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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서용 씨의 양평 작업실 흙벽에 새긴 영원한 여유
검은 모래 바람으로 하늘이 거뭇하게 보이는 중국의 황무지 둔황에서 벽화를 공부한 화가 서용 씨. 그는 몇 년 전 한국으로 돌아와 양평에 바람처럼 유연하게 노닐 수 있는 집을 지었다. 이곳에서 그가 새롭게 창조한 작품에는 둔황 벽화를 통해 경험한 무한한 여유와 충만함이 담겼다. 작품과 일상에서 얻는 경이로움을 언제나 가족과 함께 나누는 것은 물론이다.

1, 2 둔황 벽화의 기법을 살려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서용 씨의 작품은 작업 과정이 무척 까다롭고 지난하다. 우선 캔버스에 마대를 붙인 뒤 둔황에서 가져온 황토를 바른다. 그 뒤에 고운 백토를 덧바른다. 석채 안료를 개어 여기에 그림을 그린다. 표면을 파내 입체적인 묘사를 하기도 하는데, 원래의 둔황 벽화에는 없던 기법이다.
3 이번 전시회에 출품할 작품 중 일부. 낡은 듯 빛 바랜 효과를 냈지만 세밀하게 묘사된 붓터치를 퇴색시키지는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운명이고 인연이다” 11년 전, 화가 서용 씨는 홀연 둔황으로 떠났다. 중국 서북쪽 고비사막의 검은 모래 바람이 몰아치는 작은 도시 둔황 말이다. ‘둔황’하면 전설 속의 도시 아니냐고 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둔황이라는 도시는 신화적이며 전설적이다. 동서양 문물이 흐르던 실크로드의 중심지인데다 무엇보다 엄청난 규모의 동굴 벽화가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베이징에서 벽화로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동양 벽화의 요람에 은거하겠다며 둔황으로 향했다.

그는 돈황행을 두고 “‘내’가 간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이 날 그리로 이끌었던 듯하다”고 말한다. 운명이고 인연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운명에 전조가 있었다. 석사 학위 졸업 전시가 중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중국미술관에서 성공적으로 열리고 있을 때, 정작 작가는 불안하고 불만스러워 견딜 수 없었단다. “형언하기 어렵지만, 그때 참 불쾌한 상태였어요. 중국 화가들이나 관람객의 찬사도 그다지 달갑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제 그림이 불만스러웠지요. 전시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안을 힐끔 들여다보기만 했지요.” 박수 소리도 멀리서 멍멍하게 들릴 뿐이었다. 모든 상황이 일순 낯설어졌다. 당황한 그를 도시 둔황이 불렀다. 이전에 두어 번 다녀갔던 도시, 둔황이.

둔황 벽화를 마주했을 때의 압도적인 상황을 그는 작업 노트에 기록해두었다. ‘둔황 벽화는 확실히 나에겐 충격적이었다. 석굴 안을 가득 메운 5백 개에 달하는 벽화는 강하지만 깊은 여운을 남기는, 아주 특별한 감동이었다.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구석진 곳의 손바닥만한 벽화에서도 현대 미술로는 비길 수 없는 특이함이 있었고 그것들은 하나 하나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아, 무슨 표현이 그 희열을 대신할 수 있으랴. 나는 둔황의 벽화에서 그동안 내가 고민하고 있던 문제의 해결 방법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흔히 동양 벽화를 공부하려면 중국으로, 서양 벽화를 공부하려면 이탈리아로 가라고 한다. 그런데 둔황은 중국 최고의 벽화를 볼 수 있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작가들조차 이곳에서 벽화를 공부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 와중에 서용 씨는 둔황 란저우대학이 세계 최초로 개설한 둔황학 박사과정 1기로 입학했다. 이후 7년 동안 둔황의 모래 바람 속에서 헤매다 4년 전 이곳 양평에 자택 겸 작업실을 짓고 템페라 작가인 아내 서해경 씨와 딸 희진과 함께 정착했다.


