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주택가에 자리한 서예슬 작가의 작업실. 천과 실과 금속이 자연의 생명력을 지닌 예술 장신구로 변모하는 공간이다.
서예슬 작가는 국민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하고 펠트와 금속을 소재로 다채로운 예술 장신구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국내는 물론 벨기에, 미국, 네덜란드, 독일, 영국 등 세계 각국에서 다수의 전시에 참가했습니다.
보드라운 양모 펠트에 장미 줄기 같은 바늘을 찔러 넣는다. 한 번, 두 번, 바늘 돌기가 섬유 속을 헤집을 때마다 양모는 조금씩 끈끈하게 엉겨붙는다. 점점 몸집을 키워 북극곰도 되고, 코끼리도 된다. 자그마한 장신구에 담긴 야생의 세계. 언뜻 앙증맞거나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서예슬 작가의 작품은 곱씹을수록 묵직하다.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동물의 눈, 코, 입이 우리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는 것만 같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계속해서 들여다보게 한다. 오직 동물을 소재로 예술 장신구를 만들어온 지도 어느새 10년. 순진무구한 어린양으로 <행복> 2015년 1월호 표지를 장식한 그가 이번엔 눈처럼 새하얀 소의 얼굴을 건넸다. 2021년 흰 소띠 해를 맞으며 <행복>을 위해 만들어준 작품 ‘연결된 삶-The Connected Life’이다.
‘살아 있는 물고기’, 양모, 리넨, 실, 황동, 140×85×40mm, 2020
처음 동물을 모티프로 삼은 계기가 궁금해요.
대학원에 들어가기로 결정하면서 단순히 배우는 것 외에 내가 원하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내 관심사가 뭘까?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을까? 결국 그게 동물이었죠. 사실 시작은 순조롭지 않았어요. 금속공예를 전공했는데, 금속으로 동물 형태를 만드는 작업이 제겐 맞지 않더라고요.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우연히 양모 펠트 소재를 접하게 됐어요. 펠트는 금속과 달리 망쳐도 부담이 적으니까 가볍게 해보자 싶었죠.
초기 작업 때는 멸종 위기 야생동물에 집중했다고요?
아무래도 위기에 처한 동물에 관심이 갔어요. ‘인간과 동물의 공존’에 관해 보다 큰 의미를 담고 싶었거든요. 개나 고양이처럼 친숙한 동물보다는 자연 속의 동물 이미지를 찾기 바빴던 것 같아요. 그런데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점점 그렇게 멀리 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 시야가 좀 넓어진 거죠. 동물 형태는 사진을 많이 참고하는 편이에요. 실제로 사진을 찾고, 보고, 수집하는 과정 자체가 제 작업에선 무척 중요해요. 같은 동물이라도 사진을 찾다 보면 생김새가 전부 다르거든요. 사람처럼 동물도 각자 고유의 정체성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제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욱 공고해졌어요.
결국 ‘공존’이라는 화두를 계속 확장해가는 과정인 거죠?
맞아요. 사실 초기작은 분위기가 훨씬 어두웠어요. 언뜻 예쁘고 화려해 보였지만, 은근히 비꼬는 시선을 담았죠. 이를테면 이런 식이에요. ‘이건 원래 내 모습이 아니지만 너희 인간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줄게.’ 그래서 액자에도 인위적으로 과한 형태를 막 집어넣었고요. 지금은 보는 이들이 불편함 없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실 동물 관련 이슈나 영화를 찾아보면 평소 동물을 아끼는 사람이라도 보기 힘든 장면이 많잖아요. 단순히 ‘세게’ 표현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구나,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공감하게 하려면 우선 예쁜 말로 시작하는 것도 괜찮겠구나 생각했어요.
서예슬 작가가 꿈꾸는 세계는 모든 살아 있는 것이 오롯한 생명으로서 존재하는 세계다. 화려한 금속 장식, 고상한 나무 프레임에 가둔 감상품이 아니라 하나하나 개별적 자아로서 존재하는 세계다.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알았을 때’, 양모, 리넨, 황동, 실, 50×80×55mm, 2020
‘서로의 자리_말’, 양모, 황동에 금도금, 나무,아크릴 물감, 폴리머 클레이, 플라스틱 안구, 125×145×90mm, 2018
‘기억 조각_닭’, 양모, 황동에 금도금, 나무, 폴리머 클레이, 천, 플라스틱 안구, 75×115×45mm, 2018
동물 형상 뒤의 추상적 오브제는 어떤 의미인가요?
