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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전 <달이 뜬다>를 연 미술가 강익중 달항아리에서 나를 빼니 달이 되었다
무게 대신 날개를 얻은 나뭇잎들이 거리를 유영하던 11월 초, 미술가 강익중은 자신이 ‘올드스쿨’이라 표현한 고아한 화랑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있었다. “배우로 말하면 연기를 안 하는데 연기야, 작가로 말하면 그림을 안 그리는데 그림이야. 진짜 도사는 자기가 도사인 줄도 모른다잖아요. 그런 경지에 이른 게 달항아리죠.” 자신의 대표작이기도 한 그 달항아리 그림에서 그는 이번엔 항아리를 빼버리고 달만 보라 했다. 그날 우리는 그림보다 시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눴다.

강익중 개인전 <달이 뜬다>는 갤러리현대에서 12월 11일까지 열린다. 처음 선보이는 연작 ‘달이 뜬다’와 ‘달항아리’ 작품을 비롯한 주요 연작 2백여 점, 12년간 세계 곳곳에서 공개한 대형 공공 프로젝트의 스케치, 아카이브를 전시한다. 특히 그의 시 여러 편도 함께 선보이는데, 그의 뒤로 보이는 글씨는 ‘이루어진다’라는 시를 전시장 벽면에 크레용으로 직접 쓴 것이다.
태초에 신은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빚었다. 사람이 작은 조물주가 되어 무언가를 만들 때도 그러할까? 달항아리와 달을 그린 그림 앞에, 흰 벽 위 크레용으로 쓴 시 앞에 선 그를 나는 오래 들여다봤다. 그들이 기막히게 닮은꼴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환한 그 얼굴들.

5년 전 평창스페셜뮤직&아트페스티벌에서 발달 장애 아동들과 함께 3인치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위해 한국을 찾았을 때 우리는 그를 만났다(<행복> 2017년 9월호). 그리고 올 11월, 한국 상업 화랑에서 12년 만에 여는 개인전 <달이 뜬다>를 준비 중인 그를 만났다. 이번 전시에서 새로운 연작 ‘달이 뜬다’를 선보일 것이라 했고, 그 연작 옆에 이런 시가 쓰여 있었다.

“달항아리에서/ 항아리를 빼니/ 달이 되었다// 달항아리에서/ 사람을 빼니/ 달이 되었다// 달항아리에서/ 나를 빼니/ 달이 되었다”(‘달이 되었다’)

이 무슨 선사禪師의 선시禪詩인가 싶어 두 눈 부릅뜨고 다른 시도 찾아 입으로 되뇌었다.

“폭풍 직전의 하늘은 연한 청록색이다 (…) 가장 좋은 냄새는 문방구에서 방금 산 책받침 냄새 (…) 무대공포증은 나보다 더 큰 나를 보여주려 할 때 생긴다 (…) 비행기에선 방귀 소리가 안 들린다 (…) 숫자는 대상과 대상 사이의 거리다”(‘내가 아는 것’)

“오른손잡이 피카소가/ 그림이 너무 잘 그려지자/ 일부러 왼손으로 그렸다는 얘기를/ 들어보았다// 옛날 유명한 대목수가/ 집을 완벽히 지은 후/ 몰래 한 모퉁이를 깼다는 얘기를/ 들어보았다// 작곡가가 만든 곡 안에/ 음악이 너무 꽉 차면/ 당최 숨 쉴 곳이 없다는 얘기를/ 들어보았다// 하늘이 좋아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갖춘 이보다/ 어딘가 한 봉지 빠진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어보았다”(‘들어보았다’)



