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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깊은 가게에서 철학을 긷다 통인가게 주인 김완규의 백년 정신
한국무역협회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 기업의 평균 수명은 20년이다. 그나마도 2027년에는 12년 수준으로 단축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격변기에 인사동에서 가장 오래된 고미술품점인 통인가게가 설립 1백 주년을 맞았다.

1924년에 개업해 2대째 1백 년간 운영해온 통인가게의 주인 김완규 회장이 고미술품 사이에 앉아 있다.
구슬 행상에서 시작한 통인가게 1백 년의 역사
통인가게는 인사동을 대표하는 문화 예술 공간이다. 2대에 걸쳐 계승돼 오늘에 이르렀으며 고미술과 현대미술, 전통 공예와 현대 공예를 아우른다. 통인가게는 1924년 서울 통인동에 통인가구점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열었다. 초기에는 장신구에 쓰는 구슬을 모아 파는 일을 했고 차츰 가구, 도자기, 패물 등으로 취급 품목을 늘려나갔다. 통인가게가 지금의 위치인 인사동으로 이전한 것은 1961년이다.

통인가게 주인 김완규 회장이 설립자인 아버지로부터 가업을 물려받은 것은 1972년, 그가 스물세 살 때다. 그는 이듬해 통인가구점을 일대에서 가장 크고 높은 건물로 신축하고 이름을 통인가게로 고쳤다. 통인가게라는 이름은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을 펴낸 출판인 한창기의 작명이다.

그리고 마침내 올해 통인가게가 문을 연 지 1백 년이 되었다. 현재 통인가게 1층에서는 현대 공예를, 3층과 5층에서는 현대미술을, 4층에서는 고미술을 만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통인가게는 통인인터내셔날, 통인익스프레스, 통인안전보관 등 스물한 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미술품을 수집 · 보관 · 운반하는 일에서 파생된 서비스와 사업이다.


1973년 신축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통인가게 모습.
“얼마 전 두 아들을 데리고 산소에 다녀왔어요. 조모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말씀이 떠올랐죠. ‘옛말에 부모를 지키는 것도 한 사람, 가문을 지키는 것도 한 사람, 산소를 지키는 것도 한 사람이라고 했으니 네가 막내로 태어나서 그 일을 하는 것을 원망하지 말아라. 네 운명이다.’ 평생 내가 할 의무는 가업을 1백 년이 될 때까지 지키는 것이라고 여기며 살아왔어요. 중간에 사업을 접으면 아버지가 물려준 것을 버렸다고 할 거고, 사업이 잘못되면 아버지가 일군 것을 망해먹었다고 할 테니까. 어떻게 해서든 ‘1백 년아 지나가라’하는 마음으로 버텨왔더니 어느새 1백 년이 됐네요. 내가 이렇게 노인이 됐는지도 몰랐어요.”

그의 집안은 서울 사대문 안에서 12대를 산 양반이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하면서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자 그의 아버지 김정환 씨는 소년 시절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사가 될 만한 물건을 찾아 사고파는 일로 가족을 먹여 살렸다. 아버지는 과묵하고 표현이 적은 편이었는데도 좋은 물건을 구해 온 날이면 그에게만은 자랑을 하며 그것이 왜 좋고 귀한 물건인지 설명해주곤 했다. 아버지의 행상을 따라다니는 일도 삼 형제 중 막내인 그가 맡았다.

그는 열여섯 살 때부터 점원이 되어 아버지 밑에서 사업을 배웠다. 그리고 아버지는 일찌감치 그를 후계자로 정하고 그가 스물세 살 때 사업을 물려주었다. “아버지가 저에게 사업을 물려주셨을 때 주변 어른들이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사업 망해먹으려고 그러느냐, 아직 이르니 좀 더 나중에 물려줘라.’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것을 알고 있던 중에 아버지가 저를 부르시더라고요. 통장과 도장을 다시 내놓으라고 하실 모양이구나 싶었죠.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는 내 아들을 믿는다. 더 성공해서 큰 회사로 만들거라.’ 그 한마디가 얼마나 힘이 센지 지금껏 내가 딴짓 못 하고 이 자리를 지켜온 거예요.”


