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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디자이너 채병록 "나는 그래픽 디자이너 출신 표현자"
新전통? 힙트래디션? K-hip?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는 크리에이터가 우후죽순지세로 등장하는 지금, 파워풀하고 파격적인 한국美를 그래픽으로 선보이는 채병록 작가. ‘본질에 주력’이라는 덕목부터 성실히 채운 후 고정관념을 둘러싼 프레임을 하나씩 해체해왔다. 그는 자신을 “자기 주도적으로 표현해내는 그래픽 디자이너 출신 표현자”라 칭했다.

‘문방청완文房淸玩-만첩구성도萬疊構成圖’, 1150×2300mm, Digital Printing
채병록 작가는 일본 다마 미술대학에서 그래픽 표현 전공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2014년부터 디자인 스튜디오 CBR Graphic을 운영 중이다. 전통, 근대적 오브제 또는 ‘한국적인’ 아이덴티티를 기반으로 현대적 미감을 찾아내는 그래픽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나이키, 스타벅스 등 다양한 문화 단체나 기업과 협업 활동도 진행해왔다. 빅토리아 앤 앨버트 미술관(V&A Museum), 뮌헨 국제디자인박물관(Die Neue Sammlung) 그리고 국립한글박물관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대학에서 타이포그래피와 그래픽 디자인 강의를 맡고 있으며, 현재 AGI(Alliance Graphique Internationale) 멤버이다.
“한국적 그래픽을 만들려고 고민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자신을 소개하던데, 디자이너 채병록이 표현하는 ‘한국성’이란 무엇인가?
유학 후 한국에 돌아와 디자인 스튜디오를 창업한 후 주로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홍보물을 제작하면서도 언젠가 ‘한국적’ 작업물을 의뢰받을 때를 대비해 매뉴얼을 만들었다. 자기 주도적 작업을 시작한 거다. 먼저 옛 자료를 섭렵하고, 그 이미지 속 기하학 구조 등을 그래픽적 관점으로 바라보며, 멋진 형태를 조합하거나 소스로 활용했다.

전통 사탕인 옥춘당을 타이포그래피화해 ‘축’이라는 글자로 표현한 작업, 한복이나 색동에서 발견한 색과 패턴을 한글 그래픽화한 것이 당시의 결과물이다. ‘우리 색은 오방색’이라는 한정적 시선 때문에 비비드 컬러는 우리 색이 아니라고들 생각하는데, 당시 나는 실제 옥춘당이 지닌 형광빛 컬러를 부각했다. 또한 우리가 고수해온 형태성을 과감히 왜곡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런 작업을 지속해나갔더니 나를 지금까지 볼 수 없던 부류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음… 결국 디자이너는 ‘찾아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우리 전통에서 현대적 미감을 찾아내는 디자이너라 할 수 있다.

유학은 한국성을 찾는 데 어떤 도움이 됐나?
한국성을 찾는 작업을 해온 디자이너 대선배들이 있고, 그 계보도 이어져왔다. 다만 잠시 주춤하던 찰나였다. 다시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서른 살이라는 좀 늦은 나이에 유학을 감행했다. 전통을 이야기하려면 관점의 깊이가 있어야 한다고, 일본은 전통을 동시대적 콘텐츠로 해석하는 관점과 노하우가 있는 나라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시스템·방법론 등 얻어올 건 얻어오고, 스펙트럼을 넓혀보자고 생각했다. 그래픽디자인계의 대가 사토 고이치의 지도 아래 전통에 기반을 둔 작업 프로세스를 연구했다. 동아시아적 관점을 지닌 스승에게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2022년 <물아일체>전의 책가도 작품을 많은 사람이 기억한다.
<물아일체>전은 우란문화재단에서 제안한 전시였는데, 작업 자체가 흥미로웠다. 조선 후기 전통 민화와 책가도를 취향의 표현 수단으로 바라보고, 그 시대의 민화 속 이야기를 들여다보며, 현재적 가치를 찾는 프로젝트였다. 디자이너의 눈으로 바라보니 책가도는 그 자체가 ‘한국의 전통 그래픽’이라 할 만했다. 무엇보다 그 안에 사연이 들어 있었다. 책가도는 조선 사람들이 중국의 다보각경多寶各景(장식장에 귀중품을 진열해놓은 모습을 묘사한 그림)을 변신시킨 그림이다. 사신들이 책장에 얹힌 진귀한 기물을 보고 아쉬움을 감추지 못해 그린 그림이 책가도다. 그걸 지금의 그래픽으로 어떻게 탈바꿈시킬까 고민한 작업이 ‘문방청완文房凊玩’ 시리즈다. 나는 책가도 속 기물을 직선과 곡선으로 모던화하면서도 당시 유행한 청색, 경면주사 등을 배색해 활력을 더했다. 도상 간의 밸런스를 맞추고, 리드미컬하게 구성하는 작업이 흥미로워 요즘도 책가도 작업을 많이 한다.


