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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배우들의 아버지, 연기자 이순재 씨
텔레비전 드라마나 연극, 영화를 하나의 꽃나무에 비유한다면 연기자는 그 나무에 피는 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작품일수록 탐스러운 꽃들이 많이 핀다. 조·주연 가릴 것 없이 자신이 피어나야 할 자리에서 마땅하게 망울을 터뜨리기 때문이다. 그 어떤 연기자보다 푸릇푸릇하게 빛나는 이순재 선생은 자신이 피어야 할 자리를 아는 겸손한 연기자다. 큰 꽃일 때도 작은 꽃일 때도, 만개한 꽃일 때도 망울진 꽃일 때도 조건이나 위치에 어울리는 꽃을 피우기 위해 노력한다. 원숙한 관록을 자랑하는 지금도! 여태 이처럼 아름다운 꽃을 본 일이 없다.
야동순재 씨, 감동의 정치인 영조 임금이 되다
한강시민공원에서 촬영을 하던 때는 마침 토요일. 휴지를 줍는 사회봉사 활동을 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여고생 무리가 촬영 현장을 지나가다가 이순재 선생을 보고는 “꺄악!”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순재닷!” 하고 달려오는 소녀들도 있었다. 초등학생들은 ‘야동순재’라며 폰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아이돌 스타의 등장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그런 여고생들에게 물었다. “이순재 선생님을 왜 좋아해요?” 쑥스러워하며 여학생이 대답했다. “연기를 잘하시잖아요.(웃음)” 소녀들의 얼굴은 참 행복해 보였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출연진 가운데 가장 거침없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생각한 적이 있다. 잘 모르겠지만 이순재 선생이 아닐까 하고 짐작했다. 후배 연기자들에게 약이 되는 쓴소리를 말하고, 사회 현안을 비롯한 예민한 사안들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말하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자기 자신에게 자신 있고 당당할 때에만 거침없이 하이킥을 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실제로도 거침없는 듯 보인다.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회주의 국가의 원수였던 덩샤오핑이나 호치민을 존경하는 인물로 꼽고, 진지하면서도 농 섞인 말씀도 잘한다. 겸손하고 편안하고 자유로운 기상이 느껴진다.

그는 <거침없이 하이킥>을 마치고 2주 가량 쉰 뒤 신작 <이산> 작업에 들어갔다. <허준> <대장금> 등 명품 사극을 만들었던 이병훈 PD가 연출하는 이 드라마는 조선 왕조 부흥기를 이루었던 성군 정조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린 사극. <이산>에서 그는 정조의 할아버지이자 사도세자의 아버지인 영조 임금을 연기한다.
“‘야동순재’ 이후 요즘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을 일컬어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동안 텔레비전 드라마가 잠재력이 풍부한 중견보다는 젊은 사람 중심으로 만들어지다 보니까 나이 먹은 연기자들이 자기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잖아. 그래서 ‘떴다 떴다’ 하면서 새로운 발견이라고 말하는 모양인데, 그건 아냐. 앞으로 점점 중견 연기자들의 진가가 작품을 통해 더 표출될 거야. 그게 바람직한 거고.”

“50년 이상 연기 활동을 해오시는 동안 늘 정상에 계실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우리가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는 수익적 개념이 없었거든. 돈 벌기 위해서, 또는 유명해지려고 연기를 시작한 것이 아니야. 우리 때만 해도 연기자는 웬만한 가정의 99%는 반대하는 직종이었어. 그런데도 불구하고 집안의 반대를 뚫고 연기를 시작해서 오늘에 이른 것은 작업에 대한 어떤 목적과 의미, 가치관이 있어서지. 우리는 연기 행위를 예술에 대한 욕구에서 시작한 거야. 그 정신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연기는 예술이다, 나는 예술가다, 그런 긍지를 가지고 시작했어.”
그는 말을 할 때 ‘우리’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나’라는 말을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 때(세대), 우리 동네, 우리 고등학교, 우리 연기자 등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렇다.(그러나 한 가지, 국회의원 활동을 하던 시절 이야기를 할 때는 ‘우리 국회의원’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나를 생각하기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하는 그의 화법에서 한민족의 따뜻한 정서가 느껴진다. ‘나’보다 ‘우리’를 생각하는 그의 철학에 ‘우리론論’이라는 말을 붙여주고 싶다.