뉴욕의 강익중 스튜디오. ‘달항아리’ 연작은 2004년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서 실수로 이지러진 거대한 구형 구조물에서 착안해 시작했다. 한글 설치 작품은 한글이 지닌 호환성, 유연성, 팽창성 그리고 그 뛰어난 조형미에 반해 시작한 작업이다. 그는 한글의 변화를 모색하며 기본 자음 19개를 24개로 확장하는 시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가로세로 3인치 한글과 어린이의 그림을 모아 다리, 가벽, 건축물을 만드는 공공 미술 프로젝트로 남과 북, 동과 서, 과거와 현재가 서로 연결되는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사진제공 강익중 스튜디오
빵집이든 다방이든 편한 곳에 앉아서, 종이가 없으면 티슈 에라도, 그저 생각나는 대로, 한 번 고치지도 않고, 비행기에선 스무 편 서른 편씩 써낸다는 그의 시는, 말 그대로 ‘남이 알려준 것 말고 내가 아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의 이치를 잡아채는 그의 오관五官이 어찌나 섬광 같은지, 읽는 내내 머리끝이 주뼛 설 정도였다. 그의 화집 <마음에 담긴 물이 잔잔해야 내가 보인다> 속 시, 인스타그램(@ikjoongkang) 속 시까지 정독하고서야 나는 속말을 되뇌었다. ‘해답은 여기에 다 있군’. 미술가를 두고 시 이야기만 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그의 시는 그와, 그의 그림과 기막히게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이미 도통해서 더 이상 화학변화가 없는 선시가 아니라, 삶의 진창길을 걸어온 이에게서 나온 ‘그가 아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 빨리, 더 깊게 가슴에 파고드는 시, 그리고 그림.


‘달이 뜬다’, 리넨에 아크릴릭, 60×60×4cm, 2022.
달이 뜬다
미술가 강익중. 1960년 충북 청주 출생. 조선의 화가 인재 강희안과 표암 강세황이 직계 조상인 가계에서 성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후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 대학원 입학. 하루 열두 시간의 잡역으로 학비를 대느라 가로세로 3인치 캔버스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작업(명성을 안겨준 그 3인치 그림의 시작). 1994년 백남준 선생과 휘트니 미술관에서 2인전 <멀티플/ 다이얼로그, 백남준과 강익중> 개최(이를 통해 인연을 맺은 백남준 선생이 그를 ‘전생의 아들’이라 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199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로 참가해 특별상 수상. 파주 통일공원에 한민족 어린이의 3인치 그림 5만 점을 거는 프로젝트(1999년, <10만의 꿈>)를 시작으로 뉴욕 유엔본부,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청사, 뉴욕 지하철역, 광화문 복원 현장, 상하이 엑스포 한국관, 런던 템스강 등에서 수많은 공공 미술 프로젝트 진행. 간추린 이력은 얼마나 건조한가. 이 간소한 이력 사이 전 세계에서 1백만 장을 모았다는 3인치 그림 개수만큼이나 많은 곡절이 담겨 있다.

“백남준 선생님이 식사 도중에 ‘30세기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라고 묻는데 의식이 깨어나는 듯했어요. 한 손에는 과거 1천 년의 장대, 한 손에는 미래 1천 년의 장대를 들고 외줄을 타는, 낮에 별을 보는 무당 같은 사람이었죠. ‘나는 몇 년 앞을 바라보는가’라는 질문을 평생 품고 살게 하셨어요. 생전에 저를 아끼던 김향안 여사(김환기 화백의 부인)의 ‘기회인지 유혹인지 판단하려면 그것이 민족에, 세계에, 역사에 옳은 일인지를 보라’는 말씀도 저를 캔버스 안에서 벗어나게 했고요. 세계의 화해와 평화라는 주제를 제 작업에 끌어들이게 된 계기입니다. 공공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한마디 ‘서로 알고 서로 배우자’를 붙들고 많은 나라의 어린이, 자원봉사자, 홈리스, 미혼모, 알코올의존증자까지 3인치 그림을 함께 그려 한데 설치하는 일에 참여하도록 했죠. 남과 북, 동양과 서양, 인간과 자연을 이을 수 있는 접착 제는 예술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새 연작 ‘달이 뜬다’도 거슬러 오르면 2004년 일산호수공원의 공공 미술과 연결돼요. 아이들 그림을 붙여서 구형 구조물을 만들다 한쪽이 펑 터져버렸는데, 자연스레 이지러진 형태가 꼭 달항아리 같았죠. 위와 아래를 따로 만들어 붙이는 달항아리에서 ‘연결하는 것, 함께하는 것, 포함하는 것’이란 철학을 발견했어요. 이건 제가 하던 공공 미술과도 바로 이어지는 개념이고요. 그때부터 달항아리 작업을 시작했죠. 그리고 이번엔 그 달항아리에서 항아리를 뺀 달입니다.”

