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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의 도시, 영국 바스Bath 로마 목욕탕에서 태동한 예술 도시
영국 남서부에 있는 자그마한 도시 바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연중 영국 및 다른 유럽 여행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관광 도시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번잡하지 않다. 하늘을 찌르는 고층 건물이나 붐비는 차도 하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로마 유적부터 18세기 조지 왕조 시대의 건축물이 장관을 이루는 세계문화유산의 도시 바스를 다녀왔다.

(왼쪽)
바스 시내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애이번 강River Avon. 풀트니 다리에서 유람선을 타고 잔잔한 여행을 할 수 있다. (오른쪽) 고대 로마부터 중세 및 근대의 흔적이 묘하게 어울린 건축물인 ‘로만 바스’. 이 도시의 상징물이다.

영국 런던 패딩턴 역에서 기차를 타고 1시간 30분 정도 가면 바스에 다다른다. 기차가 시간을 거꾸로 달려온 것일까. 완만한 언덕들에 감싸여 있는 아담한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마치 도시가 통째로 먼 옛날로부터 건너온 듯 고풍스럽다. 영국에서 유일하게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실감할 수 있다. 18세기 조지 왕조 양식의 건축물이 완벽하게 보존된 도시라는 점이 유네스코의 지정 이유다. 한 도시에서 총 5천여 채의 건축물이 유네스코에 등록되어 보존되고 있다니, 이곳의 문화 예술 및 역사적 비중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 덕분에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행객들의 사랑을 받는다. 특이한 점은 바스에서는 호들갑스러운 관광 도시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시민을 위한 평화롭고 깨끗한 소도시라는 인상이 든다. 바스 토박이로 현재 이곳에서 택시를 운전하는 윌리엄 씨의 말도 이를 뒷받침한다. “유네스코의 보호 규정이 까다로워서 이곳 주민들은 자기 집도 함부로 수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불편하지 않아요. 그 자체가 예술인 바스의 건물에 대해 우리는 자부심을 느끼지요.”


(위)15세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바스 대성당

도시 이름이 ‘목욕탕’
바스의 철자는 목욕 혹은 목욕탕을 뜻하는 영어 단어 ‘bath’와 같다. 기원은 로마 시대로 거슬러간다. 1세기에 이곳을 점령한 로마인들은 콸콸 분출하는 천연 온천수에 반했다. 그들은 거대한 공중 목욕탕을 축조하고는 이어서 지혜의 여신인 미네르바를 기리기 위한 사원도 건축했다. 로마인들의 공중 목욕탕 터가 바로 현재 바스 중심지에 있는 ‘로만 바스Roman Bath’다. 그러니 로만 바스는 이 도시의 내력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명소다. “고대 로마에 한국의 온돌과 비슷한 난방 장치인 ‘하이퍼코스트hypocaust’가 있었습니다. 따뜻한 물이 솟는 곳에 돌을 놓아 난방을 했고, 몸을 물에 불린 뒤에는 이 따뜻한 돌로 때를 밀었습니다.” 서양 고대 역사를 전공한 뒤 현재 이곳에서 관광객 안내 업무를 맡고 있는 필립 하퍼 씨는 한국에서 잠시 살았던 경험에 비추어 로만 바스의 이색적인 풍속을 설명했다. 당시 ‘웰빙’ 문화의 중심지로 한껏 번창했지만, 로마가 멸망하면서 파괴되었고 결국 매장되고 말았다. 12세기에 새롭게 온천 시설이 들어서며 사람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졌지만, 로마 시대 못지않게 휴양지의 중심지가 되기 시작한 때는 18세기 초반이다. 앤 여왕이 이곳을 자주 방문하자 단박에 세간의 이목이 몰렸다. 요즘 못지않게 당시에도 유명인이 다녀갔다는 사실은 그곳 명성의 척도가 되었나 보다.



1 18세기 조지 왕조 양식으로 빚어진 아름다운 건축물 로열 크레센트. 현재는 할리우드 영화배우부터 유럽 부호까지 거주하는 고급 빌라 및 호텔로 사용된다. 2 애이번 강가는 주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산책 코스다. 3눈부시게 밝았던 라임스톤이 이제 오랜 세월의 흔적을 입고 섰다. 4 로만 바스에 남겨진 로마인의 흔적.