“지금까지 연기를 하시면서 그만두고 싶은 때도 있었나요?”
“물론 생활의 조건이나 수익의 조건으로 인해 어려운 때는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힘들지는 않았어. 다만 후반으로 오면서 우리의 가치관이 훼손되었을 때에는 절망을 느낀 적이 있었지. 평생 동안 연기를 예술이라고 생각하고 정진해왔거든.”
“말씀하시면서 ‘조건’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시는데 조건이 중요한가 봐요?”
“조건은 만들어가는 것이니까. 조건에는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지. 객관적 조건은 어떤 기준으로 제시되는 것이고, 주관적인 조건은 스스로 만드는 거지. 객관적인 조건과 주관적인 조건은 맞을 수도 있고 상충할 수도 있는데 대부분 비슷하게 맞아서 가는 것 같아.”
“최선의 조건은 어떻게 만들어가시나요?”
“노력밖에 없어. 그리고 자기 자신을 빨리 알아야 돼. 내 한계가 아니라 내 역량이 어디라는 걸 알아야 그걸 보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강도나 기간이 나오는 거지. 그런데 자기 자신을 모르면 노력의 조건이 생기지 않아.”


젊은 스타의 드라마 출연료가 천정부지로 치솟던 때가 있었다. 요즘에는 그 거품을 잠재우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지만 당시엔 젊은 스타들이 드라마의 성공을 좌우하는 것처럼 보였다. TV 드라마가 처음 시작될 때 활동을 시작해 기반을 조성한 중견 연기자와 원로 연기자들의 설 자리가 없었다. 그 시절, 연기는 예술이 아니라 오로지 수익 창출만을 목적으로 하는 상품이었다.
그는 대학교 3학년 때 서울대연극회 활동을 하며 연기를 시작했다. 아마추어지만 작품을 이해하고 인물을 분석하고 종합해서 체화하는 과정을 부단히 반복했다. 국어사전을 옆에 끼고 발음 연습을 했다.
“신작 <이산>에서 맡게 되는 영조 임금의 캐릭터를 다각적으로 분석하시는 말씀을 듣고 완벽주의자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아니, 완벽해도 완벽주의자가 되면 완벽할 수가 없지. 어떻게 인간이 완벽할 수 있어. 항상 비고 모자라지. 그러니 조금이라도 완벽하게, 조금이라도 인물에 근접하게, 조금이라도 심층적으로, 조금이라도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고민하는 거지.”
“연기를 잘하시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잘하는 게 아니라 사명감이니까. 내가 이걸로 먹고살고, 이걸로 내 모든 것을 대변하는데 소홀히 할 수 없지. 그렇다고 내가 천재적인 만능인도 아닌 거고. 계속해서 그 역할에 접근해가려고 노력하는 거지.”
“<이산>에서 조선 후기의 부흥을 이루었던 영조 임금 역할을 맡으셨습니다. 오늘의 우리가 그분에게 배울 덕목은 무엇일까요?”

“우선 국민을 감동시켜야 하는 것이겠지. 정치라는 건 국민을 감동시켜야 되거든. 개별적으로 특출한 재능을 가진 개인들의 에너지를 결속할 수 있는 통합과 화합의 정치를 펼쳐야 돼. 영조 임금은 그런 노력을 했어.”
“서울 중랑구에서 14대 국회의원(1992~1996년)으로 활동하셨지요?”
“외도라면 외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실 자의는 아니었어. 타의가 많았지. 나는 국회의원 활동을 하는 동안 서민들과 만나면서 인간에 대한 차별 의식을 극복했어. 연기자라는 게 대중에게 박수를 받는 직종이고 또 잘하면 대중이 따르는 직종이라 우월 의식이 생길 가능성이 있거든. 그런데 국회의원 경험을 통해 언제든지 다른 사람들과 동화될 수 있는 마음을 가졌고 그게 몸에 뱄어. 그런 것이 그네들에게 진심으로 통용이 되어서 당선될 수 있었겠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과 잘 동화할 수 있나요?”

