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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투’ 정찬우∙김태균 씨 지금 웃고 있나요? 그럼 행복한 거야
키득키득 몰래 웃다가 배꼽 잡고 뒤집어지게 만드는 두 남자의 입담에 진중한 사장님도, 얄미운 시누이도, 무뚝뚝한 아버지도 체면을 벗고 호탕하게 웃는다. 우리 동네 터줏대감처럼, 때론 거침없이 살아온 인생 선배처럼, 봇짐 지고 세상 사는 이야기 날라주는 보부상 같은 두 남자. 인생의 둘도 없는 짝꿍으로 살아온 개그맨 정찬우ㆍ김태균 씨 이야기다. 참 재미있는 이 두 남자, ‘컬투’의 이야기.

 


“하나, 둘, 점프!” 온 힘을 다해 점프를 시도한 두 남자의 몸은 가볍게 떠올랐고, 표정은 여전히 익살스러웠다. 수십 차례 반복되는 촬영에도 표정부터 발끝까지 유쾌한 몸짓을 완성한 두 남자, 역시 컬투다.

정찬우 씨가 입은 네이비 체크 슈트는 지오송지오, 스카이 블루 셔츠는 S.T.듀퐁, 블루 보타이는 니나리치맨, 브라운 클래식 슈즈는 발리 제품.
김태균 씨가 입은 네이비 슈트는 지오송지오, 화이트 셔츠와 레드 보타이는 니나리치맨, 브라운 클래식 펀칭 슈즈는 미소페 제품.

“여보세요?” “고객님, 며칠 전에 TV 설치하셨죠? 매우 만족, 약간 만족, 불만족 중 서비스 품질을 골라주세요.” “뭐라고? 잘 안 들리는구먼!” “할아버지, 서비스 품질 조사입니다. 매우 만족, 약간 만족, 불만족 중 하나를 골라주세요.” “뭘 고르라는 겨? 거시기 잠깐 기다려봐요.” “할멈! 매운 만두, 물만두 중에 하나 고르래.” “아이고, 이도 안 좋은데 물만두 하셔!” TV 콜센터 상담원으로 일하는 한 청취자가 보낸 사연이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할아버지와 나눈 웃지 못할 이야기다. 6년째 이어지고 있는 SBS 라디오 프로그램 <두시탈출 컬투쇼> 녹음실 안에는 늘 이렇게 눈물 쏙 뺄 정도로 재미있는 사연이 넘실댄다. 갓난아기부터 목청 좋은 시장 상인, 뒷말 좋아하는 동네 수다쟁이와 백 살 넘은 어르신의 목소리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몰입도 100%로 청취자를 울고 웃기는 이야기꾼이 데뷔한 지 벌써 18년째다. 1994년 MBC 개그맨 동기로 만나 현재까지, 그동안 각자 가정을 일구고 금쪽같은 아이의 아빠도 되었다. 쾌청한 금요일 오후에 사진 스튜디오에서 만난 그들은 조금 지쳐 보였다. “춘천 공연이 바로 있어요. 그 전에 마석에 오픈한 ‘컬투치킨’ 사인회에 가야 해요.” 인터뷰를 서두르는 이 두 남자는 참 바쁘다. 라디오와 KBS <안녕하세요> 녹화, 전국 투어와 사업까지, 그들은 그렇게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매일 달리고 있다.

