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부산_라이프&스타일]궁중채화 장인 황수로 선생 문화는 역사의 나무에 핀 찬란한 꽃입니다
전주에 한지가 있고 통영에 12공방이 있다면 부산에는 궁중의 내밀한 꽃 장식을 복원하는 ‘한국궁중채화연구소’가 있습니다. 반세기 동안 비단 꽃 장식 ‘궁중채화’를 재현하며 전통 문화를 꽃피운 화장 花匠 황수로 선생. 그는 오늘도 꽃 한 송이에 거대한 우주를 담습니다.


50년 동안 전통 꽃 장식을 연구해온 황수로 선생. 그는 서양 음식과 서양 옷은 잘먹고 입으면서 우리 옷, 우리 음식을 잘못 만드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말한다. 우리 꽃 채화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한국궁중채화연구소(055-366-0036)’를 열고 15명의 제자와 함께 궁중채화를 복원하고 있다.


2007년, 빛깔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황수로 선생이 UN 본부 중앙홀에 섰다. 키가 큰 백인들 사이에서도 그는 눈에 쉽게 들어왔다. 반짝이는 쪽진 머리, 강렬한 눈빛… 거대한 꽃나무 옆에 선 그의 자그마한 체구에서 숙연함이 느껴졌다.

UN 본부의 대단한 찬사 속에서 그가 선보인 것은 궁중 꽃 장식 ‘채화 綵花’다. 현대인에게 다소 생소한 채화는 비단으로 만든 가짜꽃을 뜻하는데 생화를 꺾어 장식하는 것을 금하던 궁중에서 행한 장식법 중 하나다. 마치 살아 있는 꽃나무 같은 이 꽃 장식 옆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곳은 한동안 UN 본부의 명소로 사랑받았다. 서양인들 마음에 ‘동양의 미학’이라는 진한 여운을 남긴 작품은 궁중채화 중 ‘화준 花樽’을 재현한 것이다. ‘화준 ’은 꽃나무를 큰 화병에 옮긴 것으로 조선시대 나라의 잔치가 열릴 때 임금의 자리 좌우에 두던 장식이다. 용무늬가 그려진 대형 화병에 쌀을 채운 후 3m가 넘는 크기의 복숭아 나무를 고정하고 나뭇가지마다 비단으로 만든 꽃을 붙여 완성한 것. 여기에 꽃과 봉오리는 무려 2천여 송이가 소요된다.

전통, 호랑이 수염같이 꿋꿋하게
채화는 지난 2005년 부산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 전시 때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외국인들이 무척 흥미로워했다. 서양에는 기계로 꽃잎을 찍어 만드는 ‘프레스 플라워’가 있지만, 꽃잎을 하나하나 손으로 오린 뒤 인두질을해 입체적으로 만든 이러한 꽃은 없다는 설명이다.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채화. 명맥이 끊어질 뻔한 화려하고 내밀한 궁중 꽃 문화를 전수하고 있는 이는 궁중채화연구소 황수로 선생이다. 그에게 채화 연구는 내가 세상 어디쯤 존재하는지 알려주는 좌표와 같다.

“외할아버지가 고종 때 궁내부 주사를 지내셨는데 꽃 장식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침방에 할머니, 어머니, 이모들이 모여 베를 짜곤했는데 남은 벳조각으로 꽃을 만들던 기억이 납니다. 외할아버지는 그것이 ‘귀한’ 꽃이라고 일러주셨죠. 어린 시절에는 남은 천으로 꽃을 만들며 놀았고, 제 살림을 시작하면서 매일매일 생화로 집을 꾸몄어요.” 그러다 1960년, 도쿄대 교수였던 남편을 따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고 그에게 ‘생활’이던 꽃은 ‘운명’이 된다. “일본 여성들 모임에서 꽃꽂이와 다도를 하는데, 그게 일본만의 전통 문화라고 하더군요. ‘아니다, 우리도 꽃을 장식했다’라고 반박하자 그들은 곧이듣지 않는 거예요. 보고 자란 것이 분명한데, 억울했지요.”

