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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y Chan 앤터니 찬 공예적 태도로 완성하는 럭셔리 주거
홍콩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가 앤터니 찬이 디자인한 공간은 한 편의 시를 닮았다. 시인이 단어와 여백을 섬세하게 배치해 작품을 탈고하듯 그는 대리석 한 장, 문손잡이 한 점까지 자신만의 터치를 더해 통일된 분위기로 공명하는 공간을 완성한다.

지난 9월, 프리즈 기간에 한국을 방문한 건축가 앤터니 찬을 그와 마찬가지로 공예적 태도와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작업하는 슈트 비스포크 공방인 레리치(@__lerici__)에서 만났다.

앤터니 찬
은 홍콩에서 태어나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와 배스 대학교에서 건축학 학위를 취득하고, 프랑스 소르본 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이후 영국의 건축사무소인 YRM 앤서니 헌트 어소시에이츠와 프랑스 건축사무소인 아키텍처 스튜디오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파리에서 전설적 인테리어 디자이너 앙드레 퓌망Andrée Putman과 함께 일했고, 그때의 경험이 공간의 모든 요소를 정교하게 조율·구성해 하나의 디자인을 완성하는 지금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cream.hk


클럽 크루저Club Cruiser 홍콩의 카이탁Kai Tak 페리 터미널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27층 규모의 레지던스에 거주자를 위한 프라이빗 클럽을 디자인했다. 바와 수영장 및 명상이나 요가를 하는 룸과 라운지로 구성했으며, 도시의 블링블링한 느낌을 배제하고 자연과 어울리는 리조트처럼 계획했다. 도시를 순항하는 비일상의 경험을 콘셉트로 나선형 계단과 목재 난간, 석유등을 연상시키는 조명 등 선박 속 클래식한 요소를 곳곳에 배치한 것이 포인트. 공간이 좁았기 때문에 위아래로 열리는 커다란 유리문을 설치해 실외 공간을 적극 확보했다. 수영장의 푸른빛 타일은 앤터니 찬이 직접 디자인한 것으로, 녹색 래커를 칠한 바 테이블과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또한 영국 아티스트 오언 불릿에게 바다를 주제로 작품을 의뢰하여, 작가가 합판과 와이어로 제작한 고래 형상의 조명이 유영하듯 공간을 채우고 있다. ⓒEdmon Leong
동아시아 건축에 대해 논하는 자리에서 한 건축가는 ‘공예적 가치’라는 개념을 언급했다. 손으로 직접 재료를 옮겨 쌓고, 한 땀 한 땀 붙여 짓는 것이 동아시아 건축의 공통점이자 힘이라는 것. 이러한 동양의 수공예적 감성과 가치를 일찍이 자신만의 정체성으로 구현해 글로벌 디자이너로 발돋움 중인 건축가가 있다.

앤터니 찬은 홍콩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공부했으며, 런던과 파리에서 건축가로 일했다. 지금은 홍콩에 건축 스튜디오 크림Cream을 개소하고, 클럽하우스와 고급 레지던시 등 하이엔드 공간을 중심으로 활발히 작업하고 있다. 재료의 물성을 살리면서 건축가의 디자인을 더한 가구와 조명, 오브제를 따뜻한 톤의 바탕에 적절히 배치해 완성한 공간을 보고 있자면 빛나고 화려한 이미지로 소비되기 바쁘던 럭셔리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그는 본성처럼 내재하던 동양적 감성이 작업의 코어 근육이 됐고, 서양에서의 다양한 경험과 배움이 더해져 지금의 분위기를 형성했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건축가가 모든 것을 디자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인테리어나 가구도 하나의 분야로 구분되기 전에는 모두 건축가의 일이었습니다. 그때처럼 아주 작은 요소까지 디자인하고 싶어요. 자신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공간에 대해 아주 작은 것까지 신경 썼음을 깨달을 때의 기쁨을 클라이언트가 느끼도록 해주고 싶습니다.”


