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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제주다운 카페, 인스밀 문승지 작가와 제주 친구들의 고향 연가
제주의 자연을 벗 삼아온 토박이들은 일찍이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누구보다 제주를 사랑하는 제주의 젊은이들이 ‘인스밀’에 모여‘진짜 제주 이야기’를 들려준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상희, 이준수, 김지원, 문승호, 강수민, 김기하, 김진호, 김태환, 문승지, 현인협.
한국과 일본의 경계에서 한평생 이방인으로 살다 간 건축가 이타미 준(류동룡)이 마음의 고향으로 삼은 곳은 다름 아닌 제주였다. 아름다운 제주 풍광을 사랑했던 그는 제주 곳곳에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건축물을 남겼다. 지금까지도 제주를 가장 잘 표현한 건축가라 불린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이타미 준만큼이나 제주의 자연을 사랑하는 청년들이 나타났다.


가장 제주스러운 곳
“제주도의 멋진 공간 중 정작 제주도 주민이 운영하는 곳은 극히 드물어요. 정말 안타까웠죠. 토박이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진짜 제주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야생 돌고래가 출몰하는 바다를 낀 대정읍에서 방앗간으로 사용하던 오래된 곡물 창고를 발견했어요. 이곳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도 좋겠다 싶었죠.” 제주에서 식음료 사업을 전개하는 이른바 ‘제주도 인싸’ 현인협 대표는 각자의 분야에서 활약 중인 제주의 젊은 친구 열 명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인스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중에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디자이너 문승지가 있었다. “명분은 일이었지만 진짜 일을 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서울과 제주도를 오가면서 친구들도 만나고, 모두가 즐거웠죠.” 사업성을 생각했다면 두 달 안에 끝났을 공사였지만, 누구 하나 재촉하는 사람이 없어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제주의 모습이 조금씩 정제되면서 더욱 선명해졌다. 공간 구성을 기획한 문승지는 기존 건물 구조와 벽을 최대한 살리되 옛것을 억지로 남기는 것은 지양했다. 군더더기 없는 직각 위주의 선만 남기고, 큰 유리창으로 벽을 세웠다. 그러자 싱그러운 제주의 자연이 건물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넓은 유리창 너머로 펼쳐지는 제주의 자연이 인테리어의 전부예요. 처음 들어왔을 때 내부 공간보다는 제주 야자수를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장면을 상상하며 디자인했죠.” 그들이 생각하는 제주스러움을 구현해내기 위해 제주의 자연물을 한데 모았다. 학교 등굣길에 매일같이 보던 야자수부터 동네 뒷산에 즐비했던 화산송이,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물허벅(항아리) 등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정겨운 요소를 공간 곳곳에 녹였다.

인스밀 입구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풍광.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 제주 야자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안과 밖의 뚜렷한 경계 없이 자연과 관계를 맺는다.

인스밀에는 제주를 잘 드러내는 상징물이 곳곳에 자리한다. 손때 묻은 체가 화산송이 위에 올려져 있다.

제주 어르신이 사용하던 항아리를 세면대로 탈바꿈시켰다.

제주의 곡식
제주는 지형 특성상 예로부터 쌀이 무척 귀했다. 그 자리를 대신한 보리는 과거 제주도민의 주식이자 삶의 애환을 고스란히 품은 곡물. 보리를 볶은 뒤 곱게 빻아 만든 미숫가루, 보리개역은 제주도민이 아니면 접하기 힘든 음료다. ‘인스밀In’s mill’은 현 대표의 고모가 제주에서 직접 재배하는 보리를 사용하는데 그 속에 담긴 이야기와 맛을 젊은 감성으로 풀어낸다. 그 보리는 차밭에서 딴 잎과 함께 로스팅해 보리 블렌딩이 되기도 하고, 함께 곁들이기 좋은 스콘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보리를 수확하고, 세척해 말리고, 방앗간에서 빻는 과정까지 일일이 직접 하기에 방앗간(mill)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최근에는 열 명의 친구가 함께 이곳에서 사용할 접시를 빚고 구웠다. 다소 어설프지만 진심이 담긴 접시에서 그들의 진정성이 묻어난다.


인스밀 내부 전경. 기존 건물의 구조와 벽을 최대한 살리고, 외부 풍경에 집중하도록 가구를 최소화했다.

반대쪽 창문으로는 야생 돌고래 떼가 자주 출몰하는 시원한 바다 풍경이 펼쳐진다.

따스함이 느껴지는 인스밀의 저녁 풍경.
모두가 함께하는 공간
모든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인스밀이 위치한 대정은 이른바 ‘젊은 감성’에 익숙한 동네가 아니었다. 법적인 허가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원주민과의 원활한 의사소통. 사람을 좋아하는 현 대표의 역할이 무척 컸다. “한평생 제주도에서 살아온 동네 어르신들 입장에서 어린 제주 친구들이 무언가를 한다고 하니 굉장히 아꼽게 (기특하게) 보신 것 같아요.” 오픈 전부터 불쑥 문을 열고 들어와 에어컨 바람을 쐬고 가는 동네 어르신의 사랑방이 된 지 오래다. 조경이 워낙 크다 보니 잡초가 많이 올라오는데 어르신들이 수시로 와서 검질을 매주기도(잡초를 뽑다) 한단다. 인스밀 지붕에 올린 보리 볏단 지붕도 일면식 없던 제주 민속촌 초가장님을 무작정 찾아가 부탁드린 결과물이다. 인스밀을 완성하기까지 많은 이의 도움이 있었지만 문승지와 연이 있던 덴마크 가구 브랜드 스카게라크Skagerak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덴마크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세계적 가구 브랜드로 성장한 스카게라크가 인스밀 프로젝트의 취지에 반해 협업을 제안한 것. “전형적인 덴마크 이미지를 지닌 스카게라크처럼 인스밀도 제주의 이미지를 온전히 흡수했으면 해요. 저희에겐 뮤즈 같은 존재랄까요.”

인스밀 오픈을 목전에 둔 지금, 재미로 모인 제주의 청년들은 사명감이 생겼다. 제주도에서 활동하는 예술인의 전시나 공연을 위해서라면 적극적으로 이 공간을 빌려줄 계획. “사람들이 이곳을 일반 카페가 아닌, 제주도의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라봐주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7백여 평의 넓은 대지 속 텅 빈 공간을 고집한 이유도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서거든요. 섬사람은 폐쇄적이라는 오랜 인식을 깰 수도 있지 않을까요?”

글 김민지 기자 | 사진 홍기웅(cfc photography)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0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