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귀 기울여 들어보니] 합창 지휘자 윤학원 선생 하느님도 독창보다 합창을 좋아하십니다
<남자의 자격> ‘청춘 합창단’이란 TV 프로그램 보십니까? 어르신들이 윤기 나게 목청 다듬어 부르는 합창에 자꾸 웃음과 울음이 물립니다. 열여덟 살의 맥박 같기도, 남은 생을 탄식하는 목청 같기도 한 소리들이 섞여 만드는 화음에 자꾸 감동합니다. 이 거룩한 노래 ‘합창’을 만들며 살아온 합창 음악계의 거장 윤학원 선생을 만났습니다.

삶에 흠씬 두들겨 맞고 돌아온 아버지가 부르는 노래, 남편 저세상으로 보내고 덩그러니 남겨진 엄마의 노래, 병마와 싸우느라 허술해진 몸피로 부르는 아버지의 노래, 수정 구슬 타고 구르는 듯한 ‘요들송 엄마’의 노래, 한 송이 한란이라도 쩌렁쩌렁 피울 듯이 부르는 아버지의 노래…. 올가을 이 엄마, 아버지들의 노래에 자꾸 눈물 질금거리다 애꿎은 가을비만 탓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한세상 견뎌낸 엄마, 아버지들이 몸 밖으로 쏟아내는 노래는 왠지 ‘부르는’ 게 아니라 ‘불려지는’ 것 같습니다. 스님들 사리처럼 노래가 그냥 만들어져 나오는 것만 같습니다. 50년, 60년, 70년 살아온 시간이 허공에 사라진 게 아니라 몸속에, 목소리 속에 남아 있구나, 새겨져 있구나 느끼게 하는 엄마, 아버지들의 노래. TV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 ‘청춘 합창단’ 편에서 우리가 만난 엄마, 아버지들의 목소리입니다. 이렇게 제각기 세월을 쌓은 목소리가 하나의 화음으로 모아져가는 과정을 TV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감격의 현장에서 우리는 지휘자 윤학원이라는 특별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초보 지휘자’ 김태원 씨의 지휘 스승이자 작년 ‘하모니’ 편에서 박칼린 씨가 존경하는 스승으로 소개해 인터넷 검색 1위까지 올랐던 74세 할아버지. ‘대한민국 합창계의 대부’라는 수식처럼 반세기 넘는 시간을 합창 지휘자로 살아온 이 사람. 고작 한두 시간의 몰 두로 철학을 다 깨친 척하는 허깨비들의 세상에서 그가 바친 50여 년의 시간은 보배로운 것입니다. 이 신실한 음악가의 시간을 잠시만이라도 들여다볼 수 있다면 행운이겠다고, 욕심 부려 그를 찾아온 길입니다.

목소리의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 ‘노래’ 말고 다른 단서는 없어 보입니다. 그에게 노래는 삶의 지향점이었으니까요. 손풍금 치며 노래하던 초등학교 1학년 음악 시간, 선생님의 칭찬 덕분에 그는 인생에서 노래를 천명으로 알고 살게 됐습니다. 청교도적인 가풍 속에서 찬송가와 ‘복음송’을 입에서 돌돌거리던 소년, 콩쿠르의 상은 죄다 휩쓴 ‘노래 선수’, 변성기가 찾아와 콩쿠르 무대에서 소리 한 번 못 내보고 내려온 중학교 2학년생, 이후 노래 선수에게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일생일대의 시련, 음악 하면 빌어먹는다던 시절이니 과학자가 되라는 부모님의 바람대로 들어간 인천공고, 학교 밴드부에 들어가서까지 음악을 버리지 못하다 결국 각고 끝에 들어간 연세대 작곡과…. 강물처럼 이어지는 그의 인생 전반기에는 늘 노래가 있습니다. 물론 그 안에 ‘합창’ ‘지휘’라는 단어도 들어 있습니다.

“중3 때 교회 성가대의 찬양을 듣고 감동받았어요.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성인 성가대에 들어간 다음 고등부 성가대를 만들고, 지휘도 했어요. 작곡과 학생이면서도 지휘 공부도 계속 했습니다. 대학 3학년 때 연세대 기독학생회 합창단의 지휘를 시작하면서 YWCA에서 첫 번째 콘서트를 했어요. 한국 초연하는 바흐 칸타타 106번도 하고. 수십 개의 소리를 내가 하나로 모으고 만들 수 있다는 기쁨에 전율했죠.” 그때부터 그는 목소리의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듯합니다. 여치의 가는 다리 같은 음성도, 들새 같은 음성도 ‘합창’이라는 여울에 모이면 하나의 화음이 되어 누군가의 영혼을 맑게 헹구어줄 수 있다는 걸 알아챈 것입니다.

