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온 가족이 떠나는 제주올레 가을 여행 바다부터 하늘까지 나긋나긋 걷는 길
수평선 너머 어디쯤 같은 곳을 바라보며 아이 손 잡고 걸어본 적이 있었나. 자동차 경적, TV 소리의 방해 없이 그대의 맑은 음성에만 집중하며 이야기 나눈 때가 언제일까. 일상의 전자파가 차단된 호젓한 길 ‘제주올레’로 향해보자. 바람에 젖은 수풀, 말없이 긴 능선, 촉촉한 해안선이 갈마드는 길. 길 위에서 함께 구르고, 뛰고, 소리치자. 세상에 유일무이한 우리 가족만의 길로 기억될 것이다. 제주올레 코스를 만들고 최근 <제주 걷기 여행>(북하우스)을 낸 서명숙 씨가 안내한다.


제주올레 제1코스 중 알오름에 올라 내려다본 제주의 풍광. 1코스는 제주올레의 태동을 알린 상징적인 길이라 그런지 가장 대부분의 올레꾼들이 다녀가곤 한다.

나는 길 만드는 여자다. 세상에 보기 드문, 희귀한 직업을 가진 셈이다. 내 친정어머니는 아직도 내 직업에 대해 불만스러워하신다. 잡지사나 인터넷 신문 편집국장 시절만 해도 이웃에 자랑했던 딸이지만, 지금은 도무지 당신 딸이 하는 일을 설명하기 힘들다는 푸념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이 그동안 해온 어떤 직업이나 직위보다도 행복하고 만족스럽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내 동료들이 발품 팔아가면서 찾아낸 길을 걸으면서 ‘행복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많은 가족들이 집이 아니라 길에서 행복을 느끼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진짜 행복한 일이다. ‘행복이 가득한 길’을 만드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1, 2 이정표는 보일락 말락 숨어 있다. 가뭇한 현무암에 그린 화살표, 나뭇가지에 맨 리본 등 ‘파란 표시’를 따라 걸으면 된다. 제1코스에 있는 파란 대문도 그중 하나.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제주를 그리다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 겹친 결과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운명이자 숙명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서울에서도 한복판인 광화문통에서 ‘지지고 볶는’ 언론사 생활을 23년이나 하던 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천직이라고 여겼던 기자직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지고 넌더리가 났다. 마음은 물기 하나 없이 바짝 말랐고, 몸은 물 먹은 솜처럼 늘 피곤했다.
지친 심신을 되살리기 위해 나는 걷기 시작했다. 걸핏하면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던 내게 걷기는 낯선 일이었지만, 죽지 않으려면 걷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15분도 걷기 힘들었지만, 이내 한 시간은 거뜬하게 걷게 되었다. 그러자 두 시간, 세 시간으로 걷는 시간이 늘어났다. 걷기에는 강한 중독성이 잠재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차량 위주로 설계된 대한민국의 길은 걷는 사람에게 늘 위협적이다. 걸을 만하면 길이 끊어지기 일쑤였고, 쌩쌩 달리는 자동차는 경적을 울려댔다. 도심의 소음과 공해, 커다란 간판이 눈과 귀와 코를 괴롭혔다.
허기진 사람처럼 늘 걷기가 고팠다. 어디 맘 놓고 하염없이 걸을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그러던 중 도보 여행자들의 성지라는 스페인의 카미노 데 산티아고(‘산티아고 가는 길’이라는 뜻)를 걸어간 어떤 중년 여자의 책을 읽게 되었다. 바로 이거야. 무릎을 쳤다. 산티아고 길이 내 마음에 꽂힌 순간이었다.
그러나 어디 세상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가. 산티아고 길을 가슴에 품은 지 4년 만인 2006년 9월에야 비로소 길을 떠날 수 있었다. 800km의 구릉과 언덕, 대평원 길을 걸으며 나는 엉뚱하게도 고향 제주의 자연을 더 많이 떠올렸다. 어릴 적 걷던 해안길, 중산간 길이 새록새록 그리워졌다. 그럴 즈음 영국에서 온 한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는 산티아고 길을 몇 년에 한 번은 찾겠노라는 내게 ‘우리가 이 길 위에서 누린 행복과 평화와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제안했다. 각자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자기만의 ‘카미노(길)’를 만들자고.


3  제1코스 중 알오름은 걷는 길.