시간에 따라 이지러지는 달, 달 주변에 생기는 달무리와 달무지개를 그린 ‘달이 뜬다’ 연작에서 나는 정오靜悟, 곧 고요한 깨달음을 떠올렸다. 현각자들이 깨달음을 얻은 후 한없이 맑고 평안한 자신의 본성을 본 것처럼, 그도 무언가 깨달은 순간 한없이 맑고 평안한 달을 본 게 아니었을까.


‘달이 뜬다’, 리넨에 아크릴릭, 120×120×4cm, 2022.
“1년 반 전 코로나19에 걸려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로 고생했어요. 이렇게 누워도 저렇게 누워도 숨을 쉴 수 없어 마당에 나가 폐를 벌리고 하늘을 바라보는데 달무리가 진겁니다. 그걸 휴대폰 카메라로 찍으려 했더니 반이 없어지고, 좀 있다 보니 다 없어져요. 아, 저건 내가 그저 바라보는 거지,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니구나. 그때 이런 시를 썼죠. ‘(…) 누구나 이 땅에선/ 오며 가며 사는 거다// 만나고 헤어지고/ 이렇게 저렇게 사는 거다’(‘달’). 그러고 나서 달항아리에서 나를 떼보자, 내가 가진 질문·욕심·삼라만상의 심정을 다 빼보자, 했더니 달밖에 안 남는 거예요. 그때부터 달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강익중의 달 그림. 푸른 바탕에 붓질 몇 번 오간 듯한데 주저 없고 순수하고 당당한 달 하나가 갤러리에 휘영청 떴다. 큰 굉음을 들었을 때 고막이 먹먹해지는 것처럼, 그림 속 굉음을 침묵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묘한 작품이다. 주저 없다는 점에서, 아무런 억압도 금기도 없는 어린아이의 생래적 자유와 오랜 숙련을 통해 도달한 대가의 걸림 없음이 모두 들어간 그림이다.


그림이 내 구원이면 안 돼요
삶을 구도 여행으로 파악한 이의 일상 수련이 그의 시라고 여기는 나로서는 그의 시를 또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에스키모인들은 화가 나면/ 풀릴 때까지 걷는다는데// 사방에 눈밖에 안 보이는 땅일 텐데/ 어디가 어딘 줄 알고 다시 집을 찾아가나 (…) 오늘 눈길을 걷고 나니 알 것 같다/ 에스키모인들이 멀리 가지는 못했을 듯// 아무리 큰 화라도 걸으면 풀리니까/ 뒷간 화장지 술술 풀리듯”(‘화’) 나는 늘 깨달음이 특수 유전자를 지닌 이에게만 선사되는 정보가 아닐까 의심하곤 했다. 그런데 강익중에게는 개밥도, 공갈빵도, 이발소도, 산수 문제도 시가 된다. 그런 걸 보면, 치열하게 살 맞대고 사는 세상이 곧 그에게 깨달음이 되는가 보다.

삶을 바라보는 원근법, 화와 노가 격하게 출렁이지 않는 성정은 어머니 그리고 가난에서 배웠다. “3~4년 동안 광화문 복원 현장의 가림막으로 제 작품 ‘광화문에 뜬 달’을 설치 했을 땐데, 어머니는 교회 버스 타고 할머니들과 그 근처를 지나다니면서 자랑 한번 안 하셨대요. ‘우리 아들이 했다고 자랑하면 얼마나 그 사람들 마음에 도움이 안 될 거야. 그냥 속으로만 했지’ 그러시데요. 50년 동안 교회 학교 반사 선생님을 하면서도 아이들한테 반말을 안 하셨어요. 제게도 늘 ‘목에 칼이 들어와도 겸손해라’ 당부하셨고요. 아버지의 사업 실패 후 어머니는 평생 고생만 하셨죠. 어릴 때 제 기억 속 서울 하늘은 무척 차가웠어요. 한국 사회는 한번 못살면 다시 잘살 수 있는 기회가 없는, 약자에게 무서운 곳이죠. 저는 뉴욕에선 굉장히 자신감 있는 사람인데, 한국 공항에만 내리면 뭔가 누르는 것이 있어요. 그건 이 땅에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인 것 같아요. 어머니는 그렇게 고생하셨는데 나는 좋은 거 먹고 화려한 데 가고 할 수는 없더라고요.”


