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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뤼미에르 서울의 사진 찬가
사진 전문 화랑으로 대중에게 사진예술의 아름다움을 전파하는 갤러리 뤼미에르가 구세군회관 뒷길 주택가에 두 번째 둥지를 틀었다. 돈이 되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숨기지 않는 상업 화랑으로서의 솔직함, 그 작품의 실제 가치를 드러내주는 정직함은 공간을 풀어낸 방법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1 주택가에 둥지를 튼 갤러리 뤼미에르 서울. 건축가 구만재 씨는 양옥집을 레노베이션해 단정한 박공지붕의 갤러리로 만들었다. 
2 천장을 뜯어내 노출시키고 최소한의 벽만 헐어낸 다음 조각조각 나눠진 벽에 솜씨 좋게 작품을 걸었다. 왼쪽 거울에 비친 작품은 사진과 회화를 조합하는 작가 레타 피어Leta Peer의 작품.
3 박공형 노출 천장은 집과 갤러리가 한곳에 모인 듯한 느낌을 만드는 일등공신. 전시된 작품은 독일의 차세대 사진작가로 주목받는 요셉 슐츠의 작품. 

“개인적인 취향으로 치자면, 아라키 노부요시나 신디 셔먼보다는 마이클 케냐가 더 훌륭하다. 아라키의 과격한 에로티시즘은 이제 더 이상 쇼킹하지 않으며, 신디 셔먼의 셀프 포트레이트와 구성 사진은 살짝 지겨울 정도가 됐다”라고 섣부르게라도 사진 취향을 말할 수 있게 된 건 다행이다. 미술 동네에서 서자 취급을 받던 사진이 그만큼 제 힘을 얻었다는 뜻이니까. 덧없는 사라짐에서 존재를 구원하는 사진, 이 표현예술은 이제 서자의 신분을 벗고 왕위로 등극할 태세다. 한국에도 그 광풍이 몰아닥쳐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을 엘튼 존이 구입했다느니, 유명 컬렉터 모 씨가 소장한 어빙 펜의 작품이 두 달 동안 5천만 원이 뛰었다느니 하는 소문이 옆집의 밥그릇 소리만큼 친숙해졌다. 불꽃 튀는 위엄의 순간을 찰나에 담아내는, 예술로서의 사진, 그 매력을 대중에게 전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치켜세우고 싶은 갤러리 뤼미에르가 서대문 구세군회관 근처에 또 하나의 공간 ‘갤러리 뤼미에르 서울’을 개관했다. 2004년 트렌드 메카 청담동에 한국 최초의 사진 화랑을 연 갤러리 뤼미에르의 두 번째 자식인 것이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갔지만 이 동네 골목만큼은 2층 양옥집이 많이 남아 있고 궁서체 간판을 매단 복덕방도 보이고 미술관, 소규모 박물관, 출판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갈라진 콘크리트 담에도 시심이 깃들어 있는 듯한 이 동네에 갤러리 뤼미에르가 들어선다는 소식은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다. 언제부터인가 ‘갤러리 뤼미에르=청담동’이라는 편견 가득한 정의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어도 될 것 같다. 그동안 갤러리 뤼미에르가 연 사진전 중 우리 뇌리에 더 강하게 남는 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전시 도중 작가가 타계해 마지막 개인전이 되면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마이클 케냐, 윌리 호니, 티나 모도티처럼 세계 명작으로 추앙받는 이들의 클래식한 작품들이므로. 아니다. 시간을 기록하는 사진예술은 그 자체로 클래식한 예술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1초 전의 순간도 결국은 과거일 뿐이므로, 이 과거의 훈기 가득한 동네와 갤러리 뤼미에르가 너무 동떨어져 보이진 않는다.


