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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 채화장이 후대에 건넨 선물 한국중중꽃박물관
1887년 1월, 고종 24년 이른 아침. 켜켜이 쌓은 잔치 음식은 비단을 잘라 만든 꽃 상화를 꽂아 장식했다. 왕의 실내 정원인 지장판에 모란 가화가 탐스럽게 피었고, 무희들이 꽃처럼 나비처럼 춤을 추었다. 지난 9월 21일 한국궁중꽃박물관 개관식에서 재현한 조선시대 궁중 연회의 아름다운 장면이다.

양산 매곡리 산자락 아래, 아름다운 팔각지붕 궁궐 누각을 고증해 건축한 수로재와 황수로 박사.

궁궐의 건축 공간과 궁중 채화, 궁중 음식 등의 재현물을 통해 조선시대 궁중 연회를 경험할 수 있는 수로재의 제1전시실.

매화가 좋아 눈 오는 날 매화를 찾아다녔다는 방랑 시인 김시습의 탐매시를 영상 작품과 밀랍 작품으로 재현한 수로재의 제2전시실.

폭포와 정원을 갖춘 카페는 박물관이 위치한 양산 매곡리의 맑은 공기와 풍광을 즐기며 휴식하는 공간이다.
진연에 참석한 대신들은 충심을 채운 술잔을 왕후께 올리며 예와 축하를 전했다. 축하를 받은 왕후는 음식 위의 꽃상화를 빼어 대신들에게 건넸다. 왕후가 내린 꽃을 받은 이들은 저마다 정수리에 꽃을 꽂고 진연을 즐겼으니, 사람도 꽃이 되어 궁궐에는 흥겨운 향취가 가득했다. 고종의 대왕대비인 신정왕후가 망구 해(만 팔순이 되는 해)를 맞은 것을 기념해 열린 1887년의 궁중 잔치인 ‘고종정해진찬의’ 풍경이다. 그리고 2019년 9월 21일, 양산 매곡리의 한국궁중꽃박물관에서 이 성대한 잔치가 재현되었다.


일제가 단절시킨 궁중 문화를 재현한 장인
이날 잔치의 주인공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24호 궁중 채화장인 황수로 박사. 지난 50여 년 동안 고서를 고증하고 연구해 비단과 밀랍으로 손톱만 한 꽃잎을 만들어온 인내의 장인이다. “조선왕조의 기록물에는 궁궐의 꽃 작업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기록으로만 남아 있고 현존하는 유물이 없어요. 어느 나라 문화든지 그 시대 최고의 예술을 보여주는 것이 궁중 문화인데, 일제강점기에 조선왕조 문화 말살 정책으로 조선시대 최고 문화를 단절시켜버렸지요. 이를 역사 속에서 끄집어내 모든 국민이 공유하고 다음 세대가 감상하며 누구에게나 전수하고 교육할 수 있는 박물관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황수로 박사는 고종 때 궁내부 관리를 지낸 외조부 덕분에 가족이 궁중 채화 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자연스레 제작 기술을 전수했다. 1960년대 일본 유학 시절, 전통 지화를 자랑하는 콧대 높은 일본 여성들에게 우리나라에도 궁중 채화 문화가 있다는 것을 소개했다. 그러나 증거로 보여줄 유물이 없어 핀잔만 들었다. 궁중 채화는 잔치가 끝나면 태워버리는 관습이 있었다. 또한 비단에 풀과 꿀을 먹여 만들다 보니 온습도 변화에 민감하고 보존하기가 어려워 남아 있는 유물이 거의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궁중채화 장인이 수십 명에 달했지만, 왕조가 무너지고 일제가 문화 말살 정책을 펴면서 완전히 맥이 끊긴 것이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고향인 부산의 동아대학교에서 국사학 석·박사 과정을 밟았다. 학교의 석당연구소에서 <고려사>를 번역하는 국책 사업에 참여하면서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밀랍을 입힌 채화 작업이 고려시대 충렬왕 때부터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계기로 유명 기업의 외동딸이던 그의 인생이 채화장의 고단한 여정으로 들어섰다. 그때 나이 40대였고 지금은 신정왕후처럼 팔순을 훌쩍 넘겼다. 고증과 재현 작업을 반백 년 동안 이어오는 사이 그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전수자도 여러 명 두었다. 그리고 만년에 이른 장인은 사재와 인생을 모두 담은 박물관을 설립해 궁중 채화를 미래 세대에 전할 준비까지 마쳤다.

벌집에서 얻은 밀랍을 인두로 지져 만든 꽃에는 날씨와 온도 변화에 민감한 궁중 채화의 보존력을 높이고자 한 선조의 지혜가 담겨 있다.

고종정해진찬의에 등장하는 왕의 실내 정원 지장판. 왕마다 지장판이 다른데 고종의 지장판은 난간이 없어 연꽃 가화가 더 부각된다.
순정효황후의 내실을 재현한 비해당
남은 유물이 거의 없으니 재현하기 위해서는 고서를 통해 기록을 찾고 공부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박물관의 전시물도 그와 전수자들이 오랜 고증과 수작업을 거쳐 완성한 것. “사람이 만든 꽃을 우리는 가화라 부르고, 일본은 조화라 부릅니다. 하지만 세계 어느 나라에도 사람이 만든 꽃에 밀랍을 입혀 실제로 벌과 나비가 날아드는 경우는 없어요. 정말로 대단한 우리 민족만의 아름다운 문화인데, 이것이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게 안타까워서 재현하기 시작했지요. <고려사>부터 <조선왕조실록>까지, 특히 <조선왕조의궤>에 아름다운 채화도가 많이 실려 있습니다.”

