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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칭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 감동 리더십의 대가, 국가 경영에 출사표를 던지다
이미지 광고라는 말 자체가 낯설던 시절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라는 광고는 동치미 국물처럼 시원하게 다가왔다. 상품이 아니라 기업의 정신과 공익성을 광고하는 TV CF는 외계인처럼 색다르게 느껴졌다. 광고를 만드는 사람에게 “상품을 많이 팔 수 있는 광고인가요?”가 아니라 “이 광고가 사람들에게 유익한가요?”라고 물었다던 이가 바로 가칭 ‘창조한국당’의 문국현 후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한킴벌리의 대표이사 사장이자 감동 리더십의 대가이며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를 외쳤던 문국현 씨가 국가 경영에 뜻을 실었다. 미디어 입장에서는 좋은 광고주 한 명을 정치계로 빼앗기게 된 셈이다.

좌절 금지, 안 되는 건 없다
문국현 후보와 부인 박수애 여사는 올해로 결혼한 지 29년째다. 두 사람은 결혼한 친구 집에 초대되어 놀러 갔다가 대면하게 되었다. 첫눈에 박 여사에게 반한 문 후보가 말했다. “수애 씨, 밥이 거기에 있네요.” 석 달 뒤, 문 후보가 연락을 시작해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세 번째 데이트를 하던 날 결혼을 결정했다. 문 후보는 청혼을 하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제가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요?” 그러자 박 여사가 말했다. “그럼, 능력이 없으면 물러날 생각이세요?” 겸손한 성품을 드러내는 문 후보와 넉넉한 인품이 느껴지는 박 여사의 대화는 두 사람의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다. 두 사람은 1978년 겨울 결혼식을 올렸다.

문 후보는 지금도 아내를 “수애”라고 부른다. 디자인하우스 곳곳에서 촬영을 하던 문 후보가 박 여사에게 말하는 걸 들었다. “수애, 우리 농촌에 있는 빈집들도 이렇게 꾸며놓으면 좋겠다.” 사진 촬영을 준비하며 “인터뷰와 촬영을 병풍 뒤에서 하고 싶다”는 말로 취재진을 웃겼던 박 여사가 말했다. “데이트를 하던 때 이 양반은 만날 때마다 웃으면서 얘기했어요. 뭐든지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기에 ‘아! 이러면 됐다’라고 생각했어요. 이상하지요?(웃음) 그리고 긍정적이었어요. 안 되는 것도 없었어요. 예를 들어서 길을 가다가 길이 막히면 “길 많아요오. 이리 가도 되고 저리 가도 되고. 가면 돼요” 하는 식이었죠. 지금도 뭐든지 안 되는 게 없어요.”

박 여사의 문 후보 인물평을 들으니 한때 인터넷에서 회자되던 교통 표지판을 패러디한 ‘좌절 금지’ 그림이 떠오른다. ㄹ자 모양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 그림에 교통 표지판의 금지 표시를 합성한 이 그림이 시사하는 것은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무릎을 꿇지 말고 무릎을 꿇더라도 다시 일어서면 된다는 것인데, 문 후보가 그런 사람인가 보다.

(위)차기 대통령은 우리 전통한복을 입고 해외 순방을 떠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촬영한 사진. 문 후보는 예전보다 한복이 개량되어 편리해졌다며 좋아진 점을 설명해주었다.

“자꾸 우리 큰딸 얘기를 하면 이제 시집 못 갈 텐데(웃음). 우리 큰딸이 공부를 못했어요. 대학 진학할 때,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갈 수 없었죠. 수능 시험을 봤는데 기가 막힌 점수를 들고 왔어요. 저는 낙담을 해서 어떻게 하나 속상해했는데 이 양반은 전혀 속상해하지 않는 거예요. 저를 야단칠 수도 있는데 그러지도 않았어요. 사실 저는 그게 너무 고마워요. 그러고는 대형 대학 배치표를 펼쳐놓고 딸이랑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성적에 맞는 학교를 찾는 거예요. 남편은 지방에 있는 어느 대학에 가서 이사장님이나 설립자의 이념까지 다 공부해 와서 아이에게 추천을 하기도 했어요.”

