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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작가 황규백 꿈꾸는 사물
“나는 운이 참 좋은 사람입니다.” 가난해도 부끄럽지 않은 예술가로 살기 위해 파리로, 뉴욕으로 거처를 옮긴 황규백 작가는 세계적 판화가로 인정받으며 부와 명성을 누렸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붓을 잡고 마치 꿈꾸는 듯 서정적이고 환상적인 풍경과 사물을 그린다.

고풍스러운 거울과 벽난로가 있는 작업실 테이블에 앉은 황규백 작가. 손수 그린 벽화로 장식한 이 공간에서 그는 지금도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작업에 몰두한다.
발코니 벽에 기대선 우산, 탁자 위의 시계, 풍경 속에 덩그러니 놓인 집 한 채. 친숙한 일상 사물을 그린 그림인데 시선을 붙잡는 힘이 남다르고, 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가만히 떠올리다 보면 어느새 작품 속 사물의 감정이 전해온다. “얼마전 가나아트센터에서 전시를 열었는데, 작품을 보러 두 번, 세 번 다시 전시장을 찾는 관객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감동했어요. 내가 그림에 담은 뜻을 잘 알아봐주는구나, 행복했지요.”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황규백 작가의 목소리엔 힘이 넘쳤다. 방배동에 자리한 작가의 작업실은 그의 그림만큼이나 초현실적 공간이다. 벽마다 은은한 색으로 고전적 문양과 로마 신전의 대리석 기둥이 그려져 있다. 푸른색으로 칠한 천장엔 구름이 둥실 떠다닌다. “내가 다 그렸죠. 나 말고 누가 이런 걸 그려주겠어요?(웃음)” 뉴욕에서 활동하며 판화가로 세계적 명성을 누린 황규백 작가는 2000년대 초반 고국으로 돌아와 유화로 매체를 바꿨다. 수십 년간 판화가로 인정받아온 그이기에 회화 작가로 변신하는 일은 더더욱 쉽지 않았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이탈리아로 떠난 그는 프레스코 벽화에서 새로운 길을 보았다. 작업실의 벽화도 당시 만토바 지역에서 본 고성의 안과 밖을 참고해 그린 것.

‘A Tree And Butterflies’, 캔버스에 아크릴과 오일, 122.3x100.7cm, 2018

“좋은 예술은 영혼을 맑게 한다”고 말하는 황규백 작가는 평소 완성한 작품 수십 점을 작업실 벽에 걸어놓는다. 온종일 자신의 작품을 보며 다양한 생각을 떠올리고, 다음에 그릴 작품을 구상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지금처럼 전시 때문에 작품을 모두 작업실 밖으로 옮겨놓아 작업실 벽이 텅 비었을 때 마음 한구석이 무척 허전하다.
파리에서 뉴욕, 다시 서울로
황규백 작가 이전엔 세계적으로 유명한 판화가가 회화를 그려 성공한 경우가 없었다. 행운이 따랐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작가 인생의 고비마다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과감하게 선택했다. 언어를 알아야 문화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기에 프레스코 벽화를 직접 보고 익히려 이탈리아로 가기 전, 그는 일흔 나이에 이탈리아어를 기초부터 배웠다. 그렇게 새로운 길을 찾고, 한국으로 돌아와 유화를 그리기로 결정한 황규백 작가는 자신이 살면서 참 잘한 일 중 하나라고 말한다. “내 평생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파리 갔다가, 뉴욕 갔다가, 서울로 돌아왔어요. 짧지만 아주 행복했지요.” 청년 황규백은 6ㆍ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9월 자원입대했다. 전쟁이 끝난 후 돌아와보니 주변에는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다. 하루는 광화문 파출소 앞을 지나는데, 경찰이 다짜고짜 군대에 입소하는 트럭을 타라고 붙들었다. “전쟁 통에 지옥을 겪은 것도 억울한데 다시 입대해야 한다니 억울해서 눈물이 쏟아졌어요. 제대했다는 증명서를 보여줘도 안 된다고만 하더군요.” 다행히 알고 지내던 장교와 만나 돌아올 수 있었지만 미래도, 원칙도 없는 한국에선 더 이상 못 살겠다는 결심이 굳었다. 2년 동안 어학원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뱃삯을 마련해 요코하마를 거쳐 파리로 떠났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 1968년의 일이었다. 파리행 배에서 만난 일본인 승객은 그에게 몽마르트르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화가를 소개했다. “지금 유럽에는 판화가 유행이니 당장 판화를 배우라더군요. 그이의 소개로 ‘아틀리에 17’을 찾아갔지요.” 피카소, 샤갈 등이 판화 작업을 의뢰하던 그곳에서 황규백 작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판화를 배우고 작업하며 한국에선 느껴보지 못한 해방감을 만끽했다. 파리 생활은 길지 않았다. 공방에서 일하는 그를 눈여겨본 미국인 화상이 경제적 보상을 약속하며 뉴욕으로 옮겨 판화 작업을 계속하기를 권했다. 뉴욕 미술계는 파리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이름 있는 작가도 좋은 신작을 계속 발표하지 못하면 즉시 퇴출되었고, 새로운 작가가 계속 등장했다. 그 역시 파리에서 하던 작업을 모두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공원에 누워 고뇌하던 그에게 계시처럼 손수건 한 장이 날아왔다. 초기 대표작 ‘잔디밭 위의 하얀 손수건’이 탄생한 순간이다. 뉴욕 시절 황규백 작가는 20년 이상 세계 최고의 판화가 중 한 명으로 부와 명성을 모두 누렸다.

