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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규 아틀리에 영원을 꿈꾸던 조각가의 밀실
천재 조각가의 아틀리에는 텅 비어 있었다. 커다란 이젤과 선반과 우물과 작은 가마…. 손수 지었다는 아틀리에 안의 모든 기구와 의자까지 그가 직접 만들었지만, 그가 빚고 구운 조각들이 없는 아틀리에는 모든 것을 잃은 마음의 풍경처럼 정말 텅 비어 있었다. 날카롭고 귀기 서렸지만 그 끝은 늘 텅 비어 있던 그의 눈빛처럼, 그리고 그가 남긴 ‘인생은 空’이라는 짧은 유서의 단호함처럼.

내셔널 트러스트 기행 2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은 시민과 함께 우리 문화유산과 전통 마을을 지키고 가꾸는 일에 앞장서는 재단입니다. 역사와 문화 인물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을 <행복>이 먼저 찾아가 가만히 지켜보고, 귀 기울여보았습니다.

자신의 얼굴 조각이 놓인 아틀리에의 권진규. 사진 제공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지원의 얼굴’로 알려진 조각가 권진규의 아틀리에. 모델을 앉히고 흙으로 쌓고, 저미고, 깎아내고, 가마에 구웠던 조각들이 태어난 곳이고 그가 영원을 향한 먼 시선을 담아냈던 곳이다.
예술적 노동자였던 그는 오후 5시면 작업에서 손을 떼고 아틀리에 밖으로 나와 먼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자기 몸을 누이면 꽉 차는 자기 방에서 일본 문고판 괴테를 읽었다고 생전에 함께 살던 조카는 어제의 일처럼 말해주었다.

옛 불상이나 토우 이외에는 특별한 조각적 전통이 없던 우리나라에서 권진규는 드물면서도 탁월한 조각가였다. 드물었으니 세상의 관심을 받기 어려웠고,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그의 비범한 재능과 조각들은 그의 삶을 고단하게 하고 고난에 처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달동네로 불리던 얼기설기 지은 집들이 차곡차곡 겹쳐져 있는 동선동 언덕을 오르기 시작 해 숨이 차오르기 시작할 무렵 만나는 바로 그 골목에 권진규의 아틀리에가 있다. 그가 흙과 나무를 지고 와 직접 만들었다는 이 집은 살림채 옆의 지붕이 높다란 아틀리에 때문에 동네에서도 조용히 눈에 띄는 곳이다. 지금은 집 바로 앞에 빌라가 들어서서 눈앞에 펼쳐지는 서울 풍경을 가로막고 있지만, 그가 성실한 노동자처럼 매일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꼬박 흙을 빚고 가마에 굽던 아틀리에에서 나와 산동네의 공기를 마시며 먼 곳으로 긴 시선을 보내던 풍경이 있는 곳이다.

권진규의 작은 체구에 딱 맞는 좁은 문을 열면 청동 조각의 기본 틀이 된 인물상들이 그의 방 안에 여전히 살고 있다.

테라코타 조각을 위해 그는 직접 흙을 등에 지고 와 산동네의 이 계단을 타박타박 올랐다.

큰 작품 제작을 염두에 두고 손수 지은 4.5m나 되는 높은 천장의 아틀리에.

선승의 방처럼 적막하고 고요한 권진규 방의 천장.
권진규는 1922년 함흥에서 태어났다. 당시로는 진취적인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석유 대리점을 경영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고, 조용한 소년이었지만 늘 무언가를 응시하는 웃자란 아이였다고 한다. 성공한 사업가인 아버지의 반대로 미술을 자유롭게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북쪽 동해안 바닷가에서 흙을 쌓고 무너뜨리고 다시 매만지곤 하던 소년일 때부터 어쩌면 조각가를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의사가 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형의 병간호를 위해 처음으로 일본에 발을 디딘 권진규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곳에서 꼭 미술 공부를 해야겠다는 단단한 확신을 하고, 형을 따라간 음악회에서 ‘저런 아름다운 음을 양감으로, 형태로 표현하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하는 조용한 열정에 휩싸이게 된다. 결국 1948년 일본에 밀항하고 1949년에는 일본의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입학해 로댕의 제자인 브루델에게서 조각을 배운 시미즈 다카시에게 조각을 배운다. 그곳 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하던 도모라는 여인을 만나 결혼까지 하면서 짧았지만 결혼 생활이라는 것도 경험하고, 전시회도 개최할만큼 일본에서 조각가로서 삶은 순조로운 듯 보였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생활을 길게 영위하지 못한 채 1959년 귀국한 권진규는 어머니와 살기 위한 집을 구하러 이곳으로 왔다. 조각과 건축의 거리는 멀지 않았는지 그는 자신이 작업하는 터가 될 아틀리에와 자기만의 방을 손수 짓기 시작했다. 커다란 조각과 벽화를 제작하기 위해 아틀리에의 천장은 아주 높게 지었고, 작은 계단으로 연결한 2층에는 조각들이 놓일 선반도 만들었다. 천장에서 내려온 굵은 쇠줄이 2층 바닥을 지지하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서, 빽빽하게 가득 차 있던 조각 인물상들의 시선이 향하는 그 허공에서 그는 목을 매었다.

