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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변대용 우화 너머의 세계
몽실몽실한 북극곰 시리즈만으로 변대용 작가를 기억한다면 그의 신작에 당황할 수도 있다. 바둑돌처럼 강렬하게 대비되는 흑과 백, 그 어떤 암호도 수수께끼도 없는 ‘고요하고 고요한’ 작가의 내면세계. 그의 우화가 영원하리라 믿은 건 착각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성실하고 과감하게 자신 안에 길을 내고 있다.

김해시 북부 공장 지대의 낡은 컨테이너 건물들 사이에 조각가 변대용의 작업실이 숨어 있다. 꿈꾸는 듯 동화적 외형을 지닌 그의 작품이 이런 삭막한 풍경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널찍한 작업실을 얻은 덕분에 작품 크기도 커지고, 작가도 더욱 부지런해졌다.
내비게이션이 안내를 종료했을 때, 차는 김해 북부의 공장지대에 서 있었다. 작약산 끝자락의 메마른 풀숲, 경사면을 따라 들어선 대형 컨테이너 건물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조각가 변대용을 찾아온 길이었다. 그가 이 공장 지대 한복판에 새 작업실을 마련한 건 대략 2년 전의 일. 삭막한 주변 풍광이 의외이긴 해도, 과거 부산 도심의 열 평짜리 방에서 매일 사포와 씨름하던 걸 생각하면 1백 평에 달하는 지금의 작업실은 궁전이나 다름없다. 작가는 이곳에서 외부세계와 격리된 채 오직 작업에 매진한다. 그가 최근들어 점점 더 자주, 더 큰 규모의 작품을 쏟아내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아이스크림을 핥는 귀여운 백곰이 아니라 전에 없이 강렬한 흑백 ‘인체’ 시리즈가 가장 최근의 작업인 이유도. 그가 변화하고 있다는 걸 공장용 컨테이너 안에 꾸린 고독한 예술가의 작업실에서 깨달았다.

‘고요하고 고요한’, FRP, resin, variable installation, 2019
작업실이 바뀌는 건 작가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작가의 작업은 공간에 엄청난 영향을 받아요. 조각가의 경우 특히 그렇죠. 공간이 커지면 작업도 많이 하게 되고, 더 부지런해지니까요. 규모가 큰 작품을 만들 때 예전보다는 겁이 좀 덜 나는 면도 있고요.

이미 충분히 부지런하지 않나요? 2007년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시를 열어왔는데요.
직장인처럼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 없다 보니 한번 느슨해지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이 늘어지거든요. 그래서 작업실을 직장이라 생각하고 늘 부지런히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2019년에도 전시를 여러 번 열였어요. 워낙 곰 시리즈로 알려져 그걸 원하는 곳이 많지만, 그래도 매년 한 번씩은 새로운 주제로 신작을 꾸려 개인전을 열려 해요.

곰 외에도 예전엔 디즈니 캐릭터를 많이 다룬 것 같아요. 이달 <행복>의 표지작인 미키마우스처럼요.
대중에게 이미 친숙한 캐릭터를 가져오면 경계심 없이 작품에 관심을 갖게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인간 사회의 여러 면이 숨어 있는 거죠. ‘수상한 미키월드’가 폭력성과 군중심리를 그린 사회 풍자적 작품이라면, <행복> 표지작으로 실린 흰쥐는 ‘호기심 많은 미키’란 작품의 일부예요. 자신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긍정적 소재로서 호기심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죠.

실제로 쥐띠라고 알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쥐를 많이 다루나?’ 농담처럼 생각하기도 했어요. 사실 저는 쥐를 징그럽고 무서운 존재로 여겨왔거든요. 사회에서 학습된 선입견 탓이지만, 어린 시절의 공포스러운 경험도 여러 번 있고요. 제가 어릴 땐 워낙 곳곳에 쥐가 많이 출몰했으니까요. 사람들이 징그럽거나 불결하다고 여기는 쥐와 귀엽고 친숙한 캐릭터로서의 쥐. 그 간극을 여러 작품에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 같아요.