그가 기대고 선 책이 화집 <마음에 담긴 물이 잔잔해야 내가 보인다>. 뉴욕으로 간 1984년부터 지금까지 주요 작품 이미지, 작업하는 모습, 작품 설치 현장, 작업 노트, 가족과 지인 사진, 그리고 그가 잠언처럼 농담처럼 툭툭 써 내려간 시가 담겨 있다. 강익중은 지금 남과 북을 잇는 임진각 <꿈의 다리> 프로젝트를 꼭 이루고 싶은 과제로 삼고 이에 대한 스터디를 이어가고 있다.
“제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도 내가 낸 창문을 통해 세상을 내다보기 위함이죠. 그런데 그건 결국 나를 들여다보기 위함이더라고요. 예술은 ‘내가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 무얼 하는지’ 깨닫게 하는 자기 위치 파악이니까요. 철학이라는 날카로운 바늘로 잠자는 내 영혼을 끊임없이 찔러 깨우면서.”

“예전에/ 어머니 묘지에 핀 들풀을 씹었더니/ 고소한 깻잎 맛이 났다/ 어머니가 해주시던 깻잎무침이다// 다음엔/ 그냥 밥만 싸들고 가야겠다/ 오랜만에 왔으니/ 좀 쉬었다 가라 하시는 걸 몰랐으니”(‘들풀’) 삶의 떫고 쓴맛을 아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 맛을 참고 삼킨 이가 길어 올린 자기 긍정, 자기 극복은 그림에, 시에, 얼굴에 선연하다.

“그림이 내 구원이면 안 돼요. 그림은 싸버리는 똥 같은 거예요. 그림이든 시든 예술은 내가 먹고 내보낸 배설물인데, 내가 낳은 거니까 이거 엄청난 거라고 스스로 자기최면을 걸거든요. 이건 작가가 경계해야 할 대상 1호예요. 여과물에 관심을 가지는 게 아니라 ‘내가 어디서 어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관심을 기울여야죠. 아들 기호(그의 시 속에서 ‘나는 안마 샴푸까지 15불/ 기호는 깎는 데만 30불’이라며 이발소 전쟁을 치르던 그 아들)가 제게 들은 이야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그거래요. ‘국밥집에 가서 밥을 먹더라도 한 숟가락 딱 뜨면서 다 이해할 수 있으 면 돼. 국밥, 그걸 만든 사람의 마음, 그 가게, 그 동네, 그 시, 그 나라까지. 모든 게 이어져 있거든. 징조처럼 말이야. 네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결과물을 딱 하나만 건지고 가면 성공이야. 모든 게 이어져 있으니까.’ 제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도 내가 낸 창문을 통해 세상을 내다보기 위함이죠. 그런데 그건 결국 나를 들여다보기 위함이더라고요. 예술은 ‘내가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 무얼 하는지’ 깨닫게 하는 자기 위치 파악이니까요. 철학이라는 바늘로 잠자는 내 영혼을 끊임없이 찔러 깨우면서. 그렇게 해야 결과물 하나 얻어갈까 말까 하는 게 인생이고요. 자기 위치는 거리를 두고 봐야 비로소 잘 보인다는 게 또 아이러니죠.”

구도자가 평생을 헤매다 돌아오는 곳은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최고 성능의 천체망원경으로 우주를 들여다보면 자기 뒤통수가 보인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세상의 모든 예술도, 종교도 나를 찾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삶은 끝없이 나에게서 달아나려는 투쟁이자, 결국 나로 되돌아오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그의 달 그림에서 엿본다. 다시 바라봐도 그와 그의 그림은 닮았다. 그림 속으로 성큼 성큼 걸어 들어가 자신의 본을 뜨고 걸어 나온 것만 같다. 그림을 보면 그린 이의 인격과 인품이 그 사람을 직접 보는 것보다 더 잘 드러난다는 대화가들의 한결같은 말씀을 떠올리면 이런 나의 생각이 터무니없지 않을 것이다. 늪에 발이 덤벙 빠지고, 미로에 갇히면서 수십 년간 형상을 탐구해온 그가 결국 도달한 곳이 자신을 닮은 모습이라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와 달, 그와 달항아리. 그들이 마주보고 있음이 참 아름답다.


취재 협조 갤러리현대(02-2287-3500)

글 최혜경 기자 | 사진 안지섭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2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