“나를 낮추면 돼. 상대 인격체에 대한 평등성과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인정하면 가능해.”
국회의원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가 말하는 ‘우리론’의 실체를 알게 된다. 선거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경쟁 후보들의 사무실에 들러 차를 마시며 “선거 끝나고 점심 한번 먹자”고 먼저 다가가 이야기를 하고, 재래시장을 돌며 성심성의껏 상인들과 악수를 했다. 생선 썰던 손도 반갑게 잡았다. 돈이 선거 당락에 중요한 변수가 되었던 시절이었지만 ‘우리 연기자들의 얼굴’을 생각해 불법 선거운동을 하지 않았다. ‘검은 유혹’이 찾아오거나 마음이 흔들릴 때면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우리 동문들’을 생각했다. 국회의원 활동을 마친 뒤 같은 지역구에 입후보해 경쟁했던 이상수(현 노동부장관) 씨가 ‘좋은 라이벌이었던’ 그에게 후원회 회장을 제안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그는 의정 활동을 접은 이후 ‘우리 중랑구’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데 요즘엔 사회복지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는 중이다.

“최선을 다하면 밥은 굶지 않겠지, 최선을 다하거라”
서울대 철학과 재학 시절 자유롭고 항상 새로울 수 있다는 점에 끌려 연기 세계와 접속한 그는 국회의원 활동을 하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연기에만 매달렸다. 그의 의정 활동으로 연기자들에 대한 국민 의식이 향상된 것을 생각하면 그 부분 또한 연기자 활동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50여 년간 무수한 인물을 분석하고 이해했으니 인간 전문가가 따로 없을 것이다.
“연기를 하면서 느끼는 기쁨은 무엇인가요?”
“역할을 창조하는 거지. 우리 일이라는 게 대중에게 자신을 보여주는 거라 자기도취나 자가당착에 빠지기 쉽거든. 그런데 그게 엄청난 함정이야. 스스로가 자기 약점과 부족한 점을 항상 판단하고 그걸 보완하려는 노력을 해야 해. 연기에는 끝이 없어. 더 도전할 것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하겠어.”
“지금도 연기 실력 향상을 위해 노력하신다고요?”
“그럼. 우리는 지금도 창조 의욕이 넘치지. 항상 새 작품이 오면 흥분해. 이걸 어떻게 만들 것인가, 나는 또 무얼 보여줄 것인가, 어떻게 새롭게 해석할 것인가 하며 흥분하는 것이 사는 보람이고, 살아가는 생명력이라고.”
“서울대 출신이라는 점이 연기 활동에 장애가 된 적은 없는지요?“
“우리 직종이 그걸 필요로 하지 않아. 다만 작품 해석력이나 책을 심층적으로 볼 수 있는 인내력은 교육과정을 통해서 좀 익혔지. 대학 졸업 때 주임 교수님이 ‘자네들이 철학을 전공했다고 해서 철학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동안 책을 읽는 인내력을 길렀다고 생각하면 된다. 철학은 이제부터 시작하는 거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명언이지. 4학년 때 연극 합숙 연습 때문에 수업을 두 차례 빠져야 해서 말씀드렸더니 ‘그래, 연극도 잘하면 철학이야’라고 말씀하셨던 그 주임교수님이 고건 전 총리의 부친인 고 고형곤 박사님이셔.”