빼곡하게 채운 삶의 음표들
“대학 4학년 때 인천에서 ‘동네 아이들 합창단’을 만들었어요. 대학에서 배운 보이스콰이어(소년만으로 이루어진 합창단) 발성법으로 어린이 합창단을 만들어보고 싶은 거예요. 동네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 사주면서 모았죠. 15평 남짓 되는 우리 집 미닫이문을 터서 아이들 열댓 명을 앉혀놓고 학교에서 배운 방식으로 그 아이들 소리를 바꿔놓은 거죠. 인천의 신신예식장을 빌려서 연주회도 했는데, 공연을 본 인천문화원에서 문화원어린이합창단으로 승격하고 지원도 해줬죠. 텔레비전에도 나가고 꽤 유명했어요. 동네 아이들과 합창단을 시작한 덕택에 사람만 있으면 합창을 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세상에서 가장 간편하고도 빨리 마음을 모을 수 있는 음악이 합창이더라고요. 지금도 제자들에게 이야기해요. ‘지휘할 데 없나? 어린이만 있으면 합창할 수 있어. 그렇게 일산반, 분당반, 성남반 만들다 보면 경기도 합창단도 될 수 있는 거 아니겠나.’” 털뭉치 같은 그의 웃음 때문인지,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 때문인지, 갓맑은 음성 때문인지 애정이 불끈 솟습니다.

(오른쪽) 성악을 전공한 아내와 캠퍼스 커플로 만나 결혼도 하고 한평생 금실 좋게 살아왔다. 아내는 남편이 설립한 국내 유일의 합창 음악 전문 교육기관 ‘서울코러스센터’의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삶의 밀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동인천고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동인천고교 합창단·교사 합창단을 만들고 지휘한 2년 반이 인생 중반기의 시작입니다. 하루아침에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둔 이야기는 참 인상적입니다. “그때 극동방송 합창단 지휘를 하고 있었는데, 반주자인 미국 선교사가 방송국에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제의했어요. 지휘도 하면서 PD, 엔지니어, 아나운서 3역도 하라고요. 가난한 방송국이라 봉급이 교사의 절반 정도 됐나 그래요. 근데 그 자리가 탐났던 게, 방송국이니 클래식 LP가 엄청나요. 기계까지 컨트롤하면서 하루 30분씩 음악 해설 방송을 해야 하니까 그만큼 음악을 많이 들을 수 있겠더라고요. 근데 대학 졸업하자마자 결혼했으니 생활이 문제 아니겠어요? 아내에게 이야기하니 ‘봉급이 문제가 아니다. 발전할 수 있으면 가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극동방송 직원이 돼 바흐에서 현대음악까지 숱하게 듣고 공부했죠. 대학에서 배운 건 게임이 안 될 정도로요.” 전공을 합창 지휘로 바꾸며 웨스트민스터 콰이어 대학으로 떠난 유학, 한국마드리갈합창단의 창단(‘청춘 합창단’ 오디션에서 50년만에 만난 홍숙례 씨가 바로 이 합창단 단원이었다), 한국마드리갈합창단의 공연을 본 선명회어린이합창단(현재 월드비전 어린이합창단) 원장의 제의로 시작한 선명회어린이합창단 지휘, 끝없이 이어지던 연주 여행, 대우합창단 상임 지휘자ㆍ인천시립합창단 예술 감독ㆍ중앙대학교 음대 학장으로 이어지며 성공의 개선문 앞에 올라선 날들…. 어떻게 보면 그의 인생은 지휘에 맞춰 노래하는 성실한 성가대원의 노래처럼 보입니다. 극적으로 치닫지도 않지만 촘촘한 밀도가 있어 더 오래 듣게 되는 아리아 같은. 그는 그렇게 35년 동안 선명회어린이합창단을 지휘했고, 25년 동안 중앙대학교 음악대 작곡과 교수로 살았으며, 한국 합창 역사의 중심이라 할 영락교회 성가대 지휘를 40여 년 가까이 했습니다. 인천시립합창단 16년, 서울레이디스싱어즈 22년도 있지요. 신이 메우라고 주신 인생의 홈들을 성실히 메운 궤적들입니다.