1 둔항 벽화의 압도적인 규모를 직접 보고 돌아온 그는 결국 양평에 높이가 6m 넘는 큼직한 작업실을 마련했다. 천장이 높아서 대작을 그리기에 좋다.
2 중국에서 고재로 주문 제작한 책꽃이와 서랍장. 집에 창이 많아서 햇살이 빛 바랜 나무를 부드럽게 비춘다. 3 요즘에는 표면을 도려내는 반입체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원래 둔황 벽화에는 없는 기법으로, 작품에 입체감을 부여하기 위해 그가 고안했다.
4 서해경 씨는 지하에 있는 작업실을 임시로 폐쇄하고 서용 씨의 서재에서 작업 중이다.

석굴을 닮은 작업실 옛 도시의 호흡에 익숙해진 작가에게 도시는 살 곳이 못되었다. 양평에서도 한참 산길로 접어든 곳에 터를 마련했다. 집을 지을 때 가장 염두에 둔 것은 천장이 높은 작업실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엄청난 규모의 둔황 벽화를 체험한 그에게 커다란 작업실은 물고기가 노닐 물처럼 꼭 필요한 공간이었다. 아내나 아이는 전원생활이 불편할 법도 한데, 서해경 씨나 딸 희진은 양평 생활을 즐기고 있다. 둔황과 계림에서 시골 살이를 했던 이들에게는 자연이 고향처럼 편한지도 모른다. 커튼도 없는 환한 통창으로 둘러싸인 이 집에서는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분간이 안간다.

희진은 집으로 돌아오는 먼 길을 걸으며 길가의 온갖 것에 관여하고 다닌다. 한번은 걱정하던 엄마가 “수업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야지, 왜 놀다가 늦게 돌아오니!”라며 혼냈다. 딸의 대답이 천진하다. “꺾여서 버려진 꽃을 주워서 묻어주고, 거기에 ‘밟지 마세요’라고 쓰고 오느라고 늦었다”고 한다. 어떤 때는 달, 구름, 해와 이야기하고 바람과도 춤을 춘단다. 서해경 씨는 동생 하나 낳아줘야 하나 했지만, 딸은 심심하지 않으니 괜찮단다.

아내 서해경 씨는 서양 벽화 기법의 일종인 템페라 그림을 그리는 작가다. 대리석 표면을 닮은 중세 서구의 채색 기법을 활용해 최근에는 꽃이나 새 같은 한국 전통 문양을 그려냈다. 잠시 계림에 살 때 저녁마다 남편과 손 잡고 산책하며 보았던 하늘 빛을 영영 잊지 못해 작품에도 그 색감을 담았다. 여러 번 공들여 덧칠한 투명하고 오묘한 빛이 그 하늘을 닮았다. 그러고 보면 무엇인가와 사랑에 빠지고 인연을 맺는 것은 사람이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 남편과 사랑에 빠질 때도 그러했다. “처음에는 오빠처럼 잘 돌봐주던, 그림 잘 그리는 선배였어요. 서서히 가까워지던 어느 날, 손을 내밀래요. 한 손을 내밀었더니 두 손을 내밀래요. 공손히 두 손을 펼쳤더니 두 손 가득 사탕을 쥐여주더군요. 제 볼이 발개졌어요. 그날 밤 이 남자가 꿈 속에 나타나더니, 무슨 조화인지 그가 좋아졌어요….”

서용 씨는 문득 이 모든 인연에 감사한 마음이 들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베이징에서 공부할 때 가진 것이라고는 열정이 전부였던 유학생에게 시집오겠다고 한 열 살 어린 튤립 같은 후배 서해경 씨도, 또 물 설고 산 선 먼 계림에 있을 때 건강하게 태어나준 희진이도 그에게는 존재의 이유다.


5 템페라 작가인 아내 서해경 씨는 요즘 집안의 행복과 평안을 기원하는 작품을 그린다. 민화에서 나타나는 전통적인 기물을 모티프로 삼았다.

