을 대부분이 친환경 농법을 사용하는 덕분에 오염 걱정은 덜었다.


“한 박스에 5백 원밖에 못 받는 호박을 1만 원에 납품받겠다고 하더군요. 어찌나 고맙던지.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을 다는 거예요. 한 상자에 5만 원이 될 정도로 가격이 오르더라도 약속한 가격 그대로 1만 원에 달라는…. 당장 수매가 급한데 앞뒤 생각할 겨를이 있어야지요. 설마 그렇게까지 가격이 올라가겠나 싶기도 했고. 그런데 그해 추석에 한창 호박 농사가 어렵더니 한 박스에 6만 8천 원까지 올라가더군요. 조삼모사 朝三暮四라고 아까운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려울 때 도움받은 게 어디냐 싶어 군말 없이 따랐지요.”
풋고추, 꽈리고추도 심고 하우스 지어 상추도 심어 팔면서 살림이 피는데 그제야 시골 살림 할 맛이 나더라고. 직접 수확한 콩으로 메주를 띄우고 간장이며 된장 담아볼 궁리를 한 것도 그때부터란다.
“지인들에게 나눠도 주고 주문이 오면 조금씩 팔아도 봤는데 이게 목돈이 되는 거라. 때마침 태풍에 하우스가 몽땅 날아갔는데 곰곰 생각해보니 정부 지원받아 하우스 지어봤자 바람 한번 불면 끝이라는 생각이 드니 정이 떨어지는 거예요. 그때부터 하우스 걷어내고 콩 농사 지어 장 담그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지인 소유의 산에서 나무를 베어 얻어 오고 황토도 구해다 놓고 부부가 달려들어 1년간 황토 방도 만들었다. 옛날 방식 그대로 메주를 만들어 띄우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가공식품으로는 전국 최초로 유기장 인증도 받았다. 원재료의 90% 이상을 유기농 인증 재료를 사용해야만 하는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한 것이다.

(왼쪽) 황토 방에서 충분히 숙성시킨 메주는 새끼줄에 매달아 말린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미생물의 작용으로 하얗고 누런 곰팡이가 피면 제대로 뜬 것이다.
(오른쪽) 튀긴 두부 위에 된장소스를 올린 두부탕수와 바특하게 지져낸 강된장. 짜지 않고 담백해 밥 비벼 먹기 딱 좋다.


조미료가 필요 없는 진국 토장
장 담그는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부부가 함께 한다. 고추장 담그는 데 꼭 필요한 엿기름 역시 유기 인증 재료를 써야만 하는데 마땅히 구할 데가 없어 직접 보리 농사까지 지을 정도.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거나 식품을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순수하다 못해 답답하다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는데 이 부부가 차린 밥상을 마주 대하고 보니 역시나 그러했다. 직접 담근 된장으로 맛을 낸 음식을 몇 가지 준비해주십사 부탁 드렸던 것인데 융통성 없게도 모든 음식을 된장으로만 맛을 냈다. 된장국과 강된장, 배추된장무침, 된장샐러드는 그렇다 쳐도 된장을 발라 구운 생선에 된장을 넣은 닭볶음탕까지 모두 된장 일색이다. 음식을 그렇게 많이 준비해놓을 거였으면 간장이며 고추장 맛도 보게 해주시지 그랬냐고 하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된장 요리 준비하라기에 된장만 했지요. 진작에 고추장 얘기도 하시지”란다.
배추속대를 넣어 말갛게 끓인 된장국을 한입 떠 넣으니 약간은 떫기도 한 것이 말 그대로 ‘토장국’ 맛이 난다. 반갑다. 직접 담근 매실청과 야콘 식초로 새콤달콤한 맛을 낸 된장샐러드는 의외로 싱그럽고 된장을 엷게 풀어 만든 닭볶음탕은 누린내와 기름진 맛이 쏙 빠져 담백함만 남았다. 따끈한 매실차 한잔으로 식사를 마무리한 후 마당으로 나섰다. 부뚜막에 걸어놓은 가마솥에서 풍기는 콩 삶는 냄새가 구수한 걸 보니 뜸이 제대로 드는 모양이다. 가을향기농장에서는 콩을 불리지 않고 삶는단다. 불리는 동안 맛 성분과 영양 성분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여섯 시간쯤 삶으면 가마솥이 눈물을 흘리는데 이때부터 불을 줄여 뜸을 들인다. 가마솥 뚜껑 사이로 거무스름한 물이 조금씩 흘러나오는 걸 ‘눈물 흘린다’고 표현하는 것.