“웃기니까, 그래서 개그맨 했지”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개그맨이 되는 것이 꿈이었어요. 내가 제일 웃기는 줄 알았으니까요! 초등학교 6학년 때 딱 한 번 닭집 아들한테 져서 2등한 것을 제외하면 항상 장기 자랑 1등이었죠. 그때 참 억울했는데….” 개그맨을 꿈꾸던 소년 정찬우가 다시 꿈을 떠올린 것은 시간이 훌쩍 지난 군 복무 기간 때다. “군대 장기 자랑 대회에 나갔는데 덜컥 1등을 했어요. 문선대(군 공연단)로 차출되어 6개월간 복무했죠. 연예인처럼 머리도 기를 수 있었고, 비교적 자유로웠어요. 그러면서 잊고 있던 어릴 적 꿈이 떠올랐어요. 다시 개그맨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어쨌든 직장 생활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서울예대 음악 동아리 ‘예음회’ 출신인 김태균 씨는 반대로 개그맨을 꿈꾼 적이 한 번도 없다. 대학가요제에 출전하고 SBS 탤런트 시험에 응모하던 그가 개그를 시작한 것은 우연이었다. “전쟁 영화 촬영 보조로 일하면서 오랫동안 산속에 머물렀어요. 촬영을 마치고 내려와 우연히 TV를 시청하는데 MBC 코미디언 5기를 모집한다는 공지가 나오더라고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3분짜리 콩트를 준비해 도전했고, 한 번에 덜컥 붙었습니다.” 당시 레크리에이션 강사를 하던 정찬우 씨와 대학교에서 연기 공부를 하던 김태균 씨는 그렇게 1994년 MBC 공채 5기 동기로 만났다. 지금은 탈퇴한 정성한 씨와 함께 MBC <젊음의 다섯 마당>에서 ‘컬트 마당’이라는 코너를 맡으며 ‘컬트삼총사’가 된 것. 기억하는가? 인기 퀴즈 프로그램이던 MBC <도전 추리 특급>에서 꿀벌의 날갯짓처럼 빠른 말투로 “아이 알쏭, 아이 달쏭!”을 외치며 문제 내던 세 남자의 모습을 말이다.

개그맨이 되었지만,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공연은 미치도록 하고 싶었고, 개그를 할 수 있는 무대는 적었다. 의욕 충만한 세 남자는 방송국을 나와 전국 10개 도시를 돌며 무료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기타 치는 두 명의 친구를 포함해 총 다섯 명이 직접 동네 전봇대에 포스터를 붙이고, 동네 이장님에게 공연 소식을 알리면서 어르신, 학생, 아이들 앞에서 ‘개그 콘서트’를 열었다. 주머니는 가난했지만 무대가 있어서 마음은 충만하던 시절이었다.

개그로 콘서트하는 남자들 수백 번 이상 무대에 올라 이제는 그 숫자조차 모호하다는 그들도 1996년에 가진 첫 유료 공연의 기억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떨린다. “대학로 ‘충돌 소극장’이라는 1백12석의 작은 극장이었어요. 우리가 유명하지 않으니 쉽게 대관해주지 않았습니다. 마침 예정에 있던 팀이 공연을 취소하면서 우리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당시에는 인터넷 예매가 없어 서점이나 음반 가게에서 직접 표를 구매해야 했는데 반응이 없었습니다. 좌석을 채우기 위해 친지들까지 잔뜩 불렀어요. 마침 비까지 오니 환장하겠더라고.” 전국 무료 공연의 힘일까? 공연 시작 한 시간 전쯤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고, 극장 입구에 한 명씩 줄을 서기 시작했다. 매진이었다! 첫 공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니 정찬우 씨의 얼굴이 상기된다. 김태균 씨와 주거니 받거니 10년 전의 시간을 들추며 애틋하게 미소 짓는다. 공연과 연습, 술자리를 반복하던 그 시간, 무대를 위한 갈망과 개그를 향한 열정으로만 가득하던 그때가 컬투의 가장 행복했던 시기일지도 모른다.


“태균이는 노래, 춤, 연기 모두 뛰어난 친구예요. 기본기가 탄탄하죠. 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파트너입니다.” _ 정찬우
“찬우 형은 자유로운 야인野人 같아요. 거침없는 모습이 매력적인 사람이에요. 그의 진가는 무대 위에서 드러나죠.” _ 김태균
블랙 레더 재킷은 토즈, 화이트 피케 셔츠는 빈폴, 네이비 펀칭 레더 재킷은 발리, 블루 스트라이프 피케 셔츠는 라코스테 제품.