로만 바스의 새로운 전성기는 이 도시가 가장 화려하게 빛났던 시기와 궤를 같이한다. 18세기 후반, 도시 디자인의 청사진을 제시한 인물인 존 우드John Wood는 로만 바스를 재건하는 데도 공들였다. 이때부터 19세기까지 1백 년 넘게 상류층에게 가장 각광받는 휴양지였다. 요즘식으로 생각하면 당대의 가장 고급스럽고 물 좋은 야외 스파 시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첨단 유행이 흐르고 기술 및 자본이 집중되면서 시설은 점차 업그레이드되었다. 훗날 건물이 확장되어 가운을 갈아입거나 옷을 세탁할 수 있는 방도 생겼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여행 온 캐롤라인 씨의 단상이 재미있다. “로만 바스를 찬찬히 들여다보세요. 하나의 건축물에 고대부터 중세, 근세, 현대에 걸쳐 축조한 흔적이 모두 담겨 있어요. 각 시대별로 변화하는 양식을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지요. 유행이 돌고 돌다가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다시 로마 스타일에 심취해 이처럼 2층 테라스에 로마 영웅의 조각상을 세웠잖아요.” 어쩌면 1백 년쯤 뒤에는 현재 모습과 많이 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조지 왕조 양식의 교본 같은 건축물
시티 투어 버스의 안내 방송을 듣든, 가이드의 설명을 듣든 이 도시의 트레이드마크인 조지 왕조 양식의 건축물을 논할 때 꼭 세 명의 남자가 언급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남자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한 사업가이자 우체국장인 랠프 앨런과 그가 후원한 건축가 존 우드다. 도시 계획에 관심이 많았던 앨런의 든든한 후원을 받은 존 우드는 조지 왕조 양식으로 도시 전체를 조화롭게 디자인하기로 나선다. 앨런이 소유한 바스의 채석장에서 나는 라임스톤(석회암의 일종)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 매력을 십분 살린 건축을 구상했다.

후대 사람들이 ‘바스’ 하면 빛바랜 상아색 도시를 떠올리게 된 것은 그들의 공이 크다. 존 우드는 자신이 설계한 도시가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타계했고, 아들 존 우드 2세가 그의 뒤를 이어 도시 건축을 완성했다. 이후 존 우드 2세는 굵직굵직한 건축물을 여럿 디자인해 요즘도 영국 건축사의 르네상스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독특한 외형으로 주목받는 건축물 로열 크레센트Royal Crescent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이 이름은 모양이 완전히 같은 집 30채가 180m 길이의 거대한 초승달crescent 형태로 이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란다. 이는 조지 왕조 양식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건축물이기도 하다. 조지 왕조 양식은 18세기 조지 왕조 시대에 랠프 앨런 같은 신흥 부유층이 부상하면서 유행한 건축 스타일이다. 이들은 당시 궁정 문화에 거부감을 가지고 16세기 이탈리아 건축가인 팔라디오A.Palladio의 건축 철학을 지지했기 때문에 조지 왕조 양식은 팔라디오 양식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부를 과시하기 위해 로마 양식의 기둥을 거대하게 세우고 완벽한 좌우 대칭 구조로 건물의 품위를 강조했다. 내부는 은은한 파스텔 색조로 우아하게 꾸몄고, 금색 잎사귀 문양으로 화려함을 더하기도 했다.



1 1680년에 문을 연 레스토랑 ‘샐리 런스’. 샐리 런스가 창안한 포근포근하고 둥근 빵은 현재까지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샐리가 쓰던 화덕이 그대로 보존된 박물관도 구경할 수 있다. 이 빵에 신선한 버터를 바르거나 고소한 연어를 얹어 먹으면 한 끼 식사로 든든하다. 2 이곳의 주택은 대체로 완벽한 대칭 구조를 보이는데, 이는 조지 왕조 양식 건축물의 특징이다.

당시 로열 크레센트에 귀족층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배경을 이해하려면 세 번째 남자인 리처드 내시를 짚어봐야 한다. 도박으로 성공한 그는 바스의 의전 장관으로 등극하며 사교계의 이목을 끌었다. ‘바스의 왕’으로 불리며 바스의 사교계를 유례없이 흥미진진하게 부흥시켰다. 이 부흥기에 로열 크레센트는 소위 잘나가는 귀족들의 타운 하우스로 요긴하게 쓰였던 것이다. 근교에 사는 귀족들은 휴가 동안 이곳을 빌려서 나이 찬 딸들을 사교계에 데뷔시키기도 했다. 지금은 호텔 및 고급 아파트로 사용된다. 이 밖에도 바스 시내의 원형 광장 서커스나 퀸스퀘어는 조지 왕조 양식의 교본을 그대로 따라 축조된 건축물의 예다.

