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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세계 슬로푸드 대회 리포트 행복한 미래는 슬로푸드의 식탁에서 시작된다
최근 국내외의 식품 트렌드를 이야기할 때 ‘슬로푸드’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 10월 23일부터 27일까지 5일간 슬로푸드 운동의 발상지인 이탈리아에서는 세계 슬로푸드 대회가 열렸다. 업자를 위한 박람회가 아니라 실제 소비자를 위한 유익한 이벤트였으며 생산자, 소비자 모두의 축제이자 소통의 장 場이었던 그곳에 다녀왔다.


1 유기농으로 재배한 겉껍질 그대로의 아몬드.
2 모양도 일정치 않고 흠집도 많지만 유기농·무농약으로 재배해 사과 향이 살아 있는 토종 사과.
3 돼지 뒷다리를 소금과 바람으로만 2년 이상 숙성시킨 산 다니엘 San Daniele 사의 프로슈토 햄.


국제 슬로푸드 본부 주관으로 2년에 한 번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리는 ‘살로네 델 구스토 Salone del Gusto’(고품질 음식 박람회)와 ‘테라 마드레 Terra Madre’(지구촌 식품 공동체 운동). 개막 전부터 이탈리아 전 지역의 레스토랑과 시내 곳곳에는 행사를 알리는 팸플릿이 깔리고 현수막이 걸려 토리노만의 지역 행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호텔 예약은 일찌감치 끝났고, 레스토랑 예약 리스트도 대부분 만석일 정도로 전 세계인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 행사다. 슬로푸드를 상징하는 달팽이 로고가 여기저기 붙어 있어 슬로푸드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행사가 개막되자 토리노 시내에는 전 세계 1백50개국에서 5천 명의 농축산인과 1천 명의 요리사, 4백 명의 학자, 전문가 등 1만여 명에 달하는 공식 참가자와 일반인들이 모여들어 축제 분위기로 가득했다. 우리나라는 2011년 세계 유기농 대회를 유치한 남양주시에서 2012년 세계 슬로푸드 대회를 유치하기 위해 11명이 참가했다. 한편 테라 마드레에는 한국 대표로 전주대학교 한복진 교수가 초청되어 개막식 때 태극기를 들고 입장했다.


1 세계 3대 블루 치즈의 하나인 고르곤졸라 Gorgonzola 치즈.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역사가 있는 치즈다.


2 전통 방식 그대로 방목해서 키운 닭고기. 남자가 쓰고 있는 닭벼슬 모양의 모자가 재미있다.

잠자는 혀를 깨우는 음식, 슬로푸드
1989년에 출범한 슬로푸드 운동은 로마의 유서 깊은 스페인 광장에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맥도날드가 들어서는 데 대항했던 이탈리아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막이 올랐다. 패스트푸드점의 입점을 물리적으로 막기보다는 미식가들의 입맛을 지키고 살리는 방법으로 슬로푸드 운동을 택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슬로푸드 운동은 패스트푸드에 대한 반대 운동에 그치지 않았다. 세계의 맛이 표준화, 획일화되어 지역마다의 독특한 맛이 사라지는 것을 우려하여 소멸 위기에 처한 전통 음식, 식자재, 와인 등을 지킨다거나, 질 좋은 재료를 공급하는 소생산자를 보호하고 어린이나 소비자의 둔해진 혀를 일깨울 수 있도록 미각 교육을 시키는 것에 역점을 두어 전개해나갔다. 이는 유기 농업이나 환경 농업과 맥을 같이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된장, 고추장, 김치가 우리에게 가장 좋은 슬로푸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전통 식품에 대한 수요도 상당히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요리하는 게 귀찮다거나 식구가 적어서, 또는 만들기 어렵다는 이유로 대량생산으로 제품화한 전통 식품을 먹는 이가 많다. 기업은 소비자에게 가능한 한 싸게 공급하기 위해 수입산이든 유전자 변형 농산물이든 가리지 않고 비용을 줄이는 데만 주력하고, 소비자는 원재료가 어디서 오는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지 못한 채 슬로푸드를 먹는다는 것에 위안을 받는 것이다. 또한 대형 마트가 생기면서 엄청난 자본력으로 대량 구매를 하게 되어 작은 농가나 소신껏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가격 경쟁에서 절대 이길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농산물이나 축산물도 공장에서 생산하는 제품처럼 규격화되고, 언제 어느 때고 살 수 있는 공산품이 되어버렸다. 또 소비자들은 싸다고 잔뜩 사다가 냉동실에 두고 먹는다. 그러면서 채소나 과일 본연의 맛은 잃어버린 채 여러 가지 소스와 조미료의 맛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1 치즈의 모양도 가지가지다. 표주박 모양으로 만든 프로볼로네 Provolone 치즈. 남이탈리아의 치즈로 모차렐라와 같은 종류다.


2 발테리나 Valtelina 치즈. 농가에서 만든 치즈를 받아 숙성만 전문으로 하는 회사인 구판티 Guffanti에서 만든다.