고국이 선사한 눈물
4월호 표지작 ‘Two Umbrellas’은 뉴욕 시절 제작한 판화 작품이다. 한 편의 시를 연상시키는 그의 판화는 마치 파스텔화 같은 따스한 색조와 정감을 품고 있다. 황규백 작가는 기다란 바늘로 동판을 직접 긁어내는 메조틴트mezzotint 기법을 현대화한 장본인이다. 17세기 말부터 유럽에서 시작된 이 기법으로 찍어낸 판화는 검은색 배경 일색이었지만, 그는 사물을 서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투명한 안료를 섞어 밝은 회색으로 배경을 처리하는 새로운 기법을 개발했다. 하지만 영원한 건 없었다. 1960년대부터 지속된 판화 유행이 수그러들었고, 바늘로 동판을 긁어 작품을 완성하는 데 한 달이 넘게 걸리는 고된 작업을 계속하기엔 체력이 예전만 못했다. 다시 붓을 잡기로 결심한 그가 전시를 위해 잠시 돌아온 고국은 생각지도 못한 감동을 선사했다. “2002년 월드컵 기간 동안 시청 앞 플라자 호텔에서 묵었습니다. 붉은 옷을 입고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응원하는 광경을 보며 감격에 겨워 눈물을 펑펑 흘렸지요. 꿈도 희망도 없어 떠나온 조국이 이토록 멋지게 변화한 모습에 귀국을 결정했습니다.” 판을 완성해서 찍어보기 전에는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판화와 달리 붓으로 그리면 바로 효과가 나타나는 회화는 훨씬 풍성하고 자유로운 세계였다. 일상적 사물로 비일상적 환상과 풍성한 서정을 불러일으키는 고유한 기법이 회화에서 더욱 무르익었다. 직접 벽화를 그려 완성한 작업실은 그의 낙원이다. 집 안에 걸어놓은 자신의 그림을 감상하며 다양한 생각을 떠올리고, 다음 작품을 구상하는 시간이 그에겐 곧 행복이다. 황규백 작가는 지금도 매일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꼬박 그림에 매달린다. “올해 계획요? 작품 하는 것!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88세의 청년은 오늘도 자신의 그림 속에서 새로운 꿈을 꾼다.

1932년 부산에서 태어난 황규백 작가는 프랑스 파리에서 판화 기법을 배우고, 1970년대부터 미국 뉴욕에서 판화가로 활동했다. 유럽의 전통적 판화 기법인 메조틴트를 독자적 기법으로 현대화한 그는 1984년 사라예보 동계올림픽 포스터를 위한 작품을 제작하며 세계적 판화가로 인정받았다. 2000년대 초반 귀국한 이후엔 회화 작업을 하고 있다. 

글 정규영 기자 | 사진 김정한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