“선생님 인생에 영향을 끼친 분은 누구인지요?”
“내가 이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아버지 덕분이지. 대단한 분은 아니지만 아들을 대학 공부까지 시켰으니 (연기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셨어. 그런데 내가 본격적으로 연극을 시작했을 때 아버지가 찾아오셨더라고. 대전에서 비료 공장을 하셨는데 오셔서 형편없는 내 꼴을 보시고는 ‘꼭 해야 되겠냐?’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이제는 다른 방법도 없고 군대도 다녀왔으니 한번 해 보겠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래, 어느 분야에서든지 최선을 다하면 밥은 먹지 않겠는가, 최선을 다하거라’ 하시면서 용돈을 주시고 가셨어. 그게 계기야. 그래서 다음부터 전력투구를 하기 시작했고 공연할 때마다 프로그램하고 차표를 집으로 보내드렸어. 그러면 아버지께서 올라오셔서 구경하고 가시는데 속셈은 용돈 좀 주고 가시라는 거지(웃음).”

“어떤 분을 존경하시나요?”
“글쎄, 특별히 없어. 우리 사회의 어느 분야에서건 자기 일에 충실하고, 자기 개인적인 이해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사람들이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해. 역사적으로 따지면 우라나라에도 많겠지만 근세사를 봤을 때는 정말 민중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국가 비전을 세웠던 중국의 덩샤오핑이나 베트남의 호치민이 생각나. ”
서른둘, 그의 결혼은 늦었다. 여섯 살 연하의 아내는 전도유망했던 무용수. 그와 결혼하면서 전업 주부가 되었다. 그가 데뷔하던 때만 해도 사회적인 예우는 물론 개런티가 변변치 않던 때라 아내는 긴축 경영으로 살림을 꾸렸다. 슬하엔 1남 1녀가 있다.
“선생님 댁의 가훈은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가훈을 번듯하게 걸고 살 만한 집이 아니라 가훈은 없어. 다만 나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나로 인해서 남에게 부담을 주지 말자’는 거야. 우리 작업 현장이 노소동락이 되어야 하거든. 모두가 즐겁고 화목한 가운데서 작업이 이뤄져야 진행도 잘된다고. 남한테 부담 주기 싫어하는 체질이기도 하고. 인생이란 조금 손해 보는 듯하면서도 자기 본령만 유지하면 돼. 그리고 뒤처지지 않겠다는 의지와 노력만 계속하면 언제든지 좋은 평가는 나오게 되는 거고. 그것으로 자기 작업을 지속적으로 영위할 수 있어.”
“지금까지 연기하셨던 아버지 역 중 가장 이상적인 아버지라고 여기는 인물은 누구인가요?”
“대발이 아버지지(웃음). 자기 맘대로 다 하잖아. 가족들이 꼼짝 못하잖아. 그만큼 가족에 대한 책임이 강한 아버지야. 그런 아버지는 바람도 안 피운다고. 돈이 아까워서, 그리고 가족에 대한 자기 입장 때문에 바람을 안 피워. 그런 방식으로 가족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고.”
“선생님도 댁에서는 대발이 아버지 같은 모습인가요?”

“(고개를 저으며) 난 원래 그런 거 싫어해. 우리 마누라한테 다 맡겨서 해. (오늘 입고 온) 이 양복도 마누라가 사 온 거야. ‘이 옷이 세일에 나왔는데 얼맙디다’ 하면서 주워 왔지. 내가 내 일에 전념할 수 있었던 조건에도 그런 게 있어. 나는 살림에 일체 관여를 안 하고 오로지 내 일만 하는 거야. 어떤 면에서는 정신적으로 사치했지. 나는 우리 집에 얼마가 있는지도 몰라.”
“부부 관계를 행복하게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부부 간에 기탄 없어야 되는 거. 예를 들어 성적 욕구가 있을 때에는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한테 스스럼없이 요구할 수 있어야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는 격식이나 사회적 신분을 떠날 수 있어야 해. 예를 들어 아내가 대학 교수가 됐다고 쳐. 남편이 어느 날 생각이 있어서 요구를 했을 때 아내가 ‘내일 있는 논문 발표 때문에 안 돼’ 또는 ‘컨디션 나빠서 안 돼’ 하고 거절하면 남편이 그담부터 조심하게 된다고. ‘박사가 돼서 그러나(웃음)’ 이렇게 생각하게 돼. 부부는 최소한 서로의 인격체를 존중하는 가운데 원초적인 관계여야 해.”
“사모님께 고마운 생각이 드는 건 언제인가요?”