요즘 들어 특히 고민하는 건 ‘조화’예요.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이미지를 장신구에 담아내고 싶어요. 각각의 조각이 모여 넓은 범위에서 하나의 의미를 완성하는 거죠. 그래서 최대한 많은 샘플을 만들어 다양하게 조합해봐요. 이 달 <행복> 표지 작품을 만들 때도 조화에 가장 중점을 두었어요. 과거엔 동물 형상이 너무 구체적이니까 오브제는 단순하게 만들려 했거든요. 그런데 구체적이지 않다고 해서 단순한 건 아니더라고요. 좀 더 복잡한 구조를 사용하면서도 구상과 추상이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모색하게 됐어요. 이번 작업이 제게 또 하나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느껴요.
펠트와 금속의 조화도 한몫을 했다고 봐요.
저도 그 부분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가장 어려움을 느낀 부분이기도 하고요. 어떻게 하면 차가운 물성과 따뜻한 물성의 두 재료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해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천도 넣어보고 나무나 우레탄도 넣어보고 채색도 해보고, 정말 안 해본 실험이 없을 정도죠. 지금도 고민 중이지만 여전히 어려운 문제예요.
지금까지의 전시 중 특히 기억에 남는 전시가 있나요?
아무래도 유일한 개인전인 2018년의 전이겠죠. 그 당시는 사실 동물이 약간 지겨워질 무렵이었어요. 내가 지금 정말 원하는 걸 표현하는게 맞나? 동물을 실물과 똑같이 묘사하는 데만 너무 급급해하고 있지 않나? 이런 생각들이 스트레스가 되더라고요. 추상적 작업을 통해 더 많은 의미를 담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어쨌든 정리가 필요한 시기였어요. 그래도 내가 동물 작업을 이만큼 오래 했으니 개인전도 열고, 도록도 만들어야겠다 싶었죠. 다만 개인전을 위해 또 열심히 작업하다 보니 도저히 안 버려지는 것도 있더라고요.
최근 물고기를 중심으로 한 작업이 변화의 기점인가요?
그런 셈이에요. 개인전 이후 인간 이외의 생물 중 하나를 정해 최대한 다양하게 변화시켜보자고 마음먹었거든요. 사실 물고기 자체에는 큰 의미가 없어요. 다만 곰이나 토끼, 강아지처럼 일반 동물의 경우 사람들이 떠올리는 형태가 너무 구체적이라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폭이 넓지 않더라고요. 물고기는 눈, 아가미, 꼬리 정도만 있으면 이미지를 충분히 변형시켜도 사람들이 어색해하거나 낯설어하지 않으니까 좀 더 재미있게 추상 작업을 할 수 있죠. 지금도 계속 여러 가지를 시도하는 중이에요.
어떤 방향으로 좀 더 나아가고 싶나요?
좀 거창하긴 한데, 저는 사람과 동물이 정말로 조화롭게 잘 지내면 좋겠어요. 작업뿐 아니라 제 삶도 최대한 그 방향으로 가도록 노력하고 있고요. 사실 일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이슈가 너무 많거든요. 이를테면 동물성 재료나 먹거리의 윤리적 실체 같은 것. 물론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니 뭔가를 강요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제 작업을 보는 분들이 동물과 인간에 관해 모르고 있던 사실을 조금씩이나마 알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무척 큰 걸음이라고 생각해요.
구상과 추상의 조화, 펠트와 금속의 조화, 그리고 동물과 인간의 조화. ‘조화롭게 공존한다’는 말은 참 아름답지만, 그건 그만큼 그 말을 현실화하기가 어렵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예슬 작가가 꿈꾸는 세계는 모든 살아 있는 것이 오롯한 생명으로서 존재하는 세계다. 화려한 금속 장식, 고상한 나무 프레임에 가둔 감상품이 아니라 하나하나 개별적 자아로서 존재하는 세계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기에 그는 양모 펠트로 동물 형상을 만들고 금속을 깎아 장식한 뒤 나무 프레임 안에 집어넣는다. 어떤 이는 그의 작품을 예쁘다고 느낄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그의 작품에서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리하여 결국 어떤 이는 작품 너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터이다. 어쩌면 조화와 공존이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그 사소하지만 큰 걸음 하나하나가 서예슬 작가의 작품 세계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