“1970년대 선명회어린이합창단과 함께한 나날은 바로 어제 같아요. 1960년대엔 주로 고아를 단원으로 뽑았고, 1970년대에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뽑았어요. 집이 전세 이상 살면 안 되고, 집에 전화기가 있으면 뽑히지 못했죠. 전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하루에 여덟 시간 이상 연습했어요. 아이들도 음악의 맛을 느끼고 음악의 감동을 아는 사람이 됐죠. 호주 캔버라에 공연을 갔는데 아이들이 아주 잘하니까 제가 지휘를 크게 할 필요도 없고 눈으로 얘기하면서 지휘했어요. 공연이 끝나고 아이들이 우는 거예요. 왜 우느냐고 물으니 ‘선생님, 음악이 너무 좋아요’ 하더라고요. 음악에 도취되어 울 줄 아는 아이들과 지내며 저도 날마다 음악에 감동받았죠. 사람의 목소리가 모여 좋은 노래가 만들어지면 전율이 옵니다. 영혼이 고양되는 느낌, 근심도 욕심도 사라지고 오직 충만감이 존재하는 순간이지요. 1971년에는 호주 다윈의 야외 연주장에서 공연을 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어요. 이 정도의 비면 청중이 다 떠나겠구나 생각했는데, 모두 자리를 지키고 앉아 듣다가 기립박수를 보냈죠. 정말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소프라노 홍혜경 씨, 카운터테너 이동규 씨가 선명회어린이합창단 출신이죠. 요즘 제가 페이스북을 하는데(그의 페이스북 친구는 8백79명이나 된다) 세계 각지에서 ‘나도 선명회 출신이다’ ‘독일에서 음악하고 있다’ 연락하는 단원도 꽤 있어요.” 1978년 선명회어린이합창단은 세계합창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이후 그는 전 지휘자와의 불화 등으로 해체됐다 재창단하는 등 문제 많은 합창단으로 불리던 인천시립합창단을 담금질해 세계적 수준의 합창단으로 만들었습니다. 작년 1월 프랑스에서 열린 합창박람회에 아시아 지역 합창단으로는 유일하게 초청되는, 합창계 최고의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파란 눈의 청중 앞에서 어쩌면 손쉬운 선택인 바흐를 노래하는 대신 시립합창단의 창작 레퍼토리인 ‘메나리’ ‘8소성’을 불렀습니다. 모두 한국 전통음악에 기반한 합창곡입니다. 또 클래식 합창을 동시대인에게 외면받는 가련한 음악으로 두고 싶지 않아 합창에 퍼포먼스를 가미하기도 했습니다. 송창식 씨의 ‘왜 불러’를 합창곡으로 만들고 ‘왜 불러’란 공연도 열었습니다. 합창 공연 제목이 절묘합니다. 왜 불러!

가족이라는 안식
그도 50여 년 가까이 한 울타리를 지킨 가장이자 밥벌이를 감당한 부모입니다. 성악을 전공한 아내는 그 삶의 위로였답니다. 크게 돈을 벌거나 높은 벼슬아치가 되진 않았지만 밥하고 밥벌이한 고마운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답니다. 이들은 몇십 년 동안 밤마다 성경 구절을 두 줄씩 번갈아 낭독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젊은치들이 “서로 다툰 날도 하세요?”라고 청맹과니처럼 물으면 “이 나이가 되니 다툴 일도 없어요. 어쩌다 다투게 되더라도 그건 우리 둘의 약속이니까 꼭 해야 하는 걸로 알아요”라는 현답을 냅니다.

자식이 승업承業하는 것만큼 큰 효도가 없다지요? 그의 아들 윤의중 씨는 창원시립합창단의 상임 지휘자로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는 서울대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바이올리니스트지만, 중학교 때 처음 지휘봉을 잡아 고등학교 때 합창경연대회에서 입상하고 서울대 동아리합창단을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처럼 전공을 지휘로 바꿔 유학한 아들. 이거야말로 아버지와 아들의 평행 이론 아닐까요. 아버지와 아들은 2008년 ‘부자 배틀’이라는 이색 공연을 열기도 했습니다. 윤학원 선생의 인천시립합창단과 윤의중 씨의 창원시립합창단이 ‘배틀 공연’을 펼친 겁니다.