빅토리아 하버 레지던스Victoria Harbour Residence 한쪽 벽면에 통창을 설치해 빛을 한가득 들이고, 스튜디오처럼 느슨하게 열린 평면으로 유쾌한 분위기를 구현한 집. 샌드스톤을 곡면 가공해 커튼처럼 연출한 벽면, 비슷한 색감의 대리석 바닥과 카펫으로 옅은 바탕을 만들고, 정교하게 디자인한 조명과 가구·오브제를 배치했다. 다이닝 공간의 천장에 유기체 형상의 독특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조명, 유리블록을 쌓아 만든 거실 속 캐비닛 등 곡면을 살린 아이템으로 재료의 물성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Virgile Simon Bertrand
“우리는 수많은 감각으로 공간을 경험합니다. 럭셔리는 이러한 요소를 공감각적으로 풍부하게 느낄 때 탄생합니다.”

여러 나라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일해왔습니다. 그중 작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나라는 어디였나요?
한 곳을 꼽는다면 프랑스입니다. 처음에는 독특한 발음 때문에 언어에 관심을 가졌다가, 자국 문화에 대한 프랑스인의 자부심과 자신감을 접하며 더욱 깊이 빠지게 됐어요. 프랑스는 예전부터 전통과 역사를 기반으로 새로운 미를 창조해왔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장인의 작업이 퇴색하고 잊히는 추세인데, 프랑스에서는 젊은이들이 오래된 문화를 이어가고자 노력해요. 본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전에 없던 모습을 탄생시키는 것이 인상적이었고, 저 또한 그렇게 작업하고 싶었습니다.

주거 공간을 유독 활발히 설계합니다. 어떤 점이 매력적이었나요?
작업할 때 항상 인간 중심의 건축을 추구하고, 단순히 편안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안식처 같은 평안함을 구현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휴식하고 이완하는 주거 공간에 특히 관심이 많아요. 오피스나 교회를 설계할 때도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게끔 디자인하고요.

프로젝트는 어떤 기준으로 선정하나요?
첫 번째는 클라이언트와 얼마나 마음이 일치하는지 봅니다. 가능하면 여러 번 만나 대화하면서 협업에 대해 비슷한 의지가 있는지, 의견을 잘 나눌 수 있는지 살핍니다. 두 번째로 공간의 일부만 디자인하는 프로젝트는 하지 않습니다. 전체가 하나의 공간으로 묶여 우리의 색과 철학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작업만 합니다. 그렇게 만든 결과물을 ‘토털 크림 트리트먼트’라고 부르죠.




딥 워터 베이 빌라Deep Water Bay Villa 역사와 아트의 재치 있는 조합이 돋보이는 빌라 인테리어 프로젝트. 인조가죽 소파, 청동 프레임을 짠 벽면 사이사이에 무라노 글라스로 제작한 캔들 오브제를 배치한 거실(하단)은 에드워드 시대의 호화로운 클럽을 연상시킨다. 또, 침실(중앙)에는 가죽을 루이 비통 패턴으로 직조한 패널, 가구 디자이너 피에르 샤로Pierre Chareau의 각진 램프를 배치해 공예의 아름다움을 한껏 살렸다. 이곳에서 눈에 띄는 패턴은 ‘리브’다. 벽난로 위 TV 화면을 가리기 위해 설치한 세라믹 패널(상단), 대리석으로 만든 계단 난간 벽, 서재 벽면 한쪽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패널까지 곳곳에서 서로 다른 재료로 리브 패턴을 표현해 선이 주는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 ⓒVirgile Simon Bertrand
당신이 설계한 공간이 어떤 장소가 되었으면 하나요?
우리는 시각 외에도 카펫에 발이 닿는 감촉이나 의자에 앉는 행위, 바람이 스치는 느낌 등 수많은 감각으로 공간을 경험합니다. 럭셔리는 이러한 요소를 공감각적으로 풍부하게 느낄 때 탄생한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요소를 조합해 총체적 경험을 구현하고자 합니다. 이는 곧 크림의 철학이기도 해요. 포에틱 스페이스poetic space, 즉 공간을 한 편의 시처럼 만드는 개념입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건축가가 이탈리아의 카를로 스카르파Carlo Scarpa인데요, 그가 설계한 장소에 가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그의 작품임을 알 수 있어요.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어떤 공간에서 무엇 때문인지 정확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 느낌을 통해 크림이 디자인한 작업임을 알아차릴 때 가장 기뻐요. 이러한 작업을 축적해 미에 대한 우리만의 기준을 정립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입니다.

