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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기울여 들어보니]<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펴낸 유홍준 교수 우리 인생도 한 편의 답사기아니던가
2백60만 부가 팔려 나가며 인문서 최초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년 만에 여섯 번째 시리즈가 세상에 나왔다. 유홍준 교수는 이 책을 ‘6권’이 아닌 ‘시즌 2’로 부른다. 1권에서 6권 사이에 20여 년이란 틈이 있고, 문화재청장으로 국록을 먹고산 시간까지 더한 시즌 2. 그는 이 안에 어떤 마음을 담았을까. 그의 이야기를 좇으며, 그의 답사기를 읽으며 잠시 생각했다. 우리 인생도 한 편의 답사기가 아닐까.

도시의 흐린 삶이 못내 지루해 날씨마저 흐리게 느껴지는 오후였다. 그와 한 약속 시간까지 틈이 생긴 나는 경복궁엘 들렀다. 그를 만나기 전 치러야 할 의무 같았다. ‘국보 몇 호, 팔작지붕, 다포식 건물’ 같은 건조한 안내 문구를 읽는데 근정전의 치미(이 글에서만큼은 각주를 읽어야 알아듣는 단어가 나와도 이해하시길. ‘치미’는 목조 건축에서 용마루의 양 끝에 높게 부착하던 장식기와다. 새의 꼬리 내지는 물고기 형상을 했다)에 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 쉬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 게 새이고 어느게 치미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비둘기가 앉은 근정전 지붕이 능선으로 흐르고, 그 뒤로 근정전 오른쪽의 북악산, 왼쪽의 인왕산이 능선을 만들며 흐른다. 어느 게 사람이 한 일이고 어느 게 자연이 한 일인가 싶다. 한 시간 후 나는 감나무가 마당의 상석을 차지한 수졸당에서 그를 만났다. 대문 안에 들어서면 이곳이 논현동인 걸 잊을 정도로 고적해 아까 그 비둘기가 날아들 것만 같은 집이다.

“이게 매실 냉차예요. 귀한 건데.” 맵싸한 느낌의 눈매 사이로 그가 희미한 웃음을 내보였다. 건축가 승효상 선생이 설계했다는, 한옥과 서양 주택의 형태ㆍ철학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이 집에서 그는 스무 해 가까이 살았다. 건축가와 집주인이 ‘상호 믿음’ 아래 최소한의 땅에, 최소한의 돈으로 잘 지은 이 집은 아직까지도 주택 설계의 모범이다. 이 집에서, 갈라진 벽지에도 문기 文氣가 서려 있을 듯한 서재에서 그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화인열전> <완당평전> <한국미술사강의> 등을 썼다. 빚을 내 집을 지은 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잘돼서’ 다행히 대출금도 빨리 갚았다(수졸당은 이 집의 당호다. 수졸 守拙은 바둑 초단의 별칭으로 ‘겨우 자기의 집이나 지킬 정도’라는 겸양이 담겨 있다).

(왼쪽) 논현동 주택가 골목길에 자리한 유홍준 교수의 자택 ‘수졸당’에서. 그는 이 집에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대부분 썼다.

아는 만큼 보인다! 1990년대 초ㆍ중반 그의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인문서 최초로 밀리언셀러가 되면서 전국에 답사 열풍이 일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그의 말은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고, 그의 글은 국민의 미감을 바꿔놓았다. 요즘엔 <1박 2일>에 나오면 명소가 된다는데, 그때는 그의 답사기에 실린 곳이면 사람들이 몰려갔다. 무관심 속에 방치된 문화유산을 대중도 돌아 보고 사랑하기 시작했다. 박완서 선생은 그 책을 읽고 평소답지 않게 약간 흥분하며 “읽고 깨우친 바 기쁨이 하도 커서 말하고 싶은 걸 참을 수가 없다”고 쓰기도 했다. 1990년대 마이카 시대가 시작되면서 어디론가 달리고 싶은 운전자들이 이 책을 베스트셀러에 올렸다는 말도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지금까지 2백60만 부가 팔렸다. “1권은 1991년 5월부터 월간지 <사회평론>에 연재한 걸 모아 펴낸 거예요. <사회평론>에 연재하면서 원고료도 못 받았어요. 내 전공이 미술사라 문화재를 찾아다녔고, 혼자 보고 좋아하는 게 아까워 학생들과 답사객을 안내했는데 내가 설명을 재미나게, 설득력 있게 하니 그걸 글로 써보라 하대요. 그래서 난 ‘조건이 있다, 세 번만 쓰겠다, 원고는 80매를 써야 할 것 같은데 그걸 다 실어달라’ 했죠. 그래서 세 번 썼어요. 원고료도 안 주니까 계속 쓸 이유가 없지. 딴 사람 쓰라고 했는데, 다른 이들이 그 식으로 못 쓰겠다 했다네. 그래서 내가 다시 짊어지긴 했는데, 그때 내가 백수 시절이라 돈 벌어야지 그것만 쓰고 있을 순 없어서 한 번은 펑크를 냈어요. <사회평론>이 진보계 학술지니까 내 글은 없어도 그만이었거든요. 그런데 내 글이 안 실리니까 독자 항의가 꽤 있었대요. 그 뒤로 한 번 더 펑크를 냈더니 미국에 사는 독자가 ‘혹시 필자가 죽었냐’라고 묻더랍니다. ‘그 사람 글 안 실리면 잡지 안 보겠다’는 뜻이지. 편집자도 놀라고 나도 놀라고.” <사회평론>에 첫 연재가 나간 뒤 백낙청 서울대 교수(우리나라의 대표적 문학평론가로 <창작과 비평> 창간 편집인)가 그에게 단행본 출간을 제안했다.