통인가게 전시품.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공예 운동 계속 이어나갈 것”
아버지는 그에게 고려청자와 불화는 도둑질한 물건임이 틀림없으니 취급하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 그는 아버지의 당부를 변함없는 원칙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고미술품을 수집하고 판매하는 일에 주력하던 것에서 나아가 그간에 쌓은 안목과 기술을 바탕으로 옛 가구와 소품을 제작해 수출하는 되살림 가구 사업을 통해 사업적으로 큰 성장을 일구었다. 1970년대는 개발과 성장이 시대정신이던 때였다. 삼성과 현대 같은 기업들이 앞서거니뒤서거니 하며 수출을 견인하고 너나없이 국가 발전에 복무하던 시대 상황 속에서 그는 문화적 측면에서 나라와 국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겠다는 비전을 세웠다.

“그 시절 정부는 국빈이 방한하면 우리 가게를 방문하게 했어요. 미국의 은행가 데이비드 록펠러David Rockefeller, 미 국무장관 윌리엄 로저스William Rogers 내외 등이 우리 가게를 찾았죠. (중략) 그리고 그때 우리나라가 인프라는 낙후했지만 문화가 낙후했다는 인상은 주지 말자는 생각을 했어요. ‘돈 벌 생각만 가지고 물건을 팔아서는 안 되겠다.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Yanagi Muneyoshi가 그랬듯이 우리도 공예 운동을 통해 문화의 힘을 키우는 게 마땅하다. 골동품이 아닌 문화 예술을 파는 가게의 주인이 되자’고 마음먹었죠.”

그는 1975년에 통인화랑을 열고 본격적으로 현대미술을 다루기 시작했다. 통인가게는 차츰 풍류를 즐기는 문화 예술인과 재계 인사들의 참새 방앗간이 되었다. 특히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며느리 홍라희 전 리움 관장, 김종희 한화 창업주, 언론인 예용해, 출판인 한창기 등이 자주 드나들었다. 천경자 작가도 단골손님 중 한 명이었다. 한번은 통인가게에서 강화 반닫이와 백자 항아리를 새로 그린 그림하고 바꾸어갔다. 통인가게가 지금도 소장하고 있는 이 그림, 천경자 작가의 1972년작 ‘꽃과 항아리’는 작가 사후에 봄, 여름, 가을 서로 철을 달리해 피는 꽃들을 한 화병에 담아놓은 파격적인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현재 가치가 십수억 원에 달한다.


통인가게는 국내 공예 작가를 발굴해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도 하지만, 기본은 우리나라 좋은 골동품이다.
“미술품의 가치는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들에 의해서 매겨져요.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죠. 찌그러진 형태, 순박한 모습, 비대칭적인 것에서도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자기만의 눈과 기준을 지닌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우리 가게를 많이 찾았어요. 꼭 큰돈을 들여서 고가의 미술품을 사는 것만이 예술을 향유하는 것은 아니에요. 평범한 사람들이 월급에서 얼마간 떼어 자기 마음에 드는 작은 미술품을 하나씩 사 모으는 것 또한 문화적인 삶이죠.”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통인화랑을 공예 회화 전문 화랑으로 운영하며 지속적으로 공예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해왔다. 1980년대에는 홍콩에 2000년대에는 미국 뉴욕에 갤러리를 열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우리의 문화 예술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통인가게가 1백 년이 된 지금 우리 문화 예술의 힘을 키우는 데 기여하겠다는 그의 열정은 여전하다. 그는 현재 통인도자연구소가 있는 강화도에서 미술관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이르면 올해 1호 미술관을 오픈할 예정이다. 통인가게를 인사동의 랜드마크로 만든 것처럼 통인미술관을 강화도의 랜드마크로 만들고, 나아가 역사의 섬 강화도를 문화 예술이 숨 쉬는 곳으로 만드는 꿈을 꾸고 있다.


1970년대 미국 체이스맨해튼은행 데이비드 록펠러 회장의 통인가게 방문 때 촬영한 것이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통인가게가 1백 년이 되기만을 기다려왔어요. 이제는 1백 년 약속을 지켰으니 좀더 자유롭게 나의 상상력을 펼쳐보려고 해요. 우리가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이 4만 점 정도 돼요. 그걸 가지고 강화도에 테마와 이야기가 있는 작은 미술관과 박물관을 여러 개 만들고 싶어요. 물건을 만드는 일만이 공예가 아니에요. 아름다운 도시와 세상을 만드는 것도 공예예요. 나는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해나갈 생각이에요. 두 아들에게도 늘 새로운 도전을 하라고 말하고 있어요."

글 조영재 | 사진 이기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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