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식 작가가 스웨덴 가구 제작 준장인 시험인 기셀(Gesaällprov)을 위해 제작한 캐비닛 패싯Facet. 약 6백 개의 나뭇조각으로 구성했는데 제작 기간만 5개월이 소요됐다. 벽에 걸어 사용할 수 있으며, 캐비닛의 문을 열어 책상이나 화장대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김진권
최근식 작가의 작품을 처음 마주한 것은 2017년 가을, 북촌에서 열린 <행복작당>에서다. 미닫이로 된 한옥 세살창 한가운데 걸려 있던 캐비닛. 평면적 입면에 입체적 모양을 한 이 작품이 내겐 왜 그토록 숭고해 보였는지. 한 방향으로 정돈된 나뭇결의 표면, 이를 만들기 위해 수십 개의 나뭇조각을 오랜 시간 반복해서 이어 붙였을 작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최근식은 이탈리아에서 산업 제품 디자인을 전공한 뒤 스웨덴 공예학교 카펠라고든Capellagaården에서 3년간 가구 제작을 배운 가구 장인이다. 2015년 스웨덴의 작은 도시 말뫼Malmoä에 디자인 스튜디오, ‘쿤식Kunsik’을 열고 텍스타일을 디자인하는 아내 신서영과 함께 한국, 스웨덴을 오가며 작업 활동을 하고 있다. 스튜디오를 연 그해, 덴마크 가구 브랜드 무토Mutto에서 주최한 탤런트Talent 어워드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올해에는 ‘더 미러The Mirror’라는 작품으로 월페이퍼Wallpaper 디자인 어워드를 수상하기도 했다. 작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와 공예 트렌드페어에 이어 올해는 서울 이태원에 위치한 갤러리 ERD에서 전시 소식이 들렸다. 그의 첫 개인전이자 그동안 해온 작업과 새로운 작업을 한데 모은 의미 있는 전시. 그의 작업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전시 준비를 위해 4월에 한국으로 왔어요. 시골 부모님 댁에서 2주간 자가 격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집 앞에 자리한 텃밭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씨앗을 뿌리고, 정성껏 가꿔 우리의 식탁에 올리는 농사의 순리가 우리 작업 방식과 참 닮았구나. 이번 전시명을 <일상의 감각, Farming>으로 정한 이유예요.”
코끼리 가구로 선보인 세 번째 제품. 직업 특성상 크고 두꺼운 디자인 서적이 많은데, 수납할 마땅한 책장이 없어 직접 디자인한 레일셸프Railshelf다. 참나무와 자작나무 합판을 사용했으며, 책과 오브제를 동시에 수납해 장식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 쉽게 분해와 조립이 가능해 이동하기도 용이하다. ⓒ김진권
2020년 월페이퍼 디자인 어워드에서 베스트 리플렉션Best Reflection을 수상한 더 미러. 거울과 가죽 소재가 지닌 반전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노화와 시간의 흐름을 동시에 투영했다. ⓒ김진권
비 온 후 아스팔트 곳곳에 고여 있는 물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폰드 테이블Pond Table. 작은 물웅덩이에 주변 건물과 하늘이 비치던 모습을 떠올려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로 제작했다. ⓒ김진권
테이블 한쪽에는 아기를 편안히 앉히고, 반대쪽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할 수 있는 캥거루 테이블Kagaroo Table. 아기가 있는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온 날의 경험을 바탕으로 디자인했다. 아기가 성장한 후에는 수납공간으로 활용 가능하다. ⓒ김진권
아내이자 텍스타일 디자이너 신서영과 협업한 카펫 마더Mother. 그녀가 생각하는 든든하고 아늑한 엄마의 이미지를 컬러와 텍스처, 직조 방법으로 표현했다. 스웨덴 러그 브랜드 카스탈Kasthall에서 직조를 맡았다. ⓒ김진권
평범한 일상에서 발견한 씨앗을 쓰임새 있게 만든 그의 작품을 하나씩 들여다볼 때마다 마치 몰래 일기장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상을 언제나 함께하는 아내 신서영과 협업한 작품이 전시장 곳곳에 놓인 것 또한 어찌 보면 당연한 일. “말뫼에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아내와 함께 주변 공원을 산책하는데, 많은 대화를 나눠요. 하루 중 기억나는 일을 공유하기도 하고, 디자인이나 작품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죠. 그 시간이 정말 소중해요.” 두 사람은 올해 초, 스웨덴에서 디자인해 사용했던 가구 중 만족스럽고 양산이 가능한 제품을 아카이빙해 ‘코끼리 가구 (Kokiri Furniture)’를 론칭했다. 벽에 거는 티크 선반을 시작으로 아이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테이블, 큰 책과 오브제를 함께 놓을 수 있는 진열장까지. 누구에게나 하나쯤 필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디자인 가구다. “더 많은 사람이 일상에서 좋은 디자인을 누렸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실제 사용하는 가구도 충분히 아트피스가 될 수 있거든요.”