공감각적 공간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하나요?
분위기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재료입니다. 수공예를 하듯 재료를 정교하게 가공하고 조합해 하나의 무드를 만들어냅니다. 마치 요리하는 것과 같죠. 중요한 것은 재료를 날것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에 맞게 잘 다듬어 배치하는 것입니다. 여러 아티스트와 협업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피크 하우스Peak House 빅토리아 피크에 위치한 4층 규모의 단독주택을 레노베이션한 프로젝트. 빅토리아 피크는 홍콩에서 가장 높은 지대이며, 오랫동안 도심의 럭셔리를 상징해왔다. 이곳의 매력인 푸른 자연이 한눈에 펼쳐지는 뷰를 확보하고, 아열대기후에 어울리는 일상 공간을 디자인했다. 기모노를 연상시키는 실크 패널, 반투명 유리 파티션(오른쪽)과 다양한 크기의 격자무늬에서 동양적 정서가 물씬 풍긴다. 브론즈와 목재, 오닉스를 조합해 만든 슬라이딩 스크린은 낮에는 전면 유리창으로 프라이버시 노출을 막아주고, 밤에는 조명이 켜져 은은한 빛을 낸다. ⓒEdmon Leong
특별히 선호하는 재료가 있나요?
프로젝트에 맞춰 결정하는 편이에요. 다만 무의식적으로 코튼 패브릭이나 대리석 같은 자연 재료에 손이 가고, 패턴이나 형태 등 가공하는 기법 또한 자연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언급한 것처럼 프랑스를 비롯해 전 세계의 장인들과 활발하게 협업합니다. 어떤 점에 매력을 느꼈나요?
건축가나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재료의 겉모습은 잘 알지만, 물성을 속속들이 파악하지는 못해요. 하지만 장인은 그 소재로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알죠. 그들과 협업하며 재료를 다루는 노하우를 배우고, 공간에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해 역으로 영감을 얻기도 합니다. 예술가와 건축가는 자신만의 고유한 관점이 있고, 서로 다르기 때문에 협업의 결과물이 더욱 의미 있어요. 함께 일하는 과정 자체가 배움과 새로운 발견의 연속입니다.

디자인의 완성도를 높이는 노하우를 소개해준다면?
공간을 설계하는 것은 경험을 디자인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오늘 이곳에 도착했을 때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계단으로 내려와 정원에 진입하고, 입구에 도달하는 시퀀스를 거친 것처럼요. 이 모든 것은 현장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사이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정말 중요해요. 특히 작업 초반에는 자주 현장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얻은 인상과 아이디어를 형상화하는 것에 가장 집중합니다. 두 번째는 시공 품질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호흡이 잘 맞는 시공사를 선정하는 것은 물론 최대한 자주 현장을 방문하고, 직접 가지 못할 때도 매주 팀원이 모여 현장 사진을 보며 리뷰합니다.


스카이 빌라 듀플렉스Sky Villa Duplex 주룽반도의 호만틴Ho Man Tin 언덕에 위치한 아파트를 리모델링한 프로젝트. 창호 규격을 기준으로 실내 벽면 재료의 선을 맞추고, 천장까지 디자인이 이어지도록 해 통일감을 주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건축가로 꼽은 카를로 스카르파에 대한 존경을 담아 그의 건축물 브리온 묘지를 닮은 대리석 계단을 설계했고, 곡면이 인상적인 로비의 문은 금속 바탕 위에 작가가 꽃을 모티프로 작업한 패턴을 입혔다. ⓒVirgile Simon Bertrand
일에 대한 영감은 어디에서 얻나요?
모든 것이 작업의 재료가 되지만, 특히 여행하면서 많은 영감을 얻어요. 요즘에는 인상적인 공간이나 순간을 발견하면 사진이나 영상과 함께 그때의 감상을 음성 메모로 기록해두는데, 나중에 당시를 돌이켜보고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번 방문에서 당신이 경험한 서울은 어땠나요?
도시에 대한 소회를 들려주세요. 거리마다 대형 광고판이 즐비한 모습은 마치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미래 도시에 와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다 갑자기 궁이나 성곽길처럼 과거와 조우하는 순간이 펼쳐져요. 미래와 과거가 뒤섞여 존재하며 느껴지는 긴장감이 흥미로웠습니다. 각각의 요소를 잘 가다듬는다면 더욱 매력적인 도시가 될 거예요.


사진 Edmon Leong, Virgile Simon Bertrand

글 정경화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3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