바스 여행 정보
바스로 가는 방법 런던 ‘패딩턴 역’에서 ‘바스 스파 역’으로 가는 고속열차를 타자. 1시간 30분 만에 바스에 도착한다. 바스에서의 교통편 바스 관광 사무소에서는 바스의 진미를 맛보려면 천천히 걸어 다니라고 권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바스 대사원 앞에서 출발하는 시티 투어 버스를 타고 바스의 명소를 일단 한 번에 둘러보는 것도 좋다. 한 번 티켓을 끊으면 24시간 동안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내렸다가 탈 수 있어서 유용하다. 시내 중심가를 순회하는 노선과 근교를 돌아보는 ‘스카이라인 노선’ 두 가지가 있다. 숙소 2백 년 넘은 역사를 자랑하는 고풍스러운 호텔부터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호텔 및 저렴한 게스트하우스까지 다양하다. 가격은 성수기를 기준으로 게스트하우스가 50~60파운드, 호텔이 80~300파운드 정도. 시내를 벗어나면 전원풍의 오두막집도 있다. 숙소를 예약하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바스 관광 사무소 홈페이지(www.visitbath.co.uk)를 이용하는 것이다. 식사 영국의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영국 전통 음식점보다는 유럽 각국의 음식점이 많다. 바스의 오랜 역사를 느끼고 싶다면 로만 바스 근처의 ‘샐리 런스 하우스Sally Lunn’s House’(www.sallylunns.co.uk)를 찾아가 볼 것. 둥근 모양의 포근포근한 빵인 ‘샐리 런’을 처음 개발한 곳으로, 3백여 년 전 샐리가 쓰던 화덕을 내부의 박물관에서 공개하고 있다. 빵에 각종 잼이나 연어, 샐러드 등을 얹어서 먹는 메뉴가 대표적이다.
문의 바스 관광 사무소 www.visitbath.co.uk


3 월콧 거리에 있는 ‘모추어리 채플Mortuary Chapel’은 현재 갤러리로 쓰인다. 4 상점 앞에서 부모님을 기다리는 교복 입은 소녀. 5 1936년 세워진 ‘리틀 씨어터&시네마’. 6 월콧 거리에 있는 화가 닉 커드워스Nick Cudworth의 작업실 겸 갤러리. 7 첨단 스파 시설인 ‘서미 바스 스파Thermae Bath Spa’의 옥상에 있는 야외 온천에서 바라본 바스의 오래된 풍경.

과거와 현재의 이어달리기
바스는 건축물뿐 아니라 불규칙하게 깨뜨린 돌을 촘촘히 깐 보도에서조차 고풍스러운 냄새가 나는 동네지만 동시에 모던하고 신선한 활력을 품은 도시이기도 하다. 인구 8만 명의 아담한 도시 안에 대학교가 세 개나 있어 젊은이들의 경쾌한 발걸음이 자주 눈에 띈다. 15세기에 지은 고딕 양식의 ‘바스 대성당Bath Abbey’ 앞 광장은 나이 지긋한 유럽 관광객들과 치기 어린 전위예술을 선보이는 젊은 화가나 음악가의 묘한 조화가 돋보인다. 게다가 ‘월콧&브로드 거리’에 가면 좁은 골목마다 전통과 현재가 함께 생동하는 갤러리, 아트 숍 및 작가의 공방을 찾을 수 있다. 로만 바스의 영화와 명성은 작년에 새롭게 개장한 현대적인 스파 시설인 ‘서미 바스 스파Thermae Bath Spa’가 잇고 있다. 새것의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복도를 지나면 17세기 흔적을 그대로 보존한 높은 기둥과 색 바랜 천장이 나온다.

모던한 감각과 고풍스러운 디자인이 절묘하게 결합된 건축물이다. 영국에서 유일하게 천연 유황 온천수가 나오는 곳이기에 유럽뿐 아니라 영국 내에서도 휴양을 즐기러 찾는 이들이 많다. 새롭게 문을 열면서 개시한 50여 가지의 마사지 및 각종 테라피도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인기다. 우리나라 스파 시설이 가족 단위의 활기찬 위락 시설 분위기라면, 이곳은 우아하고 심플한 풀장에 몸을 담그고 잔잔히 흐르는 온천수에서 각자 명상하듯 유영하는 분위기다. 고요한 휴식의 절정은 옥상에 있는 야외 온천탕에서 맛볼 수 있다. 기분 좋게 따뜻한 온천수에 몸을 담근 채 멀리 푸른 언덕에 촘촘히 박힌 라임색 고건축이 이루는 장관을 감상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나도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