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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에밀리영 오직 현실을 위한 판타지
마구 퍼지고 뒤엉킨 물감처럼 무수한 추상이 모여 하나의 구상을 이룬다. 잎이든 줄기든 무엇 하나 정밀하게 묘사한 것이 없지만, 우리는 그것이 꽃이고 나무임을 안다. 그리하여 에밀리영 작가가 만들어낸 예술적 환영은 온갖 요소가 공존하며 순환하는 거대한 자연을 보여준다. 상처를 치유하고 현실을 정화하는 강인한 생명력을 품는다.

에밀리영 작가는 영국 브라이턴 대학교 예술대학원을 졸업한 뒤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에서 두 차례 초대전을 연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작품 활동에 집중했고,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선보이며 KIAF, 아트부산, 대구아트페어, 월드아트두바이 등 다수의 국내외 아트 페어에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예술이 인간에게 환영의 장막을 제공하는 것은 비극적인 현실을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평범한 대상들에게 가치를 불어넣고 현실을 칭송하게 하려 함이다. 결국 삶은 예술의 환영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에밀리영의 작가 노트 中

삶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는 많다. 왜 불행한지 깨닫고, 그것과 맞서기 위해 지금껏 자신이 이뤄온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이는 드물다. 앎과 모름 사이, 도전과 체념 사이. 그 갈림길에 선 어느 30대 직장인이 있었다. 좋은 대학을 나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대기업에서 꽤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온 그는 ‘자신이 왜 불행한지’ 깨달았을 때 그저 술자리 안줏거리처럼 불행을 되뇌지만은 않았다. 미련 없이 직장을 그만두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너무 늦은 건 아닌가 불안감이 움틀 때마다 40대가 되어 ‘그때라도 떠날걸’ 후회하는 자신을 상상했다. 그리고 40대 후반이 된 지금, 그림을 그린다. 고요한 작업실 한가운데 오도카니 앉아 붓과 물감으로 강렬한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그는 에밀리영. 무수한 추상 패턴을 통해 가상의 자연을 재창조하며 자신만의 독자적 화풍을 이룬 현대 미술가다.

유학 전까지 미술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고요?
대학에선 서어서문학을 전공했어요. 사실 전공을 택할 때도, 직장을 택할 때도 오래 고민하거나 진지하게 내가 뭘하고 싶은지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직장을 그만두고야 미술 유학을 준비했고, 영국 브라이턴 대학교 예술대학원을 졸업한 뒤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죠. 사실 지금의 저는 어릴 때의 저와는 완벽히 다른 사람이에요. 마치 인생을 1부와 2부로 나눠 산 것처럼요.

‘Trans Liquid Project No.110’, 110×90cm, mixed media on canvas, 2019
원래 미술에 관심이 있었나요?
미술과는 먼 분위기의 집안에서 자랐어요. 관심을 둘 기회조차 없었죠. 그런데 자라고 나니 우울하거나 불행하다고 느낄 때마다 전시관을 찾게 되더라고요. 보통 작은 갤러리에 가면 사람이 별로 없잖아요. 새하얀 큐브 공간에 그림 몇 점만 걸려 있고, 완벽히 적막한 상태에서 나 혼자 그림을 바라보는 그 순간이 너무 완벽하게 행복한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그 갤러리 공간에 반해 미술을 시작한 거나 다름없어요. 공간이 저를 작가의 길로 이끌었죠.

모든 작품에 ‘트랜스 리퀴드 프로젝트’란 제목을 붙였더군요. 이번 <행복> 표지작도 마찬가지고요.
대학원에 합격하자마자 곧장 구상하고 실험하기 시작한 시리즈예요. 제겐 시간이 많지 않다고 여겼으니 그만큼 절박함도 컸죠. 시행착오 끝에 저만의 제작 방식을 완성하기까지 4~5년이 걸렸어요. 그 전에 다른 작업으로 첫 전시를 열기도 했지만, 사실상 작가로서 제 시작점은 ‘트랜스 리퀴드 프로젝트’라 생각해요. 앞으로도 쭉 이 시리즈에 집중할 예정이고요.