1 갤러리 1층. 주택의 방을 나누었던 벽의 흔적이 보인다. 그 사이에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보이는데, 이것도 예전 집의 계단을 조금만 손본 것.
2 원래 있던 계단의 난간을 없애고 간결하게 정리한 다음 오래된 나무 계단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계단을 하나하나 손으로 사포질했다. 위쪽은 계단의 곡선과 너무 잘 어울리는 요셉 슐츠의 ‘다리’ 사진. 
3 갤러리에 들른 관람객들이 잠시 차를 마시며 쉴 수 있는 데크.
4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 전문 화랑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갤러리 뤼미에르의 최미리 관장.

고즈넉한 주택가 한가운데 연와조(밤색 벽돌)로 된 가정집이 하나 있었다. 갤러리 뤼미에르의 최미리 관장과 건축가 구만재 씨(르 씨지엠, 02-583-7024)는 강북의 여러 동네를 헤매고 다니다 이 아담한 골목길에, 그리고 이 낡은 집에 마음을 뺏겼다. “사실 시작은 쉬운 거였어요. 무얼 보태는 게 아니라 정리를 좀 잘해서 진짜 집 같은 집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사진이 사는 집. 그리고 이 갤러리가 상업 화랑이니까 너무 드러나지 않는 쇼룸 같은 공간이면 좋겠다 싶었죠. 그런데 둘러보니 허물 수 있는 기둥이나 벽이 많지 않았어요. 백 점짜리 갤러리는 그림을 걸 벽이 많아야 한다고, 벽으로 조각조각 나눠진 이 집이 오히려 갤러리로 더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을 바꿨지요.” 구만재 씨는 처마를 길게 매단 가정집을 ‘좀 잘 정리해’ 박공지붕의 레고 퍼즐 조각 같은 집을 만들어냈다. 그 단순한 박공지붕 옆으로는 폴리카보네이트(강화플라스틱의 일종) 덮개를 덮은 꼬마 박공지붕을 하나 더 만들었다. 그 안은 갤러리 카페로 쓰일 것이다. 레노베이션의 특혜이기도 한 세월이 느껴지는 천장, 벽 마감을 그대로 살리면서 건물을 ‘좀 잘 정리해’ 갔다. 무엇보다 건축주의 반응이 더 재미났다. 고리대금업자의 퇴락한 별장으로 보이던 그 집이 이렇게 바뀔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달라지는 걸 보면서 감회는 더 그윽해졌고 감탄은 더 뜨거워졌다. 구만재 씨는 집을 다 다듬고 나서 마지막으로 회색 시멘트로 얕은 담장을 둘렀다. “한 걸음만 나가면 동네 골목길이거든요. 그런데 모두 높은 담을 만들고 자기 집 안의 조경만 그럴듯하게 꾸미고 살더라고요. 이 집만큼은 최대한 골목길과 뚫려 있게 해주고 싶어서 담의 키를 낮췄어요. 갤러리니까 그럴 수 있다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엄격할 정도로 미끈해 보이는 담이지만 저 담벼락 속 얕은 깊이에 쇠그물 같은 게 묻혀 있으니까 눈비 맞고 바람에 씻겨 녹슬면 훨씬 훈기 있는 모습이 될 거예요. 집을 지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집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잖아요. 동네 분위기에 비해 좀 미끈한 게 아닌가 생각되는 이 집도 시간이 흐르면 이 동네, 이 자리랑 어우러질 거예요. 그런 장치만 조금씩 해줬지, 뭐 별로 한 것 없어요.” 대국인의 후예처럼 생긴 구만재 씨가 콩 튀기는 속도로 말을 이어갔다.