(오른쪽) 표정이 하도 귀여워서 그가 구입한 제주도 동자석.

1990년대 초중반에 대학을 다닌 내게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애틋한 책이다. 세상은 온통 폭풍우 같고, 나는 불덩어리이고 싶은 청춘 시절. 그의 글은 나를 길 위로 내보냈다. 역사학도인 내게 그의 글은 전공서에선 볼 수 없는 이야기가 담긴 ‘문화재 논픽션 소설’ 같았다(백낙청 선생은 그의 글 중 서산 마애불편과 안동편은 단편소설의 플롯을 완벽히 갖춘 글이라 평했다). 읽은 지 15~16년이 다 돼가는데도 책에 담긴 이야기는 여전히 기억난다. 맛난 식당과 여관, 답사 현장에서 만난 정겨운 사람들 이야기, 먹이인 줄 알고 고려청자를 물었다가 그물에 걸려든 주꾸미 이야기, 대기업을 다니는 동생 부부와 서산 마애불을 다녀올 때의 쑥스럽고도 애틋한 에피소드. 심지어는 개 이야기도 기억난다.

답사객이나 불자가 오든 말든 눈꺼풀만 들었다가 감아버리는 강진 무위사의 게으름뱅이 누렁이 이야기, 무척 부지런해서 자기 집 손님의 거동을 살피며 길을 인도하는 해남 유선여관의 노랑이 이야기까지. 1권에서 읽은 이 이야기가 3권까지 이어져 무위사 누렁이는 세상을 떠났고 노랑이는 1권을 읽은 답사객의 지나친 관심으로 대인공포증이 생겼다는 이야기까지. 이렇듯 그의 글은 단순한 문화재 소개서나 답사기가 아니라, 문화유산에 얽히고설킨 기쁨과 슬픔을 이야기하고, 그 문화재 속에 살다 간 사람의 눈물, 웃음, 깊은 정신을 이야기했다. 그의 책은 나 같은 청춘들의 가슴을 트이고 깨우치게 했다.“뭐 거창한 건 하나도 없어요. 미술사를 전공한 내가 답사 현장에서 만난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글로 이야기해주면 좋겠다 싶었죠. ‘소파에 누워서 볼 수 있는 한국 미술사’라고 할까요. 내용은 전문적이더라도 형식은 대중적인 언어로, 쉽게 풀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어요.” 감정의 침입이라곤 한 치도 없는 표정으로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백낙청 선생은 그를, 그의 글을 이렇게 ‘평론’했다. “자네의 두뇌 구조는 ‘학자 반, 연예인 기질 반’이야. 내용은 있는데, 다양한 형식으로 풀어낸단 말이야. 학생, 가정주부, 노인까지 즐겨 읽을 수 있지.” 황석영, 백기완과 함께 ‘대한민국 3대 구라’, 이어령, 김용옥과 함께 ‘교육 방송용 구라’라 불린다는 그의 말발과 글발은 사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자다가 생각나면 일어나 고치고, 글을 출판사에 넘겨놓은 후에도 문장을 다듬고 통째로 바꾸기도 해요. 운전하면서 생각이 떠오르면 출판사 편집자나 조교에게 전화를 걸어 ‘어제 보낸 이 구절을 이렇게 고쳐달라’고도 합니다. 내가 독자에게 설명하려는 게 잘 표현됐나, 빠뜨린 건 없나 늘 고심하기 때문에 징그러울 정도로 퇴고하는 거죠. 내 책을 맡은 출판사의 편집자는 지독하게 까다롭다고 욕할 수도 있겠지만. 하하.” 그가 잠시 발열하듯 웃었다.