“늘 고맙지. 젊었을 때 내가 화려하고 넉넉하게 해주지 못한 것도 있고, 또 그걸 참고 극복해낸 것도 고맙고. 내가 이렇게 노년까지 건강하게 일할 수 있게 뒷바라지해준 것도 더없이 고마운 일이지. 하지만 고맙다는 얘기는 해본 적이 없어.”
“고맙다 말씀하시지 않으면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세요?”
“그냥 고맙게 생각하고 열심히 하는 거지(웃음). 우리 때 사람들은 다 그랬어. 우리 마누라가 농담 삼아 ‘그런 얘기도 못하고 뭐 해’라는 얘기를 했는데 내 대답이 ‘내 눈 보면 알잖아(웃음)’라는 거였어.”
“선물을 하시는 것도 좋을 텐데요(웃음)”
“‘(웃음)그대한테 다 있으니 그대 맘대로 사고 내가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 라고 얘기해.”
“선생님의 꿈은 무엇인가요?”
“지금 무슨 꿈이 있겠어. 건강하게 열심히 연기해서 다만 1%라도 사회에 보탬이 되는 입장이 됐으면 하는 생각이지.”

“행복은 뭔가요?”
“내가 신혼부부들한테 주례사로 하는 딱 한마디가 있어. ‘일일의 행복의 조건에 충실해라’라는 거야. 인간관계의 조건에서는 항상 화합과 갈등이 공존하지만 큰 갈등도 하루 안에 풀어버리면 큰 문제가 안 되거든. 그리고 부부 사이에 거짓말을 하도록 만들면 안 되겠지. (남편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건) 여자한테 달렸어. 아내가 사소한 문제로 바가지를 긁기 시작하면 남자는 거짓말을 하거든.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 문제를 강압적으로 바꾸려고 하면 안 돼.”
“어떻게 하면 남편의 문제를 잘 풀 수 있나요?”
“믿음을 담아 진심으로 얘기해. 윽박지르지 말고 정말 남편한테 맡기듯이 얘기해봐.”
두 시간을 꽉 채워 말하는 그의 열정은 뜨거웠다. 말들마다 알차게 영글었고 피곤해하는 기색이 일절 보이지 없었다. 그러고는 세 차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총총 길을 나섰다.

<이산>의 이병훈 PD가 말하는 이순재
이병훈 PD와 이순재 선생은 <허준>(1999) <상도>(2001) 등에서 호흡을 맞췄던 사이. 신뢰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이 매주 월·화요일 밤 MBC에서 방영되는 사극 <이산>에서 다시 만났다. 이 드라마에서 이순재 선생은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과 사회 통합을 위한 정치 철학을 보여주었던 영조 임금을 연기한다.

영조 임금 역에 이순재 선생을 캐스팅한 이유는? 이번 드라마에서 천재적인 두뇌와 합리적인 생각, 굉장히 치밀한 분석력과 통치력, 추진력을 지닌 영조 임금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걸 제대로 구현해줄 수 있는 연기자는 이순재 선생밖에 없었다. 작가와 함께 콘셉트를 정한 뒤 제일 먼저 캐스팅한 분이 이순재 선생이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궁금하다. 내가 개인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존경하는 분이다. 연기자로서의 자세가 너무너무 훌륭하시다. 후배들에게 항상 귀감이 되고 모범이 되고 솔선수범하신다. 30년 동안의 연출자 생활 동안 이순재 선생만큼 항상 자기를 계발하시고 새로운 창의력을 보여주시는 분이 없다. 나이가 드셨는데도 젊은 연기자들하고 참 잘 어울리시고 잘 노신다. 그러니 야동순재도 나오는 거다.

연기하는 스타일은? 굉장히 파워풀하고 에너제틱하고 발음이 정확하다. 그리고 대사나 캐릭터 분석하는 데도 명석하시고. 아주 자유롭고 열려 있는 분이다. 그래서 이순재 선생과 일할 때는 마음이 편안하고 든든하다.


김선래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7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