요즘 아빠 덕분에 덩달아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큰딸 지영 씨는 어린 시절 사교육을 받지 않아서인지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정규 교과 과정의 진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스스로 공부하면서 자립할 수 있었던 것은 대학에 입학한 뒤. 지방의 어느 대학에 진학했던 지영 양은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했고 지금은 서울에 있는 다른 대학으로 편입해 공부를 더 했다. 그러나 지영 양이 유명해진 것은 문 후보가 어느 인터뷰 자리에서 ‘큰딸이 비정규직 근로자로 일했던 적이 있다’며 사실을 밝히면서부터였다. 큰 기업의 대표이사 사장의 딸이 비정규직 근로자로 일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경영을 말하는 매니지먼트management의 man은 사람이에요. 사람에 age가 붙은 단어죠. 사람이 노련해지고 원숙해지는 게 경영입니다. 경영은 다양한 사람을 다 이해할 때 성공할 수 있어요. (킴벌리 클라크의 북아시아 경영 협력체 회장으로 일할 때) 최소한 15억 5천만 인구를 상대했는데 그 인구를 다 상대하려면 모든 다양성에 대해 이해해야 해요. 소설이나 시를 접하면 다양한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요.”


(왼쪽)줄곧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살림을 했던 박수애 여사가 자가용을 구입한 것은 3년 전, 관절염을 심하게 앓고 난 뒤 남편이 적극적으로 권유했기 때문이다.
(오른쪽)
문국현 후보가 항상 읽는 책<신의 품 안에서>.그는 카톨릭 신자다.


사회적으로 그 정도 위치에 있는 부친의 딸이라면 당연히 취직 걱정은 하지 않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문 후보 가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문화 파는 사람은 배를 산으로 보낸다

촬영과 1차 인터뷰를 진행한 뒤 문 후보의 자택에서 두 번째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에 대치동 아파트를 찾았다. 세 명의 여인과 한 명의 남자가 사는 50평 아파트는 단출했다. 거실 텔레비전 옆에 고 박래현 선생의 그림들이 놓여 있는 모습이 정갈하게 느껴졌다. 바쁜 일정 소화하기에도 바쁜 문 후보는 일찌감치 출타해 댁에 없었고, 자택에는 박 여사와 큰딸 지영 양, 바빠진 박 여사의 일정을 챙겨주는 막내 동서가 함께 있었다.

문 후보는 부유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생전에 운수업을 하셨던 아버지와 올해 아흔 살인 어머니는 4남 2녀의 자녀들을 온실 속 화초로 키우지 않았다. 여든 살에 돌아가신 부친은 은퇴 후 지역에서 활동했고 말년엔 마을 곳곳에 나무를 심으면서 소일했다고 한다. 주민회장으로 일한 적도 있는데, 그때 부친은 집 근처 3백 평의 모래밭에 잔디를 심고 나무를 가꾸어 마을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근린공원을 조성했다. 그가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캠페인을 시작하게 된 것도 나무 심는 부친의 영향을 받아서일 것이다.

돈암동에 살던 시절, 자녀를 자유롭게 풀어놓았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들에게 한옥 문짝들의 창호지 갈아 붙이는 일을 맡겼다. 10대 시절, 문 후보는 형제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미사리까지 탐험을 떠났다가 태풍을 만나 고생 끝에 빠져나온 적도 있다. 지각 한 번 한 적이 없는 그가 지각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것은 소아마비에 걸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여동생을 고등학교까지 데려다 주고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여동생을 학교에 데려다 주는 것은 집에서 당시 일하는 아가씨가 할 수 있었지만 그의 생각에 여동생과 비슷한 나이의 아가씨가 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 앞에서 또래를 보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 자신이 직접 데려다 주었다는 것이 친구 이기옥 교수(성공회대)의 설명이다. 시부모를 모시며, 주말마다 부모님을 찾아오는 문 후보 부부를 지켜본 막내 계수는 “부드럽고 온화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던 시아버님의 정서와 무엇이든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목표에 다가서는 시어머니의 정신을 고르게 이어받으신 것 같다”고 소개한다.

