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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갑사 영담 스님의 한지 이야기 빛과 바람을 머금은 천 년의 종이
25년을 한결같이 전통 한지의 맥을 이어온 영담 스님은 사람의 손길에 따라 오묘하게 반응하는 한지를 너그러운 허공 같다고 했다. 이 허공에 인간과 자연에 대한 경외와 불가의 이치를 담고 있다. 천 년의 종이, 한지. 그 신비한 매력을 전파하는 이를 만났다.

승복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던 영담 스님이 갑자기 한지 위에 가만히 엎드린다. 그린 모양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부처님이라 한다. 영담 스님의 한지에는 불가의 가르침이 녹아 있다. 산에서 따 온 꽃잎과 나무뿌리로 염료를 만들어 쓰니 향긋한 풀 냄새도 난다. 자연 풍경이 담기고 불가의 이치가 그대로 녹아들어 더욱 고운 빛깔을 내나 보다.

한옥에 앉아 있으면 자연이 느껴진다. 빛과 바람이 통하는 우리 종이 한지로 창과 문을 냈기 때문이다. 햇살을 가득 머금은 한지 창에는 봄날의 아지랑이 같은 닥섬유의 고운 결이 춤을 춘다. 가끔은 봄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가지 실루엣이 수묵담채화를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한지는 자연을 담고 자연과 어울릴 줄 안다. 여기에 보태어 우리 선조들의 생활 속 지혜도 담겨 있다. 한지를 창호지로 쓰면 문을 닫아도 공기가 통하며, 눅눅한 장마철에는 제습제 하나 없어도 방 안이 고슬고슬하다. 한지를 살아 있는 종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북 청도군 운문면 방음리 산골에 아담하게 자리한 보갑사. 사찰 특유의 향내 대신 구수한 종이 냄새가 먼저 느껴진다. 우리나라 최초의 종이 미술관인 ‘영담 한지미술관’. 25년간 변함없이 한지 사랑에 푹 빠진 영담 스님이 재현한 우리 전통 한지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고즈넉한 사찰 마당 한편에 자리한 거대한 철판. 2m 폭을 훌쩍 넘는 크기가 눈길을 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물었더니 한 스님이 철판 밑에 숨어 있는 아궁이에 장작을 지피기 시작한다.
“한지 제작의 마지막 과정에 쓰는 건조대입니다. 보통 한지를 말릴 때는 돌담이나 빨랫줄에 한 장씩 널어 일광건조를 시키는데,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온돌방을 이용하거나 철판에 열을 가해 말리죠. 철판을 이용하면 철분이 종이에 스며들어 마치 자연 소성으로 구운 도자기의 표면처럼 거친 질감이 살아 있는 한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위쪽) 보갑사 천장에 가지런히 줄을 맞춰 걸린 한지 등. 영담 스님이 불심으로 만든 한지로 제작한 것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영담 스님이 모락모락 수증기를 피우며 건조되고 있는 한지에 포도와 한약재로 만든 염료를 흩뿌리기 시작한다. 승복을 바짝 걷어 올린 손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기를 한참, 그곳에는 가부좌를 틀고 앉은 부처님의 모습이 나타났다. 영담 스님은 불가의 가르침이나 종이를 만드는 과정에서 얻는 영감, 그리고 자연을 한지에 담는다. 일명 한지화다. 꽃이나 나무뿌리에서 채취한 자연 염료가 물감이 되고, 앞산을 산책하며 주워 온 낙엽과 진달래꽃이 고스란히 한지에 담긴다. 25년 세월을 한지와 교감했으니 어떤 서예가나 한국화가보다 한지를 잘 이해하고 있다. 그의 작업이 예술가 못지않게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산과 들에서 채취한 온갖 자연 염료로 새 생명이 꿈틀거리는 봄의 이미지를 표현한 ‘청도의 봄’, 하늘빛 한지에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듯한 ‘ 하늘바다’, 황토와 치자 물을 들인 종이로 꽃을 그린 ‘나르바나의 꽃’…. 수행자의 마음이 반영된 듯 스님의 작품은 볼수록 마음이 맑고 선해지며 깊은 감명이 느껴진다.
1천 년을 이어온 아름다운 유산, 한지 ‘빛의 종이, 바람의 종이, 달빛 머금은 숨 쉬는 종이…. 하늘과 땅 그 가
운데 사람에게 이보다 이로운 물건이 또 있을까?’
 
(왼쪽) 25년 세월동안 만들어온 한지 작품을 보관해놓은 창고. 
(오른쪽) 건조대에서 한지를 떼어내고 있는 영담 스님.