이렇게 대규모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제품들 덕에 우리는 전국 어디를 가나 맛이 똑같은 된장찌개와 김치를 먹게 되었다. 지역마다 특색 있는 맛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슬로푸드 운동은 이런 획일화된 맛에서 각 지역의 고유한 맛을 살리자는 운동이며, 오랫동안 집안마다 전해 내려오는 고유의 손맛을 보호하자는 운동이다. 또한 빨리 출하하려고 인공적인 힘을 가해서 웃자란 농산물이 아닌 본래의 자기 속도대로 자란 제철 채소나 과일, 고기를 먹자는 운동이다.

물론 슬로푸드 운동은 유기 농업이나 환경 농업과 맥을 같이하지만 멀리서 수입해온 유기 농산물이나 제품보다는 자기 지역(반경 50km 내)에서 나는 제철 식품을 먹자고 제안한다. 슬로푸드 운동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사람들의 제철 과일이나 채소에 대한 인식은 진정 배울 만하다. 제철이 아니면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비닐하우스를 거의 볼 수 없었다. 이탈리아 사람에게 물으니, 겨울에는 남쪽 지방에서 채소가 올라오기도 하지만 사철 여러 종류의 버섯이나 모든 채소를 구할 수는 없다고 한다.

가을에는 제철인 트러플truffle을 비롯한 버섯으로 만든 음식을 충분히 즐기고, 다른 계절에는 버섯을 말리거나 병조림으로 만들어 먹는 정도라고 한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언제든지 슈퍼에 가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으니 어느 철에 무엇을 먹으면 맛있는지도 잘 모르게 되어 아쉬움과 우려가 밀려온다.

3 전시장 한쪽 벽면을 여러 종류의 허브와 색색깔의 채소를 이용해 컬러풀하게 꾸며 관람객의 시선을 끈다.


1 치즈 숙성 전문 회사인 구판티에서 만든 샤프란 맛의 치즈.


2 12년 이상 숙성시킨 파르메자노 레자노 치즈와 장인.


3 미각 교육을 받는 학생들.

‘좋고’ ‘깨끗하고’ ‘공정한’ 음식에 미래가 있다
살로네 델 구스토는 ‘good, clean, fair’의 세 가지 키워드를 제창한다. 음식은 맛이 좋고, 깨끗해서 해를 입히지 않고, 공정한 방법으로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치즈, 살라미, 파르마 햄, 파스타, 천연 발효 빵, 허브, 전통 과자, 초콜릿, 와인, 맥주, 과일, 오일, 채소 등으로 가득 채운 전시장에서는 입장료 20유로만 내면 얼마든지 시식하고 설명을 듣고 구입할 수 있다. 단순히 맛있는 것을 전시하는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 식품의 역사, 건강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 만드는 과정, 생산자의 역할 등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하고 의견을 나눔으로써 소비자는 올바른 식품을 선택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체험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마련하여 재미를 더해준다. 입장료 20유로에 5유로를 더 내면 주머니에 담긴 와인 글라스를 주는데 이것을 목에 걸고 다니며 와인도 얼마든지 시음할 수 있다. 무려 2천5백 종의 와인, 9백 명의 이탈리아 와인 생산자와 4백 명의 세계 와인 생산자가 참여했으니, 와인만큼은 원 없이 맛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호프 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옛날 방식 그대로 만든 맥주는 한 잔에 2유로. 파스타를 직접 만들어보는 프로그램도 인기가 좋다.

전시장 안에는 여러 개의 가설 레스토랑을 마련해 슬로푸드를 코스로 맛볼 수 있는데, 전시장뿐 아니라 시내의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도 전 세계에서 온 유명 셰프들의 환상적인 요리를 만날 수 있는 프로모션을 진행한다. 티켓 예약이 일찌감치 마감되니 미식가라면 예약을 서둘러야 한다. 한편 다양한 세미나가 열리므로 예약하고 참가해보는 뜻 깊은 경험도 가질 수 있다. ‘미각 워크숍’은 해설을 들으면서 슬로푸드를 시식할 수 있으며, 생산자와 전문가가 식품이나 와인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하고, 비교하고, 의문을 던지고, 맛보고, 만져보고, 의견을 나눈다.

4 이번 행사의 공식 포스터.

희귀한 맥주, 뛰어난 제조 방법으로 만든 프로슈토나 극상의 증류주, 치즈, 초콜릿 등 여러 가지 훌륭한 식품 중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템을 골라 워크숍에 참여해보는 것도 좋다. 모두 예약을 해야 하며 영어와 이탈리아어로 진행한다. 또 재미있었던 것은 ‘미각의 극장’. 60석 정도의 계단으로 된 자리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부엌과 스크린을 통해 이탈리아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셰프가 요리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이탈리아 와인과 요리의 마리아주를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기억의 워크숍’은 와인이나 미식 세계의 일인자를 만나는 시간으로, 편안한 분위기에서 훌륭한 선배들과 젊은이들이 함께 지식을 공유하고, 세대 간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자리다. 97세의 파르메자노 레자노 장인이 치즈 두드리는 소리를 비롯하여 다른 장인들의 비법을 듣는 귀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행사장에는 학생 단체가 눈에 많이 띄었는데, 유치원생부터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들까지 45분 코스의 미각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식품을 관찰하고, 만져보고, 냄새 맡아보고, 시식하며 미각 회복의 중요성을 깨우치고 간다.