“어릴 때 문 후보님의 꿈은 무엇이었나요?”
“경영학도, 경영인이었어요.”
문 후보는 인생의 멘토로 유한양행의 설립자 고 유일한 박사를 꼽는다. 취직 시험에 합격한 두 기업(유한양행, 삼성전자) 중에서 유한양행을 선택한 것도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설립자에게 감동받았기 때문이다. 유한킴벌리 사장으로 근무할 때 그는 창조적인 패러다임에 기반한 4조 2교대 방식을 도입해 IMF 외환 위기 때 한 명의 근로자도 해고하지 않았고, 세계적인 기업 킴벌리 클라크의 북아시아 경영 협력체 회장으로 부임한 뒤에는 1년 만에 획기적인 성과를 내도록 변화시켰다. 그의 경영 방식이 주목받은 것은 성과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변화와 발전을 모색한 점에 있는데, 최근 포스코에서도 도입할 것이라고 알려진 4조 2교대 방식도 근로자의 부상을 줄이기 위해 고민하던 중에 고안하게 된 것이다.

“(회사의) 현장에 있는 많은 분이 저 하나 희생한 걸 가지고 희망을 갖게 되니까 그게 기분 좋은 일이었어요. 희망을 갖는다는 건 비록 어려운 시기가 조금 있더라도 참을 수 있는 걸 말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남들한테 뭔가 기다릴 수 있는 인내심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재능 있는 사람들이나 리더들이 희망이 돼야 한다고 봐요. 정치인들이 자기네 이권만 챙기지 않는다면 희망의 샘물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왼쪽)
“ 엄마, 아빠에게는 엄마가 가장 큰 힘이잖아요. 아빠는 여지껏 아빠 일을 알아서 잘해왔으니까 아빠에게 힘이 되어주세요.” 출마를 반대하는 박 여사를 설득한 두 딸은 큰딸의 방을 아빠의 서재로 만들어주었다. (오른쪽) 고 김기창 화백의 부인이자 화가인 고 박래현 선생의 판화 그림이 거실에 걸려 있다.

“어린 시절의 가정교육 가운데 경영에 도움이 된 것은 무엇인가요?”
“무엇이든 아껴 쓰도록 교육을 받은 것이 상생 경영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요.”
“문 후보님께서는 경영에 실패하신 적이 없지요?” “사업으로 보면 여태까지 1백 번 이상 성공했지요.”
“문 후보님께서는 어떻게 실패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실패했으니까요. 고집스러울 때 실패하게 되더군요. 너무 한 방향만 고집하면 변화해야 할 때 변하지 못해요. 그래서 대개는 5년 내지 10년 성장하다가 망하게 됩니다. 신지식과 신기술이 왔는데도 자기의 옛날 경험만 주장하니까요.” 

“어떤 사람들이 경영을 성공적으로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끊임없이 공부하고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을 많이 고용하는 사람이죠.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고용하면 반드시 망해요. 그러니까 ‘내가 제일 잘났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망하게 돼 있고, ‘나는 곳곳에 세계 최고 전문가를 모시고 있고 직원들이 나보다 더 많이 안다’고 하는 사람은 성공해요.”
“대학 재학 시절 시詩를 쓰셨고 지금도 시를 즐겨 읽는다고 들었습니다. 경영과 시는 상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시가 경영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글로벌 기업의 CEO로서 매순간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종종 김용택 시인의 시 ‘섬진강’을 읽으면서 제가 지켜야 할 원칙을 되새깁니다. 그리고 문서는 비록 숫자나 글자로 표현돼 있지만 그 문자 너머에 실존하는 사람들의 온기를 느끼게 되는 것도 시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
“문 후보님은 사람들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는 듯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면 사공 많은 배가 산으로 가는 것처럼, 엉뚱한 데로 가버리지 않을까요?”
“어차피, 문화 파는 사람은 배를 산으로 보내야 돼요.”