삶은 콩은 절구에 찧거나 분쇄기에 빻아 한 김 날린 뒤 흰색 천을 깐 메주 틀에 넣고 뚜껑을 덮어 버선발로 밟아 단단하게 빚는다. 빚은 메주를 꺼내 볏짚을 깐 황토 방에서 말리는데 적당히 마르면 짚을 덮어 숙성시킨 후 새끼줄에 매달아 다시 말린다. 2~3주간의 숙성 기간을 포함해 한 달 정도 말리는 동안 갖가지 미생물과 황국균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곰팡이가 메주에 피게 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짚을 잘 골라 써야 한다는 것. ‘발효가 시작되면 부뚜막에 던져만 놓아도 뜬다’는 말이 있지만 농약 범벅이 된 짚에서는 불가능한 일. 유기농 벼농사를 지은 논의 볏짚만 사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가로 18cm, 세로 16cm, 높이 9cm.' 가을향기농장 메주의 황금비율인 셈인데 처음 메주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보다는 많이 작아졌다. 시골 할머니들은 훨씬 큰 틀을 사용한다는데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숙성이 가장 잘되는 크기를 찾아냈다. 황토 방은 바닥에 40cm 정도 자갈을 깔고 그 위에 짚을 얹었다.

(왼쪽) 간장을 넣지 않고 된장만 엷게 풀어 간을 맞춘 된장닭볶음탕. 기름기가 쏙 빠졌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담백하고 맛이 부드럽다.
(오른쪽) 황토 부뚜막에 가마솥 걸어 놓고 장작불 때가며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든다. 무럭무럭 김을 올리며 뭉근하게 익어가는 콩 냄새는 지친 삶을 위무하는 최상의 향기. 장작이 타오르며 내뿜는 붉은빛과 따뜻한 부뚜막의 온기 또한 그러하다.


정월에 담근 장은 춘삼월에 가른다

속까지 단단하게 마른 메주가 완성되면 비로소 장 담그기에 들어간다. 이때부터는 한데 일인데 아직 추위가 덜 가신 상태에서 담그다 보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먼저 메주에 핀 곰팡이를 물로 씻어내고 물기를 닦아 다시 말린다. 다음엔 소금물을 만들 차례. 간수를 빼둔 소금을 물에 타 소금물을 만들어둔다. 전남 신안에서 만든 천일염을 사용하는데 장맛을 생각하면 아무 소금이나 쓸 수 없기에 꼭 질 좋은 국산 천일염을 까다롭게 골라 쓴다. 소금이 모두 녹으면 달걀을 하나 띄워본다. 5백 원짜리 동전만큼만 물 위로 올라오면 염도계로 잴 것도 없이 염도가 딱 맞는다고. 장을 담글 항아리의 내부는 짚에 불을 붙여 태워 소독해둔다. 여기에 소금물을 붓고 메주를 넣는데 한 말 들어가는 항아리에 메주 네 덩이면 적당하다. 대추와 마른 고추 등을 띄운 다음 마무리 소독을 한다. 참숯을 빨갛게 피웠다가 집어넣으면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잡균을 잡는다. 항아리 입구에 새끼줄을 돌려 묶어 혹시라도 벌레가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갈무리한 후 뚜껑을 덮으면 완성.
춘삼월 봄이 되면 된장 가르기를 한다. 장을 담그고 두 달 좀 넘었을 때가 적당하다. 먼저 메주를 건져 다른 항아리에 넣고 우러나기 시작한 장물을 조금 덜어 부어 손으로 으깬 다음 소금을 쳐서 막을 씌우고 익히는 것이다. 남은 숯과 대추, 마른 고추를 마저 건져내고 뚜껑을 덮어 익히면 감칠맛 나는 간장이 된다.
된장과 간장이 한 독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는지. 요즘은 장 담그기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아 때때로 장 담그기 체험을 하고 싶다는 문의를 해 오기도 하는데 건성으로 한번 배우고 갈 사람은 아예 찾아오지도 못하게 한단다. 도리깨로 수확한 콩을 털고 삶아 메주를 만드는 날, 마른 메주를 소금물에 타 장 담그는 날, 간장과 된장을 가르는 날, 마지막으로 충분히 익은 된장과 간장을 맛보고 찾아가는 날 등 적어도 네 번은 농장을 찾아올 수 있는 성의를 보이겠다는 사람들에게만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황토 방 한쪽에 매달린 메주에 각각 이름표가 붙어 있다 싶었더니 바로 그런 가족들 것인 모양이다.
휴가 길에 차가 밀려 양평을 찾은 것도, 애호박 풍년으로 우연찮게 좋은 판매 파트너를 만난 것도, 태풍에 비닐하우스가 모두 날아간 것도, 따지고 보면 이미 갈 길이 정해져 있었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부부는 믿는다.