이처럼 자라나는 세대를 대상으로 미각 교육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을 구별하는 능력을 키워야만 자신의 건강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정부는 슬로푸드 창시자인 카를로 페트리니의 고향인 브라 Bra 지방 근처에 세계 최초의 ‘미각 대학’을 설립했을 정도로 미각 교육에 정성을 쏟는다. 카를로 페트리니가 기획하고 정부가 관리하는 이곳은 요리 학교가 아니라 식품과 음료에 관해 인간적이며 과학적인 학문을 가르친다. 이 밖에 강연회나 영화 상영, 슬로푸드 카페 등도 열었으며 5일 동안 진행된 축제가 마무리되었다. 행사장을 돌아보며 값진 경험을 한 뒤 카를로 페트리니의 말이 가슴에 남았다. “생태적 감수성이 없는 미식가는 바보지만 미식가적 감수성이 없는 생태주의자는 불쌍한 사람이다.”

1 주비로 Sbirro 치즈. 맥주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치즈 겉면에 묻혀 숙성시킨 것으로 호프 향이 난다.


2 수많은 종류의 좋은 치즈를 맛볼 수 있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시식용으로 준비한 파르메자노 레자노 치즈.


3 선인장의 열매로 피코 딘디아 Fico d’india라는 이름을 지녔는데, ‘인도의 무화과’라는 의미. 과일처럼 껍질을 벗겨 먹는다.


1 산 다니엘 사의 프로슈토 햄 전시 부스. 모형이 아닌 실물의 프로슈토 햄으로 채운 공간과 푸짐한 시식으로 인기가 높았다.


2 전시장 한쪽에서는 전통 의상을 입은 여인이 이탈리아 자수 공예를 시연하는 이벤트도 열었다.


3 나폴리 지방의 유명 파스타 회사인 파스타 디 그라냐노 Pasta di Gragnano의 부스. 각양각색의 파스타를 길게 뽑아 늘어뜨려놓은 모습이 재미있다.


1 달팽이가 상징물인, 슬로시티로 지정된 전 세계 도시 이름이 나열된 포스터.


2 질감이 무척 아삭아삭하고 산뜻한 잔향이 남는 유기농 셀러리.
3 토스카나 시에나 지방의 전통 과자인 판 포르테 디 시에나 Pan Forte di Siena. 밀가루, 꿀, 견과류, 감귤 절임 등을 버무려 만든다.


슬로푸드 마니아 박현신 씨의 즐겨찾기 
1 팔당 올가닉푸드(http://dalbab.com) 팔당 상수원 보호 구역에서 안전한 친환경 또는 유기농 먹을거리만을 생산하는 농촌 공동체. 
2 슬로푸드 체험관(http://imaju.icehost.co.kr) 학교나 가정, 사회에서 배우기 어려운 올바른 음식 문화를 체험하는 곳으로 슬로푸드 전시실 관람, 슬로푸드 조리 체험, 농장 체험 등을 경험할 수 있다. 
3 슬로푸드 아카데미(http://sfcc.co.kr/academy) 농민, 소비자 모두가 서두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먹을거리와 삶의 리듬을 찾고자 만든 교육 프로그램. 
4 달팽이밥상(http://dalbab.com/04/0401.php) 팔당 올가닉푸드에서 운영하는 친환경·유기농 식품으로 만든 반찬을 파는 가게. 아홉 가지 나물 비빔밥, 시골집 된장 정식 등 식사도 가능하다. 서울 도곡동 렉슬상가(02-2040-2755)와 수서 현대벤처빌딩(02-2057-1771) 내에 있다.
5 슬로푸드 본부(www.slowfood.com) 1989년에 이탈리아에서 창립한 친환경 미식 단체로 전 세계에 8만 명의 회원이 있다. 
6 살로네 델 구스토(www.salonedelgusto.com)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는 고품질 식품 박람회로 2년에 한 번씩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열린다. 
7 테라 마드레(www.terramadre.info) 슬로푸드가 만들어 낸 프로젝트로 먹는 것에 관한 지구촌 식품 공동체 운동. 
8 이탤리 푸드 숍 Eataly Food Shop(www.eataly.it) 이탈리아에 있는 고품질, 식재와 음료를 구입할 수 있는 푸드 마켓으로 최근 도쿄에도 오픈하였다.
9 미식 대학 University of Gastronomic Sciences(www.unisg.it)슬로푸드 본부에서 세운 미식 대학과 대학원.

구선숙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