이 세상 끝나는 날,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리라
문 후보는 성공적인 기업가이자 경영인이지만 인생에서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서울대 경영학과 진학에 두 번 좌절했고, 결혼 전에는 짝사랑으로 마음앓이를 한 적도 있다. 박 여사가 ‘돈키호테 사랑’이라면서 놀리곤 하는 짝사랑에 대해 그는 “사랑은 일방적으로 안 된다는 것을 경험했다고 할까요?”라고 이야기한다.
“박 여사님께서는 친구들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시나요?”
“인생에 관해 토론해요. 각자 생각은 다르지만 나이 들면서 너그러워진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인생을 뭐라고 정의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글귀가 좋아서 수첩에 적은 게 있어요.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인데 그중에서도 ‘이 세상 끝나는 날 /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리라’라는 대목이 참 좋았어요. 저도 인생을 소풍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중에 소풍 끝나는 날 아름다웠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의 소풍은 어땠나요?” “좋았어요(웃음). 저는 중학교 입학 시험에 실패해서 2차로 중학교에 갔어요. 친구들이 ‘우리가 한 번 고비를 마셨기 때문에 더 깊어졌고, 교만하지 않고 좀 더 겸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런 게 좋아요.”

“아주버님은 바쁜 와중에도 10분, 20분 짬을 내서 어머니를 뵈러 오세요. 제가 시어머니의 입장에서 봤을 때, 아주버님은 아주 저리게 예쁜 아들이에요. 왜냐하면 어머님을 대하는 표정이나 말투나 행동이 너무 다정하거든요. 그리고 돌아가면서 현관에서 인사할 때는 키가 작은 어머니와 눈을 맞추기 위해서 무릎을 구부려요. 무릎을 굽혀 어머니의 두 손을 잡고 ‘어머니, 바빠서 가지만 또 올게요’ 하고 말해요.”-막내 계수


“행복한 가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이 양반이 노력을 많이 해요.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이죠. 자기 생각은 아예 없어요. 아무리 피곤해도 가족이 원하는 걸 생각해서 ‘우리 그거 할까?’ 얘기하고 그걸 해줘요. 딸들과도 친구처럼 지내고요.”
문 후보가 직장 생활을 할 때에는 연간 해외 출장 일수가 1백20일에서 1백50일이나 되었고, 국내에 있다 해도 밤늦게 귀가하는 일이 많았다. 박 여사는 이를 두고 “결혼을 한 건지, 안 한 건지 잘 몰라요(웃음)”라며 농담처럼 말한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신실한 부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를 대하는 자세가 그만큼 헌신적이었다는 말이 아닐는지. 두 사람은 가끔씩이라도 동네 근처를 함께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고 지금도 잠자리에 들기 전이면 “잘 자요”라고 인사 나눈다고 하니 말이다. “나는 수애랑 있을 때가 제일 좋아.” 문 후보는 늘 “잘 자”라는 인사말 뒤에 이 말을 덧붙인다고 한다.

“사람이 희망이라는 주장을 펴시는데 이 말은 무엇을 뜻하나요?”
“제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열정이 모여 세상을 바꾼다는 믿음이 있어요. 사람의 영혼과 머리와 손을 빌리지 않고서 성취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문 후보님이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나라당은 IMF 위기를 만든 당이고, 지금 범여권은 개혁의 시대정신에서 벗어나 신자유주의의 포로가 돼서 실직과 비정규직을 늘리고, 부동산 값을 올려 중산층과 서민을 좌절시킨 세력입니다. 그리고 각종 연고에 얽혀 있어 미래로 나아가는 데 장애가 있습니다. 일자리를 늘리고 비정규직을 줄이고, 부동산 값을 내릴 구체적인 경험과 정책을 갖고 있고, 한반도 평화 체제를 이끌어갈 열정과 비전을 가진 후보는 저 문국현뿐입니다.”

“행복을 무엇이라고 정의하시겠어요?”
“행복이란 자유롭게 꿈꾸고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악수하는 데도 법이 있다고 한다. 당당하게 한 손을 내밀어 마주 잡는 것이 그것이라고 한다. 인터넷에서 문 후보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시민들의 한 손을 두 손으로 마주 잡고 인사를 하는 그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통상의 악수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꼭 쥐고 허리 굽혀 인사하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따뜻함이 느껴졌다. 대통령 후보와 유권자의 만남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보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자신이 마주 잡았던 하나하나의 손길과 손잡던 때의 마음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손길들이 길을 만들었을 것이므로.


김선례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