4 제1코스의 말미오름을 지나면 들판에서 유유자적 풀을 뜯고 있는 소나 말을 만난다.
5 제1코스의 시작점을 알리는 표지판.


처음엔 어린이와 가족은 생각지도 못했다 36일간 산티아고 길을 걷는 동안 나는 바다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스페인 북동부에서 북서부에 이르는 내륙지방 길이었으니. 제주에 ‘아일랜드 트레킹 코스’를 만들면 세계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 이름은 ‘제주올레’라 지었다. ‘올레’는 제주 말로 ‘집으로 통하는 아주 좁은 골목길’을 뜻하며, ‘제주에 올래?’라는 중의적 의미도 내포한다.
지난해 여름부터 제주도 남쪽 해안길을 40일 동안 답사한 뒤 9월 8일 제주올레 제1코스(시흥리 말미오름-광치기 해안)를 개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내 머릿속에는 삶에 지치고 속도에 치인 어른들만 자리했다. 산티아고 길에는 부부나 연인, 나이 든 모녀와 부녀지간은 있었지만 어린이나 청소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길에서 만난 가장 어린 친구는 아빠를 따라나선 독일의 중학교 2학년생이었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첫 코스 개장 행사에는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온 젊은 부부에서 초등학생과 중학생 자녀 셋을 데리고 온 부모까지 있었다. 그 밖에도 대여섯이나 되는 미취학 아동들을 보면서 속으로 걱정했다. 15km나 되는 길을 어린아이들이 걸어갈 수 있을까, 칭얼대는 아이들 때문에 부모들까지 걷기를 포기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싶어서.


6 제6코스 중 경치가 빼어난 송악산.

그러나 그건 내 짧은 생각이었다. 유모차를 탄 아기를 제외하고는 이곳에 온 모든 어린이들이 스스로 완주했다. 그뿐인가. 어른들보다도 아이들이 올레 길을 더 즐길 줄 알았다. 팔랑거리는 나비를 쫓아가기도 하고, 길섶에 핀 풀꽃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길가로 원정 나온 게를 신기한 듯 만져보기도 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종착지인 광치기 해안에 다다른 아이들은 지친 기색은커녕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여행 즐기는 부모를 따라 세계의 유명한 관광지를 두루 다녀봤다는 세 아이는 “이제껏 가본 곳 중에 제주도가 최고”라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한 엄마가 ‘어딜 가나 한 시간도 안 돼서 칭얼거리고 뭘 사달라고 조르던 아이가 신나게 잘도 걷더라’면서 대견스러워했다.


1 멀리 성산일출봉이 바라다보이는 수마포 해안길. 제1코스의 일부로 맨발에 와 닿는 폭신한 감촉이 인상적이다.


2 제6코스에 있는 송악산에 오르는 길목에서 가을을 흠뻑 느끼자.다 오르고 난 뒤에는 또 전혀 새로운 광경을 만날 것이다.