“‘개그 콘서트’라는 말을 처음 쓴 것이 우리였어요. 이어 ‘컬서트’ ‘컬투쇼’가 되었죠. 개그로 콘서트를 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궁금해했고, 재미있으니까 소문이 났어요. 당시만 해도 대학로는 연극인들의 무대였거든요. 극장 벽면에 솥뚜껑만 한 얼굴 사진을 붙여놓고 개그 공연을 한다고 하니, ‘이건 뭐지?’ 하고 들어오는 관객이 많았어요. 공연은 매일 매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오로지 공연을 위해 살았어요.” 대학로 공연에만 몰입하느라 방송 출연 섭외가 들어와도 대부분 거절해 건방지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당시 이들의 개그를 짧게나마 엿볼 수 있었던 시간은 심야 음악 방송 KBS <이소라의 프러포즈>가 유일했다. 생활 속 웃음을 찾아주던 그들의 재치 넘치는 입담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청취자 덕분에 먹고삽니다 2002년 성향의 차이로 정성한 씨가 탈퇴하면서 두 남자는 ‘컬트삼총사’가 아닌 ‘컬투’가 되었다. 그리고 온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은 SBS 코미디 프로그램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하 <웃찾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웃찾사>의 창단 멤버이기도 한 컬투는 팝송 가사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해석해 알려주는 ‘그때그때 달라요’, 속담 패러디 코너 ‘짠짠 속담’ 외에 ‘비둘기 합창단’ ‘먹어 배고프니까’ 등의 코너를 진행했다. 그러는 사이 김태균 씨는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고, 정찬우 씨도 KBS일일 시트콤 <사랑도 리필이 되나요?>에 주연급으로 출연했다. 그때부터 TV와 라디오를 종횡무진하는현재까지 그야말로 컬투의 전성시대다. 사람들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며 얄미울 정도로 야스락거리는 두 남자의 매력은 뭘까? 2006년부터 시작한 SBS 라디오 프로그램 <두시탈출 컬투쇼>에 귀를 기울이면 그 정답이 보일까? 주거니 받거니 쏘아붙이는 ‘컬투식 개그’는 다른 개그맨들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매력이 있다. “남자 친구와 헤어졌어요” “그래서 뭐? 다른 남자 만나!” 하고 윽박지르니, 방송 초기에는 그들의 화법에 성을 내는 청취자도 참 많았다. “초반 3개월에는 욕을 많이 먹었어요. ‘뭐 저런 저급 방송이 있느냐?’ ‘당장 폐기해라’ ‘도저히 못 듣겠다’ 거친 말도 서슴지 않았어요. 심의에 걸려 경고도 많이 받았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졌어요. ‘아 이거 좀 세다’ 싶으면서도 깔깔거리며 웃고, 우리가 던진 멘트에 ‘옳소!’하고 끄덕거리기 시작한 청취자가 하나 둘 늘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종종 심의에 걸리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청취자가 인정하고, 방송도 잘되니까요. 하하하.”

지상파 라디오 프로그램 중에서 6년간 청취율 1위를 유지하고 있는 <두시탈출 컬투쇼>의 인기가 비단 그들의 맛깔나는 입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라디오 구성의 대부분이 청취자가 보낸 사연인 만큼 게시판에 수시로 올라오는 흥미진진한 삶의 드라마가 웃음의 소재가 되는 것. ‘바바리맨의 최후’ ‘모태 솔로 25년’ ‘아주머니의 층간 소음 해결법’ ‘부라자 이야기’ ‘겨털의 뜨거운 추억’ 등 제목만 들어도 호기심과 웃음을 유발하는 청취자들의 사연은 컬투의 힘이기도 하다.

18년 동안 함께 일한 만큼 카메라 앞에서도 완벽한 호흡을 보여준 컬투. 스웨이드 하이톱 슈즈는 토즈 제품.