카펠라고든 잔디밭에는 그림을 그리거나, 간식과 커피를 즐기기 위해 자유롭게 앉아 시간을 보내는 학생이 많다. ⓒHelena Moberg
우리의 카펠라고든 이야기
글 신서영
우리 부부가 카펠라고든에 입학한 후 스웨덴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카펠라고든을 어떻게 알고 왔느냐”였다. 남편은 한국인으로는 처음 카펠라고든 캐비닛메이킹과에 입학했고, 나도 1년 후 텍스타일과에 입학했으니 각 과별로 우리가 최초의 한국인인 셈. 그동안 카펠라고든에 온 동양인 학생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한번은 45여 년 전에 카펠라고든 텍스타일과를 졸업했다며 욀란드Öland로 추억 여행을 온 일본인 대선배를 만난 적이 있으니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많은 일본인이 카펠라고든을 다녀갔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스웨덴의 여름휴가는 한 달에서 두 달 가까이 된다. 겨울만큼 여름이 긴 스웨덴인지라 낮 시간이 충분한 여름을 조금 더 계획적으로 사용하고 싶어 한다. 효율적으로 생활하는 것에 익숙한 스웨덴 사람들은 여름휴가 동안 배우고 싶은 것을 염두에 두었다가, 여름 학기를 수강하는 사람이 많다. 카펠라고든은 여름방학 기간에는 가드닝을 제외한 나머지 세 학과에서 여름 학기를 진행해 짧은 기간 동안 스웨덴 전역에서 온 다양한 연령의 학생들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여름방학 동안 정규 과정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대신 여름 학기를 들으러 오는 학생들로 대체된다. 영어로 진행하는 인터내셔널 수업도 개설하는데, 이때 특히 일본 학생이 많이 온다.
우리는 카펠라고든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애초에 스웨덴에 관심이 없던 나보다는 남편이 어떻게 이곳을 찾아냈느냐가 더 맞는 질문이 될 것 같다. 국내에는 정보가 없었으니 역시나 일본을 통해서였다. 2011년 남편과 나는 핀율Finn Juhl이나 난나 디첼Nanna Ditzel 등 데니시 디자이너들의 질 좋은 가구를 만드는 회사인 기타니Kitani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실무자들과 대화 중 스웨덴 디자이너들을 비롯해 캐비닛메이킹이 전문화되었다는 카펠라고든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당시 한국에서 가구 디자이너로 일하던 남편은 북유럽 전통 방식의 캐비닛메이킹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하고 있었고, 지나가듯 나온 학교 얘기가 분명 쫑긋해진 귓속으로 쏙 들어갔을 것이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밤마다 학교 정보를 찾아 구글을 샅샅이 뒤졌고, 정보를 꼼꼼히 챙겨 지원을 했다. 지원한 것도 잊고 일에 몰두해 지내던 몇 달 후 합격 통지서가 스웨덴에서 우편으로 날아왔고, 그렇게 그는 스웨덴으로 가는 짐을 꾸렸다. 그곳은 할 일도 없고, 추울 테니 가지않겠다던 나를 못내 미안해하며 남겨두고 간 남편은 이내 카펠라고든의 몇 개 학과 중 텍스타일을 강력히 추천하며 그곳으로 나를 불렀다. 몇 달 후 야근과 주말 출근으로 지쳐 있던 나의 몸과 마음에 유독 달콤하게 다가온 그 꼬드김을 못 이기는 척 덥석 물었다.
카펠라고든을 알리는 푯말. ⓒJohan Ekelund
우드 워크숍에서 작업을 하는 학생. ⓒJohan Ekelund
카펠라고든은 칼 말름스텐Carl Malmsten(1888~1972) 이라는 스웨덴의 가구 디자이너가 설립한 학교이다. 칼 말름스텐은 1957년, 그의 나이 69세에 욀란드에 사는 예술가 아르투 페르시Arthu Percy의 소개로 욀란드의 작은 시골 마을인 비클레뷔Vickleby에 처음 오게 되었다. 와서 보니 비클레뷔에는 그가 원하는 것이 다 있었다. 바다와 농장, 그리고 스토라 알바레트Stora Alvaret라는 대자연까지. 스토라 알바레트는 역사적인 목초지인데, 희귀 식물이 자라는 까닭에 세계유산(The World Heritage Site)에 등재된 곳이다. 비클레뷔는 이러한 대자연을 품고 있어 고요한 마을 안에서도 다양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당시에도 욀란드는 1백여 년 전부터 왕가가 여름 별장을 짓고 여름휴가를 보낸 곳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사람이 욀란드에 여름 별장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했지만, 연육교가 없던 때였기에 육지와의 연결 고리는 그만큼 적었다. 말 그대로 작업에 최대한 집중할 수 있는 환경 덕분에 그는 이곳에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아르투 페르시가 제안한 농장을 구입했고, 3년 동안 그 농장을 차근차근 학교로 개조해나갔다. 그리고 그의 나이 72세, 1960년에 카펠라고든이 개교했다.