(왼쪽) 석부작으로 꾸민 베란다 공간이 인상적인 해운대의 세컨드 하우스.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 부산 일맥문화재단을 오가는 직원들과 다도회를 여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후 역사적 고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그는 꽃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그가 역사로 전공을 바꿔 학위를 딴 것은 이 때문이다. 그저 놀이로 꽃을 만들던 소녀는 어깨 너머로 배웠던 기억을 더듬으며 꽃 장식을 만드는 화장 花匠이 된다. 사비를 털어 경남 양산에 한국궁중채화연구소를 세우고, 채화 연구와 복원에 힘써온 지 50년, 반세기다. 그간 복원된 화준을 비롯한 채화는 수천 점에 달한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20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집필한 <아름다운 한국채화>를 출간했다. 국어사전에도 표기되어 있지 않은 ‘채화’의 역사, 그리고 그동안 그림으로밖에 볼 수 없었던 채화의 제작 기법을 모두 담았다. 드디어 후손들에게도 채화를 알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

“채화를 이야기하면 갸우뚱하죠. ‘수채화’냐 묻는 사람도 있어요. 그만큼 채화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많고,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지요. 장식과 함께 기원의 의미를 담았던 채화는 연회 후 불태우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앞서 말했듯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생화를 꺾어서 장식하는 것을법으로 금했다. 바로 생명 존엄 사상 때문이었다. 종이로 만든 지화는 물론이요, 떡으로 꽃을 만드는 병화, 꿀을 빼고 남은 찌꺼기로 꽃을 만드는 밀납화, 비단으로 꽃을 만드는 채화까지 살아 있는 꽃을 함부로 꺾을 수 없자 가화 假花는 그 어느 시대보다 더 장중하고 화려해진다. 궁궐 앞마당에는 그대로 보고 따라 만들 수 있는 꽃이 지천이었다. 꽃잎처럼 윤기가 흐르는 명주가 가득했고, 천연 염색도 발달했다. 화려함의 극치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계절과 의례에 따라 기법과 소재가 점점 다양해졌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가벼운 한지 등을 홍화, 봉선화, 쪽으로 물들였고, 가을이면 금실 은실을 엮어 짠 비단에 자초, 연지, 치자 등을 물들여 꽃을 만들었다.

1 비단 등으로 만든 전통 꽃인 채화는 궁중 의례에 사용했던 최고급 장식품이요, 고품격 한국 문화의 정수로 평가 받는다.
2 황수로 선생의 온천장 집. 전통과 현대, 한식과 양식이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3, 4 그의 집 마당에는 대나무, 석류, 연꽃 등 세월을 품은 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5 채화에 필요한 도구들은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것.
6 채화의 가장 높은 경지, 연꽃을 만드는 과정.


“채화할 때 가장 중요한 작업은 염색입니다. 염색이 잘못되면 꽃이 빛깔을 내지 못하니까요.” 황수로 선생은 양산 작업실 텃밭에서 홍화를 직접 재배한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 말린 꽃잎으로 홍색 염료를 만들어 명주에 물들인다. 염색할 때는 꼭 계곡에서 내려오는 지하수를 사용하는데 석회질이 많기 때문이다. 석회질은 천연 매염제 역할을 한다.

홍화 및 쪽과 같은 천연 염료로 비단을 염색한 후 각 꽃과 잎의 모양에 맞게 재단한다. 재단한 꽃잎에 인두로 잎맥과 주름을 만든 후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 밀랍 처리를 한다. 밀랍 처리한 꽃잎은 물에 닿아도 잘 처지지 않으며 색이 빨리 바래지 않게 도와준다(천연 염색한 것이라 햇볕에도 쉽게 색이 바랜다). 이 과정이 끝난 꽃잎을 실로 묶거나 풀로 고정하면 꽃이 핀 모양이 된다. 노루털 혹은 모시 가닥으로 수술을 달고, 동그랗게 솜을 뭉쳐 봉오리를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채화 수천 송이를 이용해 화준 花樽, 상화 床花, 지 당판 池塘板 등 행사에 맞게 음식, 모자 등을 장식하는 것.
화준은 나라의 경사스러운 잔치인 국연 때 임금이 앉는 어좌의 왼쪽과 오른쪽에 놓이는 꽃 장식이다. 꽃 사이에는 온갖 예쁜 새들과 나비, 학, 공작, 봉황 장식 등으로 치장한다. 상화는 왕의 진찬상 위에 놓이는 음식을 장식하는 꽃. 지당판은 가상의 연못을 꾸며놓은것으로 춤과 노래를 하기 위한 꽃 무대다. 왕 옆에 새와 나비가 날아든 나무를 세우고, 가상의 연못까지 만드니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무대인가. 이 모든 작업이 100% 수공예로 이뤄진다니, 명장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뿐이다.