(왼쪽) 글쓰기에서 ‘제대’하고 나면 그는 제2의 고향이라 부를 정도로 사랑하는 부여 반교마을에서 ‘반교마을 청년 회원’으로 농사지으며 살고 싶다.

답사길에서 만난 상수들 그가 2004년부터 4년 동안 문화재청장을 지내느라, 그 후엔 <한국미술사강의> 등을 쓰느라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이 10년만에 세상에 나왔다. 이번엔 ‘인생도처유상수’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인생의 도처엔 상수 上手가 있다’라는 뜻이다. “바둑에서 나보다 잘 두는 사람을 상수라 하죠. 하수가 아닌 상수. 고수와 어떤 차이냐면 상수는 상대평가까지 포함된 고수인 거죠. 오랜 세월 답사를 다니다 보니 문화유산이 창조되는 데는 무수한 상수의 노력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세상이 알아주든 말든 묵묵히 문화유산을 지키며 살아가는 필부 또한 인생의 상수들이었죠. 문화유산의 가치를 밝혀낸 이들도 내가 따라가기 힘든 상수죠. 경복궁 근정전 앞뜰의 박석이 지닌 가치를 발견해낸 경복궁 관리소장, 광주비엔날레 대상 수상작의 의미를 천연덕스럽게 해석해내는 촌로, 노비 출신으로 경회루의 대역사를 이뤄낸 박자청, 일반인은 알지 못하는 봄나물을 줄줄 꿰고 있는 무량사 사하촌 할머니들…. 모두 남들이 모르는 깨달음을 얻은 상수들입니다. 답사 현장에서 만난 이 상수들의 에피소드를 전하면서 이번 답사기를 엮어가면 두 배의 감동과 재미로 우리 문화유산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중뿔나게 ‘우리 인생도 한 편의 답사기 같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세상을 돌며 수많은 상수를 만나고, 그들을 닮아가려 힘쓰고 애쓰고 시간 쓰며 살다 가는.
이번 책에도 문화재와 사람을 들여다보는 촘촘하고도 푸근한 시선이 깔려 있다. 광화문을 복원하면서 미술가 강익중의 30억 원짜리 작품을 무료로 세우게 된 이야기, 전국의 종갓집 맏며느리 간담회를 연 이야기, 사람 손길을 받아야 목조건물은 유지된다는 철학으로 경회루를 개방한 일 등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가득하다.

훌륭한 이들이 이 책의 추천 평을 썼지만 나는 방송인 김제동 씨의 추천 평이 가장 와닿는다. “가볼 수 없는 곳을 가본 것처럼 느끼게 하는 기쁨, 찾아보고 싶은 곳을 막 다녀온 것처럼 느끼게 하는 기쁨, 막연한 역사가 문화유산을 통해 살아나는 듯한 기쁨, 책을 통해 본 세상에 머물지 않고 문 열고 나가 역사에 참여해보고 싶은 욕구와 기쁨. 그래서 전 이 책이 좋아요.” 이 맛깔진 추천 평만 봐도 김제동 씨 또한 상수다.
유홍준 교수는 이번 책에서 4장에 걸쳐 경복궁을 소개했다. “경복궁은 자금성에 비하면 뒷간밖에 안 된다”라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기 비하적 발언에 화가 나서 경복궁에 어떤 미학이 집약되어 있는지, 외국 왕궁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찬찬히 밝혔다. ‘외국인들이 경복궁 사진을 보고 합성 사진이냐고 물을 정도로 경복궁은 어느 시점에서 봐도 북악산과 인왕산을 바라볼 수 있는 자연과의 어울림이 자랑이다. 이렇게 주변의 경관을 자신의 경관으로 끌어안는 건축은 세계에서도 드물다.’ ‘자금성은 입구부터 끝까지 그저 장대하다는 느낌 하나만 일어나는데 경복궁은 근무 공간, 살림 공간, 정자, 장독대, 산책 코스까지 갖춘 궁으로, 인간의 살 내음이 살아 있다는 점에서 각별하게 매력 있다’. 좀전에 나 같은 문외한도 근정전 뒤쪽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며 ‘어느 게 사람이 한 일이고 어느게 자연이 한 일인가’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건 다 이런 이유에서였나 보다.
책 사이사이에는 4년 동안 문화재청장으로 실제 문화재 관리 현장에서 뛰고 느낀 이야기도 들어 있다. 그래서 ‘공무원 체험기’로 읽는 이들도 있다. 광화문 현판 논쟁, 국보 1호 논란, 고궁에서 연 국제대회 만찬에 대한 구설수 등 그가 문화재청장으로 있을 때의 논쟁은 여기서 언급하고 싶지 않다. “내가 한 일이 정당할 경우에는 세월이 말해줄 겁니다. 당장은 속상한 일이지만 세월이 지나면 또 이야길 할 수 있겠지요”라며 그도 말을 줄였다.