바람도 많고 돌도 많은 욀란드라는 섬의 동화처럼 예쁜 한 마을에 카펠라고든이 있다. 나와 남편은 욀란드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문득문득 제주도를 떠올렸다. 사과가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는 욀란드에 와서 처음 들었다.
직접 기르는 식물에 물을 주는 유기농 가드닝과 선생님. 이렇게 재배한 채소는 학교 식당에서 식재료로 쓴다. ⓒJohan Ekelund
가드닝과에서 재배한 식물과 가드닝에 필요한 도구를 판매하는 학교 내 유기농 가드닝 숍. ⓒJohan Ekelund
설립 초기 그가 지켜나가고자 한 목표는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그는 가정에 필요한 모든 생활용품을 그곳에서 생산하고, 학교 내에서도 자급자족하기를 바랐다. 최소한의 외부 물품 구입으로도 생활이 가능한 곳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러한 생각으로 가정에서 소비하는 제품을 염두에 둔 학과를 개설하기로 했고, 그가 전문이던 가구를 중심으로 텍스타일과와 세라믹과를 추가했다. 학생들은 학교 기숙사에 거주하며 배우고 생활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고용한 정원사들이 재배한 식재료를 사용했지만, 이후 가드닝 코스를 만들어 유기농 식재료를 자급자족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그래서 현재 카펠라고든에는 가구, 텍스타일, 세라믹, 유기농 가드닝 총 네 개의 과가 있다. 이렇게 물리적으로도 독립할 수 있는 작은 공동체 공간이 마련되었고, 그 안에서 공유하는 규칙도 만들었다. 이런 일상의 단체 생활이 카펠라고든의 독특한 특징을 만들어냈다.
오전에 작업을 하다 10시가 되면 세라믹과 친구들이 만든 잔에 커피를 담아 피카fika(스웨덴 티타임)를 즐긴다. 컵보드에서 좋아하는 오늘의 컵을 고르는 순간도 늘 재미있었다. 점심때가 되면 학교 식당에서 주방장이 만들어준 예쁜 음식으로 식사를 한다. 모든 식재료는 유기농인데, 그중 채소는 유기농 가드닝과 친구들이 아침에 수확한 싱싱한 것이다. 졸업한 친구들이 학교를 방문하면, 이곳에서 머물던 시간이 꿈같았다는 말을 종종 한다. 마치 동화 속에서 생활한 것 같았다고 말할 만큼 친구들과 품앗이도 하며 현실과 동떨어져 오래된 방식으로 살아가던 그 생활이 스웨덴에서도 익숙지 않은 독특한 삶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재우려고 강제로 전원을 끄는 밤 11시까지 나와 남편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작업을 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는 새까만 밤길에는 우리 둘을 둘러싼 지평선 너머로 쏟아지는 별을 볼 수 있었다. 매일 집으로 돌아가던 그 밤길의 공기를 특히 좋아했다. 여전히 스웨덴에 살고 있고 종종 밤에 도심을 걷기도 하지만, 그때 그곳의 밤은 특별했다고 지금도 가끔 그 추억을 꺼내곤 한다.
칼 말름스텐이 이루어낸 곳을 졸업한 학생은 이제 2만 5천 명에 달한다. 졸업생들은 스웨덴 전역으로, 일본 등 각 나라에 돌아가 디자이너로 활동하거나 사업을 시작하거나 혹은 책을 펴내거나 블로그에 기록하거나 다양한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카펠라고든을 알린다. 카펠라고든 졸업생들은 카펠라고든의 홍보대사가 되어 있다. 종종 스웨덴의 다른 곳에 가서 카펠라고든을 졸업했다고 얘기하면 아주 반갑게 “오호 그래?” 하며 눈빛을 한 번 더 반짝여주는 사람들을 만난다.
카펠라고든 Capellagården
주소 Vickleby bygata 25, 386 93 Fa ärjestaden, Sweden
문의 www.capellagarden.se +46 485 361 32
- 가구 디자이너 최근식·텍스타일 디자이너 신서영 일상을 공감하는 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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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말뫼에 작업실을 둔 작가 최근식의 첫 개인전 <일상의 감각, Farming>이 서울에서 열렸다. 그는 전시를 보러 온 사람들이 감상보다 공감하길 바랐다. 각자의 경험을 조금씩 꺼내 덧대어볼 수 있도록.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0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