최근 새로운 주제로 선보인 개인전이 2019년 3월 아트소향에서 열린 <고요하고 고요한>인가요?
맞아요. 사실 인체 작업은 2007년부터 꾸준히 해왔지만, 달라진 부분이 많죠. 특히 작업실을 옮긴 뒤 주변 환경이 바뀌면서 자신의 내면을 많이 들여다보게 되더라고요. 도시에 있을 땐 많은 사람이 작업실을 드나드는 데다 저도 중간중간 다른 여가 활동을 하기 쉬웠는데, 지금은 밖으로 잘 안 나가게 되고 만나는 사람의 범위도 확실히 줄었거든요.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훨씬 늘어났어요. <고요하고 고요한>에서 선보인 흑백 조각들은 40대 후반에 접어든 저와 지금 제 내면을 표현한 작품이에요.

대형 컨테이너 속 변대용 작가의 작업실. 그는 온종일 이곳에서 마치 수행하듯 작품을 제작한다. 흙과 석고로 틀을 짜고 플라스틱 재료로 형태를 만든 뒤 샌딩 작업을 끝없이 반복한다. 아주 미세한 땀구멍 같은 흔적까지 완전히 없앤 후에야 도자기처럼 매끈한 질감이 된단다.

‘아기곰’, FRP, 우레탄 도장, 55×25×55cm, 2019.

컨테이너 옆 아담한 건물에는 작가가 주로 스케치 작업을 하는 작은 작업 공간과 주거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다.

이 귀여운 아기 곰들이 최종 작품으로 완성되기까지는 아직 기나긴 반복 작업이 남아 있다.
북극곰 시리즈도 꾸준히 신작이 나오고 있지 않나요?
네. 2009년에 시작했으니 10년이 넘었네요. 곰 시리즈는 사람들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업이에요. 점점 설 자리가 좁아지는 사람들, 그들에게 건네는 제 위로의 선물이 아이스크림이었고요. 최근 작인 ‘코스프레’ 시리즈의 경우,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지금의 20~30대 삶을 담으려했죠. 전체적으로는 모든 작업이 점점 단순화되는 중이에요. 형태도 간결해지고, 설명적인 면도 많이 줄어들었고요.

귀여운 외형 안에 사회문제를 심어둔 우화적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내적 부분도 점점 바뀌고 있나요?
지금은 많이 희석된 것 같아요. 아마 나이를 먹으면서 어린 시절의 콤플렉스가 극복되고, 점점 둥글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만화책을 보며 겨우 한글을 깨친 탓에 열등감이 심했거든요. 무척 예민하고 날카로운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그런 작품이 나온 거죠. 지금은 사회 비판적 시각이 줄어든 대신 젊은 세대를 위로하거나 응원하는 메시지를 주로 담고 있어요.

2020년에도 전시를 준비하느라 바쁘겠네요?
이미 몇몇 전시를 준비 중인데, 신년 첫 전시는 1월 1일부터 4월 26일까지 이상원미술관에서 열리는 예요. 2019년 아트소향에서 개최한 전시처럼 인체 작품 시리즈를 선보일 거예요.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주변과 현대사회의 이면을 날카롭게 풍자하던 변대용 작가는 어느새 자기 내면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있다. 관객과 소통하기 위한 여러 안전장치를 허물고 수수께끼와 암호를 덜어낸 채 오롯이 자신만의 서사를 쌓기 시작한 것이다. 2020년, 그는 또 어떤 신작을 들고 우리 앞에 나타날까? 그가 얼마나 성실한 작가인지 알고 있으니 기다리는 일이 마냥 지루하지만은 않겠다.


조각가 변대용은 부산대학교 미술학과에서 조소를 전공한 뒤 동 대학원 석사와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2000년 중앙미술대전 특선 이후 여러 미술상과 작가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개인전을 열고 있습니다. MCM, 앱솔루트 보드카, 벤타 코리아 등 여러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했습니다.

글 류현경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0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