“아버지랑 하면 밑져야 본전” “아들아, 내가 더 부담스러웠다” 말하는 정다운 부자지간. 이들은 내발산동의 아담한 건물 ‘서울코러스센터’에서 층을 나눠 살며 아버지가 설립한 한국지휘자아카데미, 서울레이디스싱어즈, 윤학원 코랄 등을 운영합니다. 고2짜리 이 집 손자도 지 휘자가 되기로 했다니 3대 지휘자가 탄생하겠는걸요. 아내와 아들 이야기를 하는 그는 우리 아버지를 보는 것 같은 감상을 일으킵니다. 남들이 느끼는 만큼, 사는 만큼 사는 걸로 행복해하는 아버지.

(왼쪽) 신이 지휘자인 그에게 준 달란트 중 으뜸은 좋은 눈과 귀란다. 그는 아직도 돋보기 없이 깨알 같은 악보를 보고 미세한 소리의 차이도 잘 찾아낸다.

사람은 독창보다 합창에 맞게 태어났으니
촘촘한 밀도로 산 그 인생을 설명하려니, 왠지 위인의 일대기처럼 된 게 아닌지 걱정입니다. 하지만 그는 “합창은 ‘작업’이다. 어느 날 갑자기 지휘자가 손을 휘두르면 음악이 나오는 게 아니고 한 사람 한 사람 음정, 박자를 만들고 그걸 다시 합해야 노래가 된다. 이루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일을 하나씩 이뤄내는 것. 삶이란 바로 그런 과정의 연속 아니겠냐”며 삶으로 연설해줬습니다. 이런 그 앞에 다른 문장은 들이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합창에서 중요한 건 다른 이를 인정하는 거예요. 독창자가 돋보이게 화음을 만들어줘야 하고, 틈새의 침묵도 즐기면서 내가 노래 부를 때를 기다려야 해요. 독창을 맡으면 최선을 다해 제대로 해내야 하고. 또 옆 사람의 소리를 존경하고 귀 기울여야 내 소리도 근사하게 나와요. 합창이야말로 민주주의를 배울 수 있는 예술이죠. 하느님도 솔로보다 합창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참 묘한 게요, 한 명이 부르다가 1백 명이 부르면 그 음량이 1백 배가 커져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많은 사람이 노래해도 화음이 되게끔 되어 있어요. 하느님도 솔로보다 합창을 좋아하셔서 인간을 그렇게 만드셨다고 생각해요.”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부드러운 털 뭉치로 생각을 두들겨 때리는 듯합니다. 정말 그는 노래를 통해 세상과 인생을 깨친 것 같습니다.

(왼쪽) “지휘자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불러일으킬 때 최고의 환희를 느낀다. 그렇게 되면 손으로 지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눈과 눈을 통해 지휘를 하게 된다.” 합창 음악계의 거장다운 말이다.

“세계에서 지휘로 양대 산맥을 이루는 인물이 미국의 로버트 쇼, 스웨덴의 에릭 에릭슨인데, 로버트 쇼는 삶을 다한 88세까지 지휘를 했어요. 에릭 에릭슨은 93세인데 지금도 지휘를 하고요. 나도 나이가 많아서 죽을 때까지 지휘하다가 갔으면 좋겠다는 게 제 소망이죠. 다행히 하느님이 제게 좋은 귀와 눈을 주셔서 이 나이에도 안경 안 쓰고 깨알 같은 악보를 다 봐요. 얼마나 행복한 삶이에요. 하고 싶은 일 하며 한길로 잘 살다 가는 게. 게다가 게으르고 무슨 일을 하든 딱 부러지지 못한 내가 이 정도라도 살아왔으니 얼마나 큰 축복인가요.” 지휘자로 끝까지 살려면 출렁 거리지 말고 노력해야 한다며 요즘도 그는 공부하고 국내외 가릴 것 없이 연주 여행을 떠납니다. 여전히 젊음의 열기가 더부살이 중인 74세 윤학원 선생. 올여름에도 연미복 쭉 뽑으시고 연주 여행 갔다 오셨답니다. 크고 작은, 강하고 약한, 차고 따뜻한 것들이 만나고 흘러가고 멀어지며 내는 진동. 알고 보면 산다는 건 이렇게 출렁이며 진동하는 합창이 아닐까. 그가 내 마음에 남긴 자국입니다. 나는 이번 주말에도 청춘 합창단의 ‘합창’을 들으며 또 웃고 울게 될 것 같습니다.

글 최혜경 기자 사진 하성욱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