사진 제공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로댕의 제자 브루델에게 사사한 시미즈에게 조각을 배웠지만, 그는 서양 조각의 흐름에 몸을 맡기지 않고 자신만의 작업 방식을 찾아 테라코타 작업과 건칠 작업을 주로 했다. 아마도 조각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메소포타미아의 흙으로 만든 조각들이 그에게는 그리스 로마 조각보다 심정적으로 그리고 촉각적으로 훨씬 가까웠던 모양이다. 아틀리에에는 테라코타 작업에 꼭 필요한 물, 불, 흙을 위해 만든 아주 작은 우물과 길고 좁은 가마, 그리고 흙을 반죽하던 작업대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가 직접 만든 우물은 어찌나 아담한지 여름에는 수박도 담가두었다는 그 작은 우물을 보고 있으면 세상과 섞이지 못하고 고독이 훨씬 더 친근하던 그의 적막하던 삶도 잠시 잊게 만든다. 어머니와 여동생 가족들이 기거하던 살림채와 분리된 아틀리에 옆의 작은 방도 그가 직접 만들었다. 눈빛만 보면 북방의 기사처럼 기골이 장대할 것 같은 그는 의외로 엄청나게 체구가 작았다. 그래서일까. 한 평도 채 안 되는 길고 좁은 방은 지금 보아도 수도승의 방처럼 간결하고 간소하며, 인형의 집에나 나올 법한 작은 나무 문을 열면 왠지 마음이 시려온다. 그곳에도 그가 직접 만든 책장과 작은 책상, 옷 세 벌을 걸 수 있는 일자 옷걸이, 그리고 단추처럼 똑딱하면 켜지는 옛 형광등 한 줄이 아직도 주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렇게 제자리에 놓여 있다.

이 방에서 그는 아침 7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바로 옆의 아틀리에로 가서 작업을 했다. 흙을 빚고 가마에 굽고, 그림을 그릴 때면 드뷔시나 베토벤의 음악을 크게 틀어 음들 하나하나가 높은 천장까지 떠올랐다 회오리치며 그의 귀로 내려왔다. 1968년 일본 도쿄의 니혼바시 화랑에서 초상 조각전을 열었을 때 평단이 “아득한 옛날의 가락을 눈으로 듣는 것 같은 조각…”이라고 평했다는데, 그의 조각에서 배어 나오는 깊은 울림은 아마도 높디높은 아틀리에 천장에서부터 빛처럼 쏟아져 내리던 음악이 흙과 섞여서 나오는 기운이 아니었을까. 예술적 노동자이던 그는 오후 5시가 되면 어김없이 작업에서 손을 떼고 아틀리에 밖으로 나와 먼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몸을 누이면 꽉 차는 자기 방에서 일본 문고판 괴테를 읽었다고 생전에 함께 살던 조카는 어제의 일처럼 말해주었다. 그의 작업을 보면 그는 폭발하는 영감에 기대기보다는 일꾼처럼 엄격하고 성실한 예술 노동자였음이 틀림없다. 이 집은 특별하게도 대문이 두 개인데, 지금은 허물었지만 두 개의 대문 사이에 낮고 긴 벽이 아틀리에까지 이어져 하나는 살림채의 통로로, 하나는 권진규가 드나드는 아틀리에의 통로로 쓰였다고 한다. 모델 작업을 많이 하던 그였기에 그 작은 길로 권진규의 조각으로 남은 많은 지인이 드나들었고, 작품이 완성되면 그들의 얼굴은 그 길의 끝 아틀리에 선반 위에 차곡 차곡 쌓여갔을 것이다.

“범인엔 침을, 바보엔 존경을, 천재엔 감사를….” 이제는 지워지고 없지만 그의 아틀리에 벽에는 이런 낙서가 있었다. 중국의 근대 사상가 루쉰을 좋아했다던 그가 남긴 글인데, 재능이 뛰어나고 영원과 이상과 완벽을 꿈꾸던 그에게는 꽤나 어울리는 문구다. 세상과 일부러 불화한 적은 없으나 아무도 아는 기척도 안 해주는 조각, 특히 구상 조각을 하던 그였기에, 그리고 체구는 작았지만 대륙적 기질을 타고나서 고구려 벽화 같은 큰 조각을 하고 싶던 그였기에 높은 천장을 만들어놓고도 그 높이까지 닿는 작품을 한 번도 만들지 못한 그는 어쩌면 지인들의 얼굴이나 자신의 얼굴을 흙으로 빚으면서 그 안에서 영원을 찾아내는 일을 평생 했을지도 모른다. 건강이 나빠지고 경제적으로도 힘들어지면서 자신의 끝을 알고 꼿꼿이 생을 마감하는 고승처럼 그는 자신의 작품을 소장한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자신의 작품을 보고 온 그 날 ‘인생은 空’이라고 쓴 짧은 유서와 자신의 장례비를 남기고 영원의 땅으로 떠났다. 극도의 치열한 정제를 통해 더 높은 경지에 오르는 예술을 꿈꾸던 그에게 이 아틀리에는 자신만의 밀실이자 영원으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권진규의 조각을 보고 시인 안동림이 “아, 그토록 먼 응시” 라고 말한 것처럼 그의 초상 조각들은 현실 속 얼굴이지만 모두 초월적인 눈빛으로 작품과 눈 맞춤을 한 우리를 늘 먼 곳으로 이끈다.

조각가 권진규의 아틀리에는 현재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시민문화유산 3호로 지정해 지켜가고 있습니다.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은 시민들의 자발적 기부와 후원으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비영리법인입니다. 권진규 아틀리에 외에도 시민문화유산 1호 최순우 옛집, 2호 나주 도래마을 옛집을 보존하며 근대 문화유산의 역사적 · 문화적 가치를 찾아 알리고, 역사 인물들이 남긴 삶의 흔적을 살려내는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주소 서울시 성북구 동소문로26마길 2-15
관람 문의 02-3675-3401, 월 1회 정기 개방(사전 신청)

글 김은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