“‘예쁘다’ 다섯 개가 아름다운 거죠” 그로부터 1년의 세월이 훌쩍 흘렀다. 올레 길 개장 행사만도 아홉 차례나 치르면서 숱한 가족들을 만났다. 기억에 남는 이들도 많다.
장면 1. 제6코스(화순 해수욕장-하모리 해수욕장) 개장 행사 때는 초반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3백여 명의 올레꾼(올레 길을 걷는 이들을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 중에 노란색 우비를 입은 두 꼬마가 유독 눈에 띄었다. 다섯 살, 일곱 살 난 남자 형제였다. 다섯 살짜리 꼬마는 화순 암반 길을 걷는 내내 엄마 손을 잡고 노래를 불렀다. 훗날 그 엄마가 제주올레 홈페이지에 남긴 글을 보았더니, 코스 후반부인 송악산 오름에서 내려오면서 아이가 말하더란다. “엄마, 너무 아름다워요”라고. 엄마는 되물었다. “아름다운 게 뭔데?” “예쁘다 다섯 개가 아름다운 거죠. 엄만 그것도 몰라요?” 아이가 그렇게 대답했다나. 하기야, 유치원에서 동그라미 다섯 개면 최고 아닌가. 제주의 바닷길과 오름을 걸으면서 아이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낀 것이다.
장면 2. 제3코스(서귀포 외돌개-월평 포구)는 길을 걷는 내내 파도 소리가 귓전에서 속삭이는 아기자기한 흙길의 연속이어서 연인끼리, 부부끼리 대화를 나누기 좋은 길이다. 소설가 김훈 선배도 이 길을 걷고 난 뒤에 “왜 비싼 돈 들여 외국으로 신혼여행을 가냐. 이 길에 허니문 부부 수백 쌍을 풀어놓고 걷게 해야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책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걷기여행>(북하우스) 출판기념회를 마친 다음 날(10월 12일) 제3코스를 올레꾼들과 함께 걸었다. 억새풀이 바람에 나부끼는 공물 해안을 걷는데 유난히 다정한 커플을 만났다. 남자분이 내게 반갑게 말을 걸었다. 자기소개를 하는데 홈페이지에서 많이 듣던 닉네임이었다. 그분이 남긴 사연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결혼식을 못 올려 아내에게 미안해서 아내 생일을 맞아 올레 길을 걷겠노라던 그였다. 40대 초반과 30대 후반인데도 둘 다 동안이어서 마치 신혼부부처럼 보였다. 그들은 ‘허니문 길’이라는 3코스에서 진정한 허니문을 즐기는 눈치였다.
장면 3. 제8코스(남원포구-효돈 쇠소깍) 개장 행사를 하던 날, 유난히 물빛이 고운 남원 큰엉 바닷가 앞에서 한 여자가 눈물을 흘렸다. 곁에 있던 마음 고운 시인 손세실리아가 손수건을 건네주고는 어깨를 살포시 감싸 안았다. 그 여자, 더 서럽게 통곡하더니, 마침내 속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중3짜리 아들을 사고로 잃은 지 50일 만에 휘청거리는 마음을 가눌 길 없어 무작정 올레를 찾았다고. 바다에 설움을 다 토해놓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고. 그는 개장 행사가 끝난 뒤 시인과 이틀이나 더 제주올레를 걸으면서 바다에 시름을 부려놓고 떠났다고 한다.
허구한 날 지지고 볶고 부대끼다 보면 상대방 없이는 못살 것 같았던 부부도 대화가 끊기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아이가 ‘웬수’처럼 느껴지는 시기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럴 때 가족끼리, 연인끼리, 부부끼리 ‘행복이 가득한 길’ 제주올레를 찾아오시라. 그 길 위에서 손을 맞잡고 걸으며 일상의 무거운 짐과 족쇄를 내려놓고 풀어놓으시라. 그 길을 놀멍 쉬멍 걸으멍(놀면서 쉬면서 걸으면서) 가다 보면 굳게 닫힌 마음의 빗장이 풀리게 될 터이니. 

3 제1코스인 알오름을 내려와 우거진 숲을 향해 가는 길.

아이와 함께 걸을 땐 이렇게 해보세요
1
포장도로보다는 흙길이나 숲길을 택하자. 폭신폭신해서 피곤하지 않으며, 구경할 동식물이 많아 아이들이 싫증내지 않는다.
2 아이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걷자. 아이의 눈높이와 속도로 바라보는 풍경과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다.
3 가끔 아이의 운동화 끈이 풀렸는지 살펴보자. 부모가 운동화 끈을 매준 순간을, 새 운동화 사준 일보다 더 진하게 기억하는 아이가 많다.
4 들꽃과 동식물 이름을 미리 알아두자. 아이에게 좋은 학습이 될 뿐 아니라 존경받는 부모가 되는 지름길이다.

서명숙 씨가 추천하는 제주올레 가족 코스
“10~11월이야말로 제주올레의 풍경이 가장 황홀한 때예요.” 서명숙 씨는 제주 전역에 만들어진 제주올레 1~9코스 중 가족이 걷기에 가장 좋은 길로 1, 3, 6코스를 추천했다. 제1코스(말미오름-섭지코지)는 우도를 멋지게 볼 수 있는 오름을 지나며, 제3코스(외돌개-월평포구)는 아기자기한 해안 풍경을 따라 걷는 길이고, 제6코스(화순 해수욕장-하모 해수욕장)는 해안 절벽과 송악산의 물결치는 수풀을 즐길 수 있다. 제주공항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비치된 ‘제주올레’ 가이드북에 각 코스의 특징과 위치가 상세하게 나와 있으니 잊지 말고 챙기자. 미리 제주올레 홈페이지(www.jejuolle.org)를 참고해 일정을 짜도 좋겠다. 더욱 궁금한 점은 제주올레 사무국(064-739-0815)에 문의하면 된다.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