(오른쪽) 차에 꽃잎을 띄운 섬세한 감각이 돋보인다.


UN 본부를 뜨겁게 달구었던 화준. 복숭아 나무를 꽃대로 사용한 것으로 높이가 3m에 이른다.


화장의 일생
“자연에 펼쳐진 꽃을 채화에 담으려면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요. 꽃 잎이 핀 정도도 다 다르게 만들어야 하거든요. 그러니 어찌 쉴 수 있겠어요.” 채화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 꽃 모양을 세심히 관찰하는 것이다. 흐드러지게 피었을 때는 물론 꽃망울부터 지는 꽃까지 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맘때 짓는 꽃은 연꽃, 하지만 완성된 채화를 볼 수 있는 것은 빨라야 이듬해 봄이다. 연꽃은 꽃잎 하나를 만들기 위해 1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결을 만들기 위해서다. 인두질을 한 명주천을 댓살에 감아 비단 실로 총총 묶어둔 후 6개월에서 1년간 두었다 풀면 천연 주름이 잡혀있다. 실을 떼어내고 입김을 불어 꽃잎을 한 장 한 장 둥글게 말면 연꽃이 완성된다. 연꽃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그의 손은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입김으로 기운을 불어넣을 때 엄숙한 표정, 잠깐이지만 고뇌가 느껴진다.

“대학원에 꽃예술학과가 있었는데 학생이 점점 줄어드는 거예요. 결국 불교미술과와 합과되 었지요. 스님들은 꽃에 굉장히 관심이 많아요. 몇몇 스님은 아주 어릴 때 큰스님이 가화 만드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하고요. 하지만 젊은 학생들은 영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아요.”

힘들게 명맥을 이어온 채화가 그를 끝으로 또 끊어질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하는 황수로 선생. 동국대학교 석좌 교수인 그는 지난해까지 강의를 해오다 올해는 쉬고 있다. 억지로 학과를 이어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부는 그처럼 관심이 생기면 하게 마련이고, 그보다 먼저 생활 속의 미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하회마을을 방문했잖아요. 떡을 염색해 만든 병화를 보고 무척 감동했어요. 얼마 전 일본 나오시마에 다녀왔는데, 떡으로 꽃을 만들어 펜던트 조명등에 달아두었더군요. 저도 신년이면 제가 운영하는 골프장에 떡꽃을 만들어 새해 소망을 써보는 이벤트를 해요.” 부산에서 꽤 큰 골프장을 운영하는 그는 기업 경영은 문화 예술과 접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는 이가 3락 三樂을 즐길 수 있도록 골프장 곳곳에 꽃밭을 가꾸고 건물에 꽃꽂이 설치 작업을 하고 있다. 남자 손님이 많아 관심두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바빠서 꽃꽂이를 빼먹은 날은 아쉬워하며 묻는 이가 많단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꽃에 미쳐 있는 아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도 집에 꽃꽂이가 없으면 서운해하더라는 것. 순수한 예술로 남는 것보다 생활 속이나 대중이 함께 즐기는 문화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말하는 황수로 선생. 너무 화려한 문화이기 때문에 현대인의 생활에 접목하기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명쾌한 답을 준다. “가화에는 궁중채화만 있는 게 아니에요. ‘한지’로 꽃을 만들면 참 우아합니다. 정성껏 꽃잎을 지어 브로치로, 테이블 장식으로 활용하면 좋지요.”