‘축첩도築疊圖첩疊-Human Nature’, 1450×2050mm, Silkscreen print, Gold-leaf, 2022
그래픽 디자이너는 브랜드와 협업한 결과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협업 과정 설명으로 그래픽 디자이너의 정체를 밝혀달라.
사실 사람과의 관계와 좀 비슷하다. 예를 들면 너무 멋지고 멀끔한 대상은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 굳이 내가 재해석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오간다. 반면, 내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어눌하고 엉성한 대상은 선뜻 마음이 가지 않는다. 분명히 어딘가 매력적인 지점이 있어야 그 대상과 나의 관계가 시작된다. 그런 방식으로 대상을 찾아낸 후에는 한 달 기준으로 보면 2주 이상 아카이빙 작업을 거치면서 필터링한다. 너무 많은 정보를 과식하면 내 것이 없어지기 때문에 이 과정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다음 비로소 재해석하는 과정에 들어간다. 이런 작업이 작가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나는 스스로를 “자기 주도적으로 표현해내는 그래픽 디자이너 출신 표현자”라고 설명한다. 그래픽 디자이너는 누군가 의뢰한 문제를 시각적으로 해결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한옥을 모티프로 한 작업도 많이 하고 있다. 마침 이번 <행복> 12월호의 메인 이슈도 북촌 한옥에서 펼쳐진 이벤트 ‘행복작당’이다.
나는 원래 공대 출신이라 메커닉하게 쌓이는 것에 관심이 많다. 우리나라는 기와를 쌓는 형태와 프로세스가 동아시아권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특질을 보인다. 처음엔 공학적으로 쌓은 기와를 시각화하는 작업이 녹록지 않았다. 그러던 중 수원 화성에 관한 의궤, 강원도 한옥학교 자료실에서 청사진으로 만든 도면을 보게 됐다. 대웅전 기와 하나도 와복도나 앙시도 등 도면을 바라보는 시점에 따라서 달라 보이는 점, 밀도감 있는 형태로 시각화한 점이 놀라울 정도였다. 나는 오랜 아카이빙 과정을 거쳐 이를 새로운 문자도로 변화시켰다. 그 안에 메커닉한 짜임도, 한글 서체와 비슷한 셰이프도, 커뮤니케이션적 요소도 숨어 있도록…. 내게는 소름 돋는 작업이었다.

이제 이번 호 <행복> 표지를 설명해줄 시간이다.
원래 그림은 서울문화재단에서 정부 상징 디자인 프로젝트로 진행한 작업물이었다. 도상들은 블랙으로 처리하고, 배경을 색동으로 작업했는데, 나 나름대로는 과감하고 새로운 접근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행복> 표지는 그 작업을 모티프로 디자인하우스에서 <행복> 표지에 맞게 재해석한 작업이다.

글 최혜경 기자 | 인물 사진 이경옥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3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