고서를 토대로 고증해 옛 방식 그대로 재현한 궁중 채화와 다양한 유물은 비해당과 수로재라고 이름 붙인 두 건물의 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다. 비해당은 세종대왕이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에게 직접 내린 당호로, 부모와 임금을 잘 섬기라는 뜻이다. 황수로 박사는 평생 조선왕조 궁중 채화의 전승과 발전에 매진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비해당의 당호에 투영했다. 황수로 박사와 전수자들의 작업실, 차실, 회의실이 있는 비해당의 아래층 제1전시실에는 대한제국 최후의 황제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의 아름다운 내실을 재현했다. 순정효황후는 한국전쟁 당시 부산 해운대 장지 마을에서 3년간 피접 생활을 했다. 황수로 박사가 소장한 진귀한 자개 가구들과 궁중 채화 장식으로 꾸민 방 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며 황후의 당시 삶을 상상해본다.

너른 잔디 정원 너머에 위치한 수로재는 팔각지붕 누각 형태로 지은 웅장한 궁궐 한옥 건물이다. 국가무형문화재들과 장인들이 무려 10여 년에 이르는 철저한 고증 작업 끝에 완성한 이 건물에는 황수로 박사의 아호를 붙였다. 총 네 곳의 전시실과 체험실, 카페와 아트 숍 그리고 폭포와 나무가 어우러진 정원을 갖추어 전통 양식의 아름다움과 현대 건축의 편의를 두루 느낄 수 있다.

<진찬의궤>의 그림 두 폭을 그대로 재현한 전시에서 연회에 사용한 궁중 음식과 음식 위에 꽂은 상화를 세밀하게 감상할 수 있다.

비해당 1층에는 인두를 비롯한 모든 도구를 전통 방식으로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황수로 박사와 전수자들의 작업실이 자리한다.

비해당 2층에 있는 차실은 수로재와 아름다운 주변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스러운 한옥 공간이다.

새로 지은 수로재는 각 분야의 인간문화재와 장인이 참가해 전국에서 고증된 재료를 찾아 10여 년에 걸쳐 전통 궁중 누각 형태로 완공했다.
궁중 연회와 매화를 품은 수로재
수로재의 하이라이트인 제1전시실에는 고종정해진찬의 속 신정왕후의 팔순 잔치를 오롯이 재현했다. 진연에 올린 상화, 화준, 지장판 등의 화려한 채화는 물론 갖가지 궁중연회 음식과 수라상 차림까지 <진찬의궤>의 그림 두 폭을 재현한 장인과 전수자들의 정성에 찬사를 보내게 된다. 아래층 제2전시실의 주제는 ‘매화’다. 박물관이 위치한 동부산의 눈 오는 겨울 풍경을 보여주는 영상 너머로 거대한 매화 가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규장각 선비들이 졸음을 쫓으려고 장난삼아 붓 끝에 촛농을 받아 밀랍꽃을 만들곤했다. 정조대왕이 이를 책으로 남길 것을 지시해 조선시대최고의 문장가 이덕무가 <윤회매십전>을 기록했다. 이 기록물을 발견한 황수로 박사가 고증을 통해 매화 작품을 재현한 것이다. 밀랍을 녹여 꽃잎을 만들고 꽃술은 사슴 털에 송홧가루를 묻혀 만든 가히 인고의 가화다.

이덕무는 시에서 “윤회매는 벌이 꽃을 채취하여 꿀을 만들고, 꿀이 밀랍이 되었다가 다시 밀랍꽃이 피는 섭리가 불가의 윤회설이나 전생후생설과 같다”고 설명했다. 꽃의 생명을 꺾는 대신 비단과 밀랍으로 가화를 만들어 자연과 풍류를 즐긴 우리 선조의 자연 존중 사상과 윤회 사상이 궁중 채화에 깃들어 있다. “개관 전에 박물관을 찾아 밀랍으로 만든 정교한 매화 작품을 미리 본 사람 중엔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린 분도 있어요. 복원에 힘을 보태고 싶다며 기부금을 보내오는 분도 많아졌지요. 이런 관심과 노력이 모여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인 궁중 채화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게 저의 남은 소망입니다.”

제3전시실에는 황수로 박사가 그간 모아온 고려·신라·조선시대의 서화 및 기명들을, 제4전시실에는 모시·삼베·융사 등 채화에 사용하는 계절별 소재와 도구까지 전시해 채화의 역사부터 제작 과정까지 종합적으로 알 수 있다. 세계적 크루즈선이 정박하고 국제 행사가 수시로 열리는 부산. 하지만 내·외국인에게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정수를 보여줄 아름다운 박물관이 거의 없는 게 항상 안타까웠던 황수로 박사는 체험실 마련에도 특별히 신경을 썼다. 벌과 나비가 날아드는 궁중 채화에 요즘 사람들도 날아들어 그 아름다움이 전 세계에 전해지기를. 궁중 채화가 세계의 미래 유산으로 꽃피는 날을 꿈꿔 본다.


오픈 하우스
황수로 박사가 옛 방식대로 재현한 궁중 채화와 귀한 유물을 직접 만나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일시 10월 25일(금) 오후 2시
장소 경남 양산시 한국궁중꽃박물관
참가비 3만 원(정기 구독자 2만 원)
인원 10명
신청 방법 <행복> 홈페이지 ‘이벤트’ 코너에 신청하세요. *프로그램과 참가비 등 세부 사항은 변동 가능.

글 김민정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