영담 스님은 한지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 그와 종이의 인연은 필연적으로 보인다.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스님은 한의사인 아버지 밑에서 한약 싸는 종이를 손으로 직접 만드는 과정을 보면서 자랐다. 소학교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의 환자였던 한 노인이 집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경기도 양평에서 닥종이를 만들던 지장이었다. 그를 따라 전통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고, 종이의 본고장 원주에 가서 종이에 관한 역사와 전통을 두루 공부하게 된다.
“역사를 살펴보면 종이의 질과 맥은 사찰 스님들이 지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원에서 제작하는 종이는 불화나 불경에 쓰기 위한 것인데 스님들이 불심을 다해 직접 만들었기 때문에 품질이나 가치를 어떤 다른 한지에 비할 바 없었죠. 중국에 바쳤던 조공품으로 우리 종이는 비단 못지않은 최고의 대접을 받았고, 나라에서는 사찰마다 과다한 종이 부역을 배당시켰습니다. 종이 부역을 이행하지 않은 스님들이 연행되기 시작했고, 사찰을 등지는 스님들이 늘면서 스님들의 전통 종이 제작이 점차 사라졌던 것이죠.”

1,2 꽃잎을 넣어 만든 창호지와 톡톡한 질감이 살아있는 한지. 
3 영담스님이 가장 애착을 갖는 작품인‘윤회의 추억’. 홍화 꽃잎, 오리나무 열매, 진달래 꽃물, 치자 물을 들여 제작했다.

수행자로서 사찰에 내려오는 전통 문화를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은 영담 스님의 종이사랑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었다. 사찰에서 내려오는 전통 방식을 그대로 이행하는 영담 스님의 한지는 정부에서도 인정한 최고의 한지다. 1989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프랑스 파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직지심경>과 <왕오천축국전>의 영인본 제작을 위해 스님의 한지를 주문했고, 동국대학교에서 <신수화엄경>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영인본을 만들 때도 스님의 손을 빌렸다. 1992년에는 완전히 맥이 끊어진 여덟 가지 전통 한지를 재현하는 데 성공했고, 1995년에는 1백여 가지의 전통 종이 견본을 엮어 <우리 종이 100가지 견본집>을 발간하게 되었다. 이 같은 스님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지난해에는 그가 만든 한지를 전시하는 공간을 마련, 국내 첫 한지 전문 미술관으로 허가를 받았다.
“‘지천년견오백紙千年絹五百’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종이는 1천 년, 비단은 5백년을 간다는 뜻으로 통일신라시대 유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원형 그대로 보존된 것에서 유래된 것이죠. 8세기에 만든 인쇄본이 1천2백여 년의 세월 동안 그대로 보존되어왔다는 것이 믿겨지십니까? 한지는 정말 놀라운 생명력을 지녔습니다. 말 그대로 천년 세월을 숨쉬며 살아온 것이죠. 영담 한지미술관을 통해 선조의 지혜가 담긴 우리 한지의 우수성을 더욱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영담 한지미술관에서는 전통 한지 1백14점과 영인본 52점 등 1천여 점을 만날 수 있다. 3월에는 영담 스님의 두 번째 작품전인 <한지, 저절로(無爲)를 좋아하다 展>이 열리니 한번 들러보자. 부드러우면서도 질기고, 두꺼우면서도 포근한 우리의 닥종이 위에 그려낸 50여 점의 신작을 전시한다. 전통 한지 작품에 대한 설명도 들을 수 있다.
종이를 만드는 이가 아흔아홉 번의 손을 거치고 마지막 종이를 쓰는 이의 손이 한번 더 닿아 모두 1백 번 손이 가서 ‘백지白紙’라 한다고 한다. 그만큼 종이를 만드는 일은 여간 한 정성이 아니면 완성해내기 어려운 작업이라는 뜻이다. 요즘 흔하디흔한 것이 종이지만 영담 한지미술관에서는 얇은 종이 한 장에 담긴 우리 선조의 혼과 정성을 만날 수 있다. 종이를 만들고 종이를 그리는 영담 스님은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네 아름다운 한지를 알리고 싶어 오늘도 승복 소매를 걷어 붙인다. 그의 말간 웃음이 뽀얀 배 속처럼 고운 한지를 닮았다. 문의 영담 한지미술관 054-373-3638


1 문지방에 비친 달을 연상시키는 영담스님의 한지 작품. 그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는 영담 스님.
2 1995년 제작한 <우리 종이 100가지 견본집>. 전통방식으로 제작한 한지의 100가지 견본과 제작 방법을 정리해 놓았다.
3 영담 한지미술관에 전시되어있는 <직지심경>과 <왕오천축국전>의 영인본.
4 천연 염료를 사용해 만든 빛깔 고운 한지.
5 1천 년 역사의 한지 를 만날 수 있는 영담한지미술관 내부.
6 법당에 오르고 있는 영담 스님.

* 영담 한지미술관에서 ‘천년의 사랑 한지’를 구입할 수 있습니다. 영담 스님이 만든 한지를 편지지 사이즈로 제작했습니다. 쳔년의 종이 한지로 천년의 사랑을 전해보세요.

성정아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