물감으로 추상적 패턴을 만든 뒤 이를 정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라 알고 있어요.
그 과정을 제가 완벽하게 통제하는 게 아니에요. 액체가 제각기 섞이고 퍼질 때의 우연성이 키포인트죠. 사실 작가의 개입이 적을수록 아름다운 작품이 나온다고 믿어요. 인간의 머리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제 목표는 최대한 추상적이고 판타지적인 자연의 패턴을 완성하는 거예요. 작가로서 저만의 노하우는 오일, 아크릴, 잉크 등 여러 재료를 조합해 이런 효과를 낼 수 있는 최적의 안료를 만드는 ‘제작 비법’에 있고요.

작업 과정부터 자연을 재현하고 있는 느낌이 드네요.
맞아요. 그렇게 만든 패턴은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이지만, 서로 다른 수많은 패턴을 조화시키면 꽃이나 나무처럼 보이죠. 저는 원초적 자연 이미지를 구현하고 싶어요. 어떻게 보면 태초의 자연일 수도 있고 먼 미래의 자연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작품 안에서 최대한 인간을 배제하는 편이에요. 아직까지는 인간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의 자연이 더 완벽해 보이거든요. 인간이 등장하는 작품은 딱 두 점 있는데, 단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정밀한 형태로 묘사하진 않았어요. 그저 원시 세계에 사는 원시인 정도의 느낌? 사실 모르는 일이죠. 앞으로 제 그림이 어떻게 변할지. 인간이 잔뜩 들어간 풍경으로 바뀔 수도 있고요. 지금도 ‘트랜스 리퀴드 프로젝트’는 계속 진화하는 중이거든요.

왜 자연인가요?
결국 모든 답은 자연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게 자연만큼 완벽하고 아름다운 건 없거든요. 서울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도시인이지만, 자연 속의 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돼요. 실제로 녹색을 가장 좋아하기도 하고요. 저는 궁극적으로 자연의 원초적 생명력을 믿어요. 특히 식물은 인간이나 동물과 달리 요란하지 않게, 조용히,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생명을 순환시키거든요. 그게 훨씬 우아하고 섹시한 것 같아요. 제 작품에 찍힌 무수한 점은 그런 순환 고리를 나타내요. 마치 씨앗이 날아다니는 것처럼요.

작품 속 자연이 일종의 환영처럼 보이기도 해요.
맞아요. 실재하지 않은 판타지적 자연이죠. 다만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오롯이 지금을 즐기기 위한 환영이에요. 어딜 가나 주변을 돌아보면 행복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요. 처한 환경이 다를 뿐 모두 힘들더라고요. 저는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 지금 상황에서 최대치의 행복을 만끽하면 좋겠어요. 제 작품의 소재와 색, 형태가 만들어내는 판타지는 바로 그런 역할을 위해 존재해요.

‘Trans Liquid Project No.126’, 80×80cm, mixed media on canvas, 2019
‘트랜스 리퀴드 프로젝트’의 다음 작업은 어떤 형태일까요?
앞으로 시리즈가 좀 더 단단해지면 완전한 추상 작품도 선보이고 싶어요. 틈틈이 실험 중이긴 하지만, 아직 발표할 만큼 완성된 상태는 아니라서요. 또 하나 도전하고 싶은 분야는 미디어 아트예요. 2018년에 처음 시도해 코엑스 정문 벽면에 선보였는데, 그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 전문가의 손을 빌렸거든요. 프로그램만 손에 익으면 본격적으로 작업해보고 싶어요.

30대의 그에게 예술이 도피가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한 선택이었듯, 그의 예술도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주기 위한 자연의 환영을 만들어낸다. 마구잡이로 퍼져나간 물감이 하나둘 패턴을 이루며 자연의 원초적 생명력을 발산한다. 무엇보다 에밀리영은 현재의 순간순간에 감사할 줄 안다. 오래된 불행의 감촉을 기억하기에 원하는 일을 즐기며 사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안다. 온종일 작업실 바닥에 주저앉아 그림을 그리다가, 고무나무 두 그루가 쑥쑥 자라나는 아파트 거실로 돌아가 완벽한 휴식을 만끽하는 삶. 현실의 비극을 도려낼 순 없지만 적어도 지금 스스로 행복하다 느끼는 삶. 상처투성이 생에서 우리를 치유하는 것이 자연이라면, 그의 삶을 구원한 건 예술이었다.

글 류현경 기자 | 사진 김정한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0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