오랜 세월이 흐른 그 어느 훗날,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 속에 나 있었다.
나는 사람 발길이 드문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놓았다고.

마르셀 프루스트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련한 후회를 이렇게 토로했을지 모르지만 부부는 한 번도 그런 마음을 갖지 않았단다. 왕복 20리 길을 군말 없이 걸어 다니며 통학한 아이들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진 것도, 밤마다 별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잘릴(!) 걱정 없이 내 사업 키워가는 재미를 맛볼 수 있었던 것도 이미 정해진 길 위에서 모두 준비되어 있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정월엔 메주 띄워 장 담그고, 춘삼월엔 장독 손질해가며 장을 가른 다음 엿기름을 틔운다. 4월에 고추장 담그고 나면 5월부터 모내기며 밭 갈기로 숨이 가쁜 시골살이. 한가한 듯 보여도 쉴 틈 없는 생활이다. 김장은 겨울 한 철 농사요, 장 담그기는 일 년 농사라고 했다. 한 해를 온전히 살아내기에 꼭 필요한 중대사이니 정월에 날을 받아 장을 담그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 장맛은 정월 장이 으뜸이라 했다. 설날이 지났으니 이제, 날을 받아봄직도 하다.




장 담그는 순서
1 불리지 않은 콩을 5~6 시간 푹 무르게 삶는다. 그야말로 메주 냄새가 날 정도로 삶는데 중간에 불을 줄여 뜸을 들인다.
2 뜨끈할 때 콩을 덜어내어 절구에 찧는다. 양이 많을 때는 분쇄기를 사용하는데 중간 중간 집어 먹어가며 일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3 깨끗한 천을 메주 틀에 깔고 콩 빻은 것을 넣어 모양을 잡은 후 틀 뚜껑을 덮고 그 위에 버선발로 올라가 단단하게 밟는다.
4 맞춤한 독을 씻어서 말린 다음 짚에 불을 붙여 안에 넣고 연기 소독을 해둔다.
5 천일염에 물을 부어가며 녹여 적당한 농도의 소금물을 만든다. 달걀을 띄워보아 동전 만하게 떠오르면 적당하다.
6 잘 마른 메주를 물로 닦아내는데 솔로 곰팡이를 털어가며 닦고 헹군 다음 물기를 거둔다.
7 소금물이 담긴 항아리에 메주를 차곡차곡 담는다.
8 마른 고추와 대추를 띄운 다음 벌겋게 단 숯을 넣어 소독한다.
9 새끼줄을 엮어 항아리의 입구에 묶어놓으면 완성. 벌레가 기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선조들의 지혜다.

*‘건강의 고향을 찾아서’는 한국벤처농업대학 설립자이며 현재 대통령실 농수산비서관으로 재직 중인 농업경제학자 민승규 박사와 함께 기획・구성한 마음의 고향, 건강의 고향을 찾아 떠나는 여행입니다.

이명아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9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