벽화에 불어넣은 21세기 화가의 사적인 고백 이 부부는 초등학교 4학년 딸을 키우는 대개의 ‘서울 부모’들과 많이 다르다. 딸을 학원에 보내지 않고 공부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공부는 못해도 좋으나 예의 바른 아이로 자라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서용 씨가 서른 후반의 나이에 얻은 무남독녀 외딸이지만 집에서부터 한참 걸어 나간 뒤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긴 통학 길을 차로 데려다준 적도 없다. 한겨울에 몸이 꽁꽁 얼어서 집에 돌아올 적이면 무척 안쓰럽지만, 돌아보면 자신도 어릴 때 그 정도는 겪으며 자랐다. 그래서 시골 아이들처럼 키우기로 마음을 정했다. 덕분에 희진이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감성이 풍부해서 글 재주도 있고 노래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린다. 들판에서 뛰놀며 자란 희진은 장차 아빠처럼 제 2의 둔황을 찾아 떠날지도 모를 일이다.

서용 씨는 양평의 외딴 곳에서 전원생활을 하는 요즘도 둔황이 그립다. 아무래도 한국에 살면 그를 찾는 이들이 많아 작품에 온전히 몰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여름 방학에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두 달 동안 둔황에 머무르며 그림을 그렸다. 그만큼 둔황은 그에게 자궁처럼 편안한 곳이다. 그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보았기 때문일 터다.

1997년 둔황에 도착했을 때 서용 씨는 그림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미 길들여져서 익숙했던 가치와 기법 등 모든 것을 비우기 위해 벽화 모사 작업에 열중했다. “작업에 몰입하다 보면 긴 시간을 훌쩍 넘어 당시의 화공들과 교감했습니다. 제겐 둔황 벽화가 유일한 스승이었지요. 천 년 전의 화공들은 내게 용필법과 채색법을 알려주었습니다. 먹선을 이렇게 긋고 색을 이렇게 칠하라고 일러주는 듯했습니다.”

벽화에는 다른 장르에서 느낄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서용 씨는 역사성과 자연미라고 말한다. “화공이 벽화를 그릴 때에는 당시의 생활상을 반영하기 마련이므로 벽화는 미술사는 물론 복식, 건축, 민속, 생활양식 등의 정보를 생생하게 제공합니다. 둔황 벽화가 ‘벽 위의 백과사전’이라고 불리는 것도 역사서가 전달하지 못하는 사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죠,” 벽화는 오랜 시간이 흘러 자연미를 획득했다. 현재 우리가 보는 벽화는 그 옛날 화공의 손과 약 1천 년이라는 시간이 만나 완벽한 자연미를 창조한 것이다. 당시 화공이 그림을 그릴 때에는 새 것의 냄새가 나는 창조물이었겠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며 자연은 그 그림을 품어 안았다. 더러는 변색되고 더러는 해지고 어떤 부분은 떨어져 나가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서용 씨는 오래된 것에서 나는 자연미를 사랑한다. “서금서금해서 편안하다”고 말한다. 21세기를 사는 작가가 굳이 둔황 벽화를 통해 익힌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벽화 모사가 아니다. 현대인 서용 씨의 주관적인 미감이 녹아 작품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덧칠하고 갈아내서 낡은 효과를 낸 그림은 둔황 벽화와 흡사하나 ‘참 곱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런데 여기에 강한 먹칠로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문양을 더한다. 몇 달 동안 매달린 그림 위에 과감한 붓질을 하기란 쉽지 않아서, 맨 처음에는 술을 마신 뒤 취기가 올라 자유로워졌을 때 시도했단다. “둔황은 독특한 기운이 가득한, 강한 땅입니다. ‘그 기운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가 저의 화두였지요.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우주의 기운을 모아 가로로 그은 일필의 먹선을 대한 듯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했는데, 여기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당시 둔황 벽화는 불교 사상을 선양하기 위해 그려졌다. 서용 씨에게는 둔황 벽화가 종교적이기보다는 지극히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경주 석굴암을 불교 미술에 국한해서 이야기할 수 없고 우리 조상의 문화 유산으로 보아야 하듯이 둔황 벽화도 비록 불교 미술의 성향을 강하게 풍기지만 불교 미술에 국한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시대의 대표적인 문화를 반영한 작품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래서 둔황 벽화가 그 시대의 시간성과 역사성을 또렷히 담은 공공 예술이라면, 그의 작품은 ‘서용’이라는 벽에 자유분방하게 펼친 극히 개인적인 고백이다.