쉬고 또 쉬고 싶어 휴휴당으로 “이번 책은 6권이 아니라 시즌 2죠. 시즌 3까지는 안 할 거예요. <프리즌 브레이크>도 시즌 2로 매듭지었으면 영광스러웠을 텐데 시즌 3 해서 망해버린 거 생각하면. 한국 사회엔 지역적 안배라는 게 있으니, 그동안 쓰지 못한 충청북도, 제주도, 경기도를 쓰면 답사기 ‘제대’할 거예요. 한국의 문화유산 전체를 다 쓴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고, 놔두면 후배 중 누가 쓰겠죠. 한데 이것만 있는 게 아니라 <한국미술사강의> 3권도 써야 하고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국보 순례’도 1백 회 넘었는데 2백~3백 회까지는 써야 하니 몇 년 더 글을 써야겠죠. 스케이팅으로 치면 <한국미술사 강의>는 쇼트 프로그램이에요. 지정 종목이기 때문에 여기서 세 바퀴 돌고 저기서 뱅뱅 돌기처럼 삼국시대 다음에 통일신라, 그다음에 고려,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죠. 반면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아이스 쇼예요. 돌고 싶으면 돌고, 음악도 자유롭게 선곡하는 아이스 쇼처럼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쓰는 글. ‘국보 순례’는 갈라 쇼죠. 짧게 압축해서 보여주는. 한데 내가 지금 무리할 정도로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쓰는 이유는 글에서 빨리 제대하고 싶어서예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원로도 은퇴해야 한다고. 죽을 때까지 원로로 받드는 건 신진이 크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거든요. 고참이 제대해야 신병을 받아들이지. 정년이 2년 반 남았어요. 2년 반 동안 학교에서 할 일 다 하고, 5년 정도 걸려 글에서 제대하고 나면 부여 가서 농사짓고 살 거예요. 여관 주인도 내가 은퇴하고 할 수 있는 일 같은데, 그건 집사람과 상의해봐야겠고.”

그는 5년 전 부여의 반교마을에 집을 하나 지었다. 방 하나, 부엌 하나 있는 8평짜리 기와집과 헛간과 뒷간이 붙은 4평짜리 플라스틱 기와집이다. 쉬고 또 쉬고 싶었는지 이름도 ‘휴휴당 休休堂’이라 지었다. 이번 책에 그 이야기가 좀 나온다. ‘집에 대해서는 나의 고집이 있다. 집은 절대로 크면 안 되고…. 한옥은 무조건 세 칸 집이 예쁘고, 툇마루가 놓여야 멋도 운치도 기능도 살아난다.’ 집 앞 텃밭에는 돼지감자, 당귀, 도라지, 들깨, 고추 따위를 빼곡하게 심고 가꾼다. 집 주변으로는 개양귀비(아편이 나오지 않는 양귀비), 벚나무, 배롱나무, 호랑가시나무 등을 심었다. 지금은 5도 2촌, 일주일에 닷새는 서울에서, 이틀은 부여에서 살지만, 정년퇴직하고 나면 이 집에서 쌀을 안치는 날이 닷새로 늘어날 거란다. 5년 전 57세의 나이로 반교마을 청년회에 가입도 했단다. 줄곧 볼펜으로 서류 위에 꾹꾹 눌러쓰는 표정이던 그가 휴휴당 이야기에서 비로소 한가로이 난을 치는 얼굴이 됐다.
휴휴당 마당의 배롱나무에 백일홍이 만발할 무렵이면 그는 달이 기울도록 밤바람 속을 거닐지도 모른다. 대청마루에 앉아 그토록 좋아한다는 소월의 시를 읊조리는 촌로의 얼굴을 조만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 집에서도 그는 성실하고 참한 농사꾼처럼 책을 읽고, 마음을 닦고, 글을 쓸 것이 분명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인생의 도처에 있는 또 다른 상수를 찾아 답사 여행 짐을 싸고 있을지도….

(오른쪽) 6권에는 경복궁, 광화문, 선암사, 거창ㆍ합천, 부여ㆍ논산ㆍ보령 등의 답사기를 담았다.

글 최혜경 기자 사진 박우진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