청담동 갤러리 뤼미에르가 지닌 철학처럼 갤러리 뤼미에르 서울은 철저한 상업 화랑을 지향한다. 돈이 되는 작품에 대한 대화를 숨기지 않는 솔직함, 그 작품의 실제 가치를 드러내주는 정직함은 공간 여기저기에서 만날 수 있다. 갤러리 뤼미에르 서울은 모두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엔 전시장과 카페가, 2층엔 전시장, 3층엔 흑백사진 컬렉터를 위한 전용 갤러리가 들어서 있다. 2층 계단에 붙은 요셉 슐츠Josef Schulz의 ‘다리’ 사진을 지나 오른쪽으로 다섯 발자국만 걸으면 최미리 관장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 나타난다. 현대 사진계의 거장 어빙 펜의 꽃 사진이 걸려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컬렉터를 위해 그가 특별히 배려한 비책이 숨어 있는 공간이라 그렇다. 한 귀퉁이에 매달린 기계 장치가 눈에 띄는데 이건 바로 컬렉터가 보고 싶어 하는 작품을 지하 수장고에서 끌어 올려 제대로 갖춰진 조명 아래 감상하게 하는 리프트 장치다. 구만재 씨는 리프트에 거대한 액자 프레임을 만들어 수장고에서 갓 길어 올린 작품을 마치 액자에 넣고 감상하는 듯한 감흥을 느끼게 했다. 최미리 관장은 이 재치 넘치는 건축가에게 “구만재가 아니라 천재네요”라는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요즘 모마에서 열리는 전시 10개 중 8개가 사진 전시예요. 직관과 안목이 있다면 사진 컬렉션 시장은 장점이 너무 많아요. 여러 에디션이 있기 때문에 가격이 정직하게 매겨져 있죠. 대중에 대한 흡인력·호소력이 어떤 장르보다 대단하기도 하죠. 갤러리스트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은 훌륭한 작가를 발굴해서 컬렉터에게 소개하는 일, 컬렉터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일, 관계를 열어주는 일인 것 같아요.” 컬렉션 가치로서의 사진예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최미리 관장은 그 어느 때보다 달뜬 어조다.

지난해 갤러리 뤼미에르는 차세대 젊은 작가들의 작품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뤼미에르 국제사진상LIPA’을 열었다. 수상자인 ‘윤 리’ 씨(토마스 루프의 추천으로 후보에 올라 결국 상을 받게 됐는데, 그 대상자가 우연하게도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이었다)는 인스부르크의 호프버그 왕궁에서 갤러리 뤼미에르의 단체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시상만 하고 끝나는 행사는 젊은 작가에게 또 하나의 벽을 만들어주는 것밖에 안 돼요. 페어에 들고 나가기도 하고 해외 전시를 기획하기도 하면서 젊은 작가가 활동할 수 있는 맥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성공한 갤러리스트 최미리 관장의 포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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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가 구만재 씨는 작품이 걸리지 않는 입구 부분에 유선형의 붉은 벽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작품 감상에 방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이 공간만의 아이덴티티를 살리려고 한 것. 
3 2층의 작은 코너로 들어가면 비밀의 공간이 나온다. 바로 컬렉터가 보고 싶어 하는 작품을 지하 수장고에서 리프트로 끌어 올려 제대로 된 조명 아래서 감상하게 하는 공간이다.

신경증을 유발하는 신디 셔먼의 비주얼이든 심심한 맹물 같은 마이클 케나의 풍경 사진이든 이제 사진은 컬렉터에게, 감상자에게 살가운 대상이 됐다. 인화지 속에 ‘꿈의 공간’을 창조하는 한국의 실력파 사진작가들도 이제 기업의 연감 따위를 찍는 아르바이트에 창조의 에너지를 빼앗기거나, 웨딩 촬영 기사로 뛰어다니는 일은 그만 해도 될 날이 곧 올지도 모른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영광 속 잠재적 주인공은 바로 당신, 독자들이다. 사진만큼 접근도가 쉬운 예술은 없을 테니. 그렇다면 고즈넉한 동네 골목길 걸어 올라가 사진 구경 한번 하고, 끓어오르는 창작욕을 똑딱이 디카로 표현해보는 건 어떨까. 아니면 보다 적극적인 감상자가 되기 위한 방법으로 투자가의 길을 모색하는 건 어떨까.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