1 서용 씨 가족의 집은 장식을 최소한으로 한 단정한 스타일이다. 동양화를 공부한 부부의 취향대로 여백의 미가 돋보인다.
2, 4 부부는 작품에 대해 함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다. 여태 큰 싸움 한 번 한 적 없는 잉꼬 부부 사이에서 새처럼 자유로운 딸 희진이 태어났다.
3 계단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서용 씨의 작업실, 왼쪽은 생활 공간이다.

빛바랜 미래, 21세기 둔황 벽화 장식이 거의 배재된 서용 씨의 집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는 것은 중국 고재를 이용해 만든 가구와 정원에 놓인 석상들이다. 반짝거리는 새 가구들은 사람을 긴장시켜서 싫다는 그는 중국에서 고재로 만든 책상, 콘솔, 책장 등을 주문 제작해서 한국으로 싣고 왔다. “오래된 것들은 인위적인 면이 세월에 깎여나갔고, 인위적인 부분이 없으므로 자연에 가까이 다가간 셈이지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변한 옛 벽화가 인간적이고 편안한 그림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골동품에 매력을 느껴서 애호하고 수집하는 것은 바로 오랜 시간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자연의 변화를 더해 인위적으로 모방할 수 없는 자연미를 찾으려는 것 아닐까요.”

사실 작업 재료로서 흙은 좋은 재료가 아니다. 변형도 잘 되고 다루기도 까다롭다. 그런데 둔황에서 공수하는 아주 질 좋은 흙에 직접 쑨 찹쌀 죽을 넣어 반죽한 재료로 만든 그림은 보존성이 좋은 편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질박한 흙 그림은 사람에게 쉴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서용 씨는 자신의 작품이 보는 이에게 ‘쉼표’였으면 좋겠단다.

사실 작가는 작품을 잉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관람객의 반응을 보는 것은 힘겨운 해산을 한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소설이나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며 울어본 적이 있으나 그림을 보고 울어본 적이 한 번도 없던 그가, 자신의 그림을 보고 우는 관람객을 보았을 때 충격이었다. “귀국 전시를 할 때 어느 아주머니가 작품 앞에서 눈이 시뻘겋게 되더니 막 우셨습니다. ‘불심이 강하신가?’하고는 지나갔습니다. 또 회사원 차림의 아가씨가 전시장에서 제 근처를 서성이더군요. 뭔가 할 이야기 있느냐고 했더니, 대답도 없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어요. 당황스러워서 ‘혹시 내가 예전에 사귀었던 사람인가?’싶어 다시 봤는데 아니더군요. 그때 아가씨가 “잘 봤습니다”하더니 돌아서서 갔습니다.” 그는 그런 경험이 잘 납득되지 않았다. ‘왜일까? 작품의 어떤 점에 감동했을까?’를 처음으로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잠정적으로 결론 내리기를, 바로 작품에 담긴 ‘노동’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가 그림에 바친 시간에 대한 경배가 아니었을까 싶다.


5 2층에서 내려다 본 1층 테라스. 산밑에 자리해 여름에도 덥지 않다고

서용 씨의 배움, 인생, 그리고 작업 이야기를 반추하면 그는 마치 기껏 곱게 그린 그림에 큰 붓으로 과감하게 먹칠하기를 반복한 것 같다. 베이징에서 졸업 전시를 성황리에 마친 뒤 편안한 귀국길을 택하는 대신 먼 둔황으로 떠났고, 또 몇 개월 손끝이 저리도록 그린 벽화에 누군가 낙서한 듯 거칠게 덧칠하고 긁어냈다. 예쁜 그림에 만족하며 살아도 꽤 즐거울 것 같은데, 안정된 순간을 스스로 깨버리며 고생스러운 불균형을 찾아 떠난 것이다. 그리 하지 않으면 마음의 기갈을 해소할 수 없으니 고통스러우나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 불균형은 곧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둔황에서의 7년은 그에게 천 년 묵은 벽화의 길을 열어줬고, 과감한 덧칠은 그 벽화가 더 이상 천 년 전에 머물지 않고 현재, 그리고 미래에 살아있게 했으니까.

* 화가 서용 씨의 전시 <돈황의 바람에게 묻다>는 5월 7일부터 27일까지 삼청동 리씨갤러리(02-3210-0467)에서 열립니다.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