“기억나는 청취자가 참 많아요. 전화 연결을 할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문하성’ 군은 인터넷 검색하면 바로 이름이 나올 만큼 인기 스타예요. 나이에 맞지 않는 구수한 목소리로 식약청에서 근무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해 게시판 전체가 들썩거렸죠. 단단한 목소리로 ‘안전한 먹거리는 제가 책임집니다’라고 말하던 아이, 이제는 중학생이 되었겠네요.” 라디오 장기자랑 대회에서 성우가 꿈이라고 말한 청취자가 진짜 성우가 되어 찾아오고, 전화로 블라인드 데이트를 연결해준 커플이 실제로 결혼 소식을 전해오는 등 <두시탈출 컬투쇼>의 청취자들은 사연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쯤 하니, “청취자 덕분에 먹고산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따로 또 같은 두 남자 두 남자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닮은 듯 참 다르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싫습니다.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부터 아무도 날 알아보지 못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정찬우 씨는 쉽게 ‘알은척’하기 어려운 사람처럼 보인다. 바리톤 가수처럼 목소리가 근사한 김태균 씨는 인터뷰 도중에도 성대모사를 할 만큼 상대방을 편하게 만든다. 성향의 차이는 라디오에서도 잘 드러난다. 솔직한 화법으로 벌새처럼 쏘아대는 사람이 정찬우 씨라면, 김태균 씨는 그 화법을 부드럽게 전달하는 메신저 같다. 정찬우 씨는 김태균 씨에 대해 “내 모자람을 채워주는 사람”이라 말한다.“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이에요. 성격, 취향, 좋아하는 음악까지 다르죠. 우리가 각자 활동했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좋아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아닐까?”라는 질문에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이라 강조하는 두 남자는 공통적으로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을 갖고 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사고로 거리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정찬우 씨 아버지는 그에게 깊은 한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는 친구 같은 분이었어요. 고등학교 때 술을 먼저 권하시고 클럽도 함께 갈 정도로 멋진 분이었죠. 그렇게 친했지만, 잘못된 상황에 대해서는 무서울 정도로 엄격한 분이었어요. 유머도 대단했죠. 주말에는 항상 집 안이 손님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재치 있고, 덕이 많아 사람들이 항상 아버지 곁에 있었죠. 개그맨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해요. 아버지처럼 사는 것, 그것이 제 삶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와 소주 한 잔 들이켜는 것이 소원이라 말하는 그는 이제 재현이와 지인이, 두 아이의 아버지다. “가족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예요. 아무런 조건 없이 제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 그 존재만으로 즐겁고 행복합니다.”

김태균 씨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베트남 참전 후유증으로 그가 여섯 살 때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 사실을 증명하기 어려웠고, 보훈처를 상대로 오랜 법정 싸움 끝에 최근 아버지를 대전 현충원으로 모실 수 있었다. 현충일을 맞아 며칠 전 대전을 다녀왔다는 그는 이제야 마음이 편해졌다고 고백한다.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보험설계사로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궂은일도 많이 당하셨죠. 현재 몸이 조금 편찮으시지만 워낙 의지가 강하신 분이라 곧 좋아질 거라 믿습니다.” 일곱 살인 아들 재원이는 그를 쏙 빼닮았다. 태교 관련 서적을 출간할 정도로 가족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대한민국 최대의 버라이어티 쇼를 꿈꾸다 요즘 정찬우 씨의 최대 관심사는 ‘좋은 일을 하는 팟캐스트’다. 인터넷상의 개인 콘텐츠라 할 수 있는 팟캐스트를 이용해 본인이 받은 혜택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아내에게 ‘언제부터 내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까?’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아내는 ‘그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 당신이 돕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도우라’고 말하더군요. 돈을 벌수록 돈이 사람을 나약하고 더 허망하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머니의 돈과 개인의 행복은 별개입니다. 아직 막연하게 생각하는 단계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팬들이 동참해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죠.”

배움을 통해서 삶의 지혜를 얻는 김태균 씨는 내년 안에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을 하고 있다. 공부도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 고민이라는 그는 살면서 후회가 되는 많은 것에 대해 배움의 부족이 큰 원인이라 생각한다. 원하는 학업의 길이 그가 원하는 혜안과 더 멀리 도약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되어주기를 마음 깊이 응원한다. 짧은 인터뷰 시간의 끝에서 곧 데뷔 20주년을 맞이할 그들이 꿈꾸는 컬투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우리가 언제까지 ‘컬투’로 함께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연예 활동을 하지 않아도 ‘컬투’라는 브랜드는 남아 있겠죠.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기가 좋을 때 손을 놓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대는 박수 치는 사람이 있어야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현재로서는 국내에서 가장 화려하고 버라이어티한 쇼를 완성하는 것이 꿈입니다. 개그맨 중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진짜 쇼. 하나의 신화처럼 남을 수 있는 공연의 아이콘이 되는 것, 가능할까요?” 은퇴는 반드시 무대 위에서 하고 싶다고 말하는 두 남자는 천생 개그맨이다. 벌써 내일 오후 두 시가 기다려진다. 내 라디오 주파수는 이미 107.7MHz에 고정되어 있다.


 스타일링 박명선 어시스턴트 권지영

글 신진주 기자 | 사진 안지섭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