꽃을 넘어 생활 예술로
황수로 선생이 재현한 채화 ‘화준’은 조상들이 모시던 신줏단지에서 유래한 것으로 복숭아 나무를 꽃대로 사용한다. 자연에서 시작해 아름다운 꽃으로 변하다 어느새 장엄한 설치 작품이 되는 것. 서울에서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2005년 APEC 정상회담 때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를 보여줘야 하는데, 그게 뭘까 생각해보니 궁궐 문화더라고요. 부산은 역사가 길지 않아 궁궐이 없죠.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닷가에 누리마루를 짓고 우리 궁궐 꽃을 설치하는 것이었어요.” 황수로 선생은 꽃을 장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박물관 전체를 궁으로 꾸몄다. 덕수궁 영상을 배경으로 만들고 온통 채화 장식을 한 것. 당시 우리나라를 찾았던 미국 부시 대통령과 노라 부시 여사는 이를 보고 탄성을 질렀다.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았다. 우리 국민들이 먼저 알아봐주었으면 하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다행히 국악계는 지당판 채화의 재현을 반기고 있다. 전통 국악연희 연구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궁중 연희무대로 연못을 옮겨왔다고 생각해보라. 중앙에 등을 밝히고 주위로 연꽃이 올라가면 그 야말로 신비로운 연꽃의 파노라마다.

“사실 전통 채화를 현대화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작품 발표를 몇 번 했는데, 설치미술 작업을 하면 인간문화재가 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전통 문화 예술가가 아닌, 설치미술가로 분류된다고요.” 꼭 ‘문화재’가 되고 싶은 욕심은 없다. 단, 전통이라는 것은 역사 속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 안 되고, 생활 속에 재창조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것이 명인이 가져야 할 사명인데 간혹 전통의 재현에만 멈춰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오른쪽) 황수로 선생은 지난 20년 동안 고서를 보며 채화 복원에 힘썼다.


(왼쪽) 석부작, 항아리, 음반까지 컬렉터적 성향이 드러나는 세컨드 하우스.
(오른쪽) 황수로 선생은 태창기업 창립자인 일맥 황래성 선생의 장녀로 일맥문화재단 명예 이사장을 맡고 있다. 현재는 그의 장남 최성우 씨가 일맥문화재단을 이어받아 전통 문화를 전파하는 데 힘쓰고 있다.

(왼쪽) 밤늦도록 베틀에 올라 베를 짜는 어머니를 보며 자랐고 물들이는 법을 자신도 모르게 터득했다는 황수로 선생. 이른 새벽 홍화꽃을 따던 기억, 홍화떡을 만들어 두었다가 물들인 옷을 명절에 입었던 기억이 난단다. 지난해 1년 동안 말린 홍화꽃으로 홍화떡을 만들어 10가지 붉은색을 낸다.
(오른쪽) 동부산 컨트리 클럽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황수로 여사. 수국, 수련, 원추리 등 계절마다 수백 종의 다른 꽃을 볼 수 있다.


그는 평소 좋아하는 대나무 설치 작업과 채화를 접목하려고 한다. 실생활에 채화가 접목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연구 중이다. 또한 대중이 채화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무료 강습, 백화점 강좌 및 화장 양성을 위한 교육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가화 역시 사람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산물이라 여겼다. 가짜 꽃이라도 가둬두고 보겠다는 욕심 아닌가 하는. 하지만 1년을 기다려 꽃잎 하나하나 숨결을 불어 넣는 모습을 보자니, 그 또한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자 경외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장인을 만나면 언제나 손을 관찰하게 된다. 수십 년의 인생이 깊은 주름진 손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꽃 한 송이에 우주를 담는 명인의 손은 어떠한가. 비단을 재단하고 다듬이로 두드리고 인두로 일일이 지져 꽃잎을 만드는 그의 손은 예상대로 성한 날이 없어 보인다. “사람 손으로 만들다 보니 꽃의 표정이 하나 하나 다 다릅니다. 그건 바로 꽃의 생명력입니다. 매일 그 생명을 만나는 것이 채화의 매력이지요.”

글 이지현 기자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