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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가족]30년간 1인 가족으로 산 시인 최영미 씨 독신은 형벌이 아니다, 즐겨라!

“혼자 사는 건 어렵다. 혼자 사는 건 신나는 일이다. 혼자라는 건 어렵지만 신나는 일이다.” 이 문장을 이해해야 독신이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 나는 지금 말장난을 하는 게 아니다. 나는 마치 유언을 남기듯이 엄숙하게, 춤을 추며 신나게 자판을 두드릴 것이다. 한국의 독신을 대표해 글을 쓰게 되어 매우 영광스럽다. 원고 청탁을 받고 기뻤지만 한편 조심스러웠다. 내가 ‘1인 가족’이란 주제의 글을 쓸 자격이 있나? 사실 나는 사는 데 매우 서툰 사람. 혼자가 좋아서가 아니라 어쩌다 보니,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혼자였다.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추세인데도 여전히 싱글을 독립된 ‘가족’으로, 독립된 인격으로 존중하지 않는 야만인이 대한민국에는 많다. ‘독신녀’로 살며 이웃의 동정 어린 혹은 삐딱한 시선을 마주쳤을 때 제일 갑갑했다. ‘(저 여자) 얼마나 외로울까. 밤마다 가슴을 쥐어뜯겠지. 내가 어떻게 해줄까?

불쌍하니 같이 좀 놀아줄까(총각보다 유부남이 이런 착각을 잘한다. 실은 자신의 외로움을 풀기 위해 바람피울 궁리를 하면서).’ ‘노처녀니까 히스테리를 부리는 거야. 왜 하필이면 저 여자가 내 상관으로 왔을까. 애도 낳아보지 않은 주제에 뭘 안다고 잘난 척해? 언니는 애를 키워보지 않아서 사랑이 뭔지 몰라.’

그럼 애가 있는 사람은, 결혼한 남녀는 모두 완벽한 인간인가? 이런 가당치 않은 말들을 흘려들으며 냉정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이미 성공한 싱글. 독신을 영원한 미숙아로 여기고 나이 마흔이 넘었는데도 성인 취급을 하지 않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주위의 편견과 오만을 이겨내고 싶다면 감정 조절을 잘해야 한다. 가족이나 동료가 당신에게 언어폭력을 휘두를 때 참지 말고 맞서라. 흥분하면 노처녀가 히스테리를 부린다고 수군거릴 테니, 우아하게 상대를 무너뜨리는 말을 몇 가지 배워놓으면 편리하다.

화를 참으면 병이 된다. 이 땅의 독신들에게 고하노니, 바보처럼 당하지 말고 분노를 표현하며 살기 바란다.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니, 만약 감정 조절이 어려운 사람이라면 당신의 수다를 들어줄 친구가 적어도 두 명쯤 필요하다. 한 사람은 싱글 또한 사람은 유부녀나 유부남. 싱글과 더블은 인간관계도 다르고 세상을 보는 시각도 다르기 때문에 균형 감각을 유지하려면 양쪽의 견해를 다 들어야 한다. 부모의 와병이라든가 집안에 큰일이 생겼을 때 나는 결혼한 선배인 M에게 조언을 청했다. 싱글의 불리한점 중 하나는 모든 책임을 혼자서 진다는 것. 큰돈과 계약이 오가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며 나는 담배를 꽤 피웠다. 담배가 몸에 나쁘다지만, 감정을 다스리는 데 그것처럼 좋은 친구는 없다.

인간의 품위는 결혼 여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몇 년 전 대한민국의 여성 문인 여럿이 외국의 문학 행사에 초대되어 일주일가량 숙식을 같이 한 적이 있다. 예민한 작가들이 잘 때만 빼고 하루 종일 같이 지내다 보니 문제가 생기는 건 당연지사. 서로 돌아가며 티격태격 신경을 곤두세우며 때로 울고불고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나를 포함해 싱글이 두 명, 나머지 셋은 모두 자식이 딸린 유부녀였다. 결혼한 작가들이 더 참을성이 없었고 화를 잘 냈다. 평소 쌓인 스트레스를 받아주는 아이들과 남편이 있는 그네들이, 화를 풀 대상이 없어 속에서 삭이는 게 버릇인 나보다 감정 조절을 못했다. 누구와도 싸우지 않고 조용히 지낸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독신인 H였다. 나도 그처럼 조용히 지냈고, 내가 먼저 시비를 건 적은 없지만, 말다툼에 두 번 휘말렸으니 마음이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당신은 혼자 살고 싶은가? 정말 혼자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내 집을 장만하시기를. 내 집이 아니라면 내 방이라도. 부모에게서 독립하기로 결심했다면 주택 자금부터 마련해라. 서른 살 무렵에 나는 친구에게 1백만 원을 빌려 집을 나왔다. 신림동의 고시원에서 시를 쓰다 1년 뒤 등단해 작가가 되었다. 지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비행기를 타고 멀리 떠나겠다. 홀몸이라도 고리타분한 대한민국이 아니라 외국에서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살고 싶다. 대한민국에서는 남자라도 혼자 살기가 녹록하지 않다. 혼자라고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자기 앞가림을 하려면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 한다. 그래, 그 썩을 돈 말이다. 전세를 구하려 복덕방에 가도 우선 옷차림이 허술하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기 쉽다. 부동산 중개소나 미용실에 갈 때는 잘 차려입어라. 옷장에서 가장 좋은 옷은 아니더라도, 두 번째로 폼 나는 옷을 입어라. 미용사들은 유행에 민감하다. 고객이 대충 옷을 입은 것 같으면, 그네는 당신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자를지도 모른다.

자, 그다음은 어디에서 살 것인가다. 칠십이 넘도록 독신이던 미켈란젤로에게는 세끼를 챙겨주며 집안일을 책임진 하인이 있었고, 역시 노총각으로 생을 마감한 화가 드가는 파리 시내의 고층 아파트 꼭대기에서 지저분한 가사 노동을 하지 않고 하녀를 두고 살았다. 현대의 독신은 교통이 편하고 음식점도 많은 도시에 사는게 편리하다. 집을 구할 때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파는 상점이나 시설이 가까이 있는지 살펴야 한다. 내 경우, 우체국과 슈퍼마켓 그리고 간단히 점심을 해결할 밥집이 우선이었다. 대한민국 어딜 가나 식당은 흔하지만, 막상 내 입맛에 맞고 혼자 가도 받아주는 음식점은 흔치 않다. 먹는 데 스트레스를 받으면 인생이 비참해 진다. 무작정 계약하지 말고, 근처의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천천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기를.

전셋집이 아니라 내 집을 구할 때는 불쌍하게 보이는 것도 전략이다. 임신 6개월에 복덕방에 가서 싸게 집을 샀다는 여자를 나는 안다. “나를 불쌍하게 봐서 확 깎아줬나 봐요.” 부동산 중개업자가 보여준 집이 마음에 들어도 너무 좋은 척하지 마라. 당신이 그 집에 꽂혔다는 걸 알면 가격 흥정이 어려울 것이다.

부모나 형제와 너무 가까이 살아도 피곤하고, 너무 멀리 떨어져도 힘들다. 내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일손이 필요하거나 아플 때 금방 달려올 친구가 있는 곳에서 살아야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 아파트에 사는 독신녀라면, 관리실 아저씨와 친하게 지내면 여러모로 편리하다. 이삿짐을 풀고 나서 나는 음료수나 담배를 들고 관리실 아저씨에게 인사를 드린다. 내가 부탁하면 그는 가구 배치를 다시 해주었고, 무거운 소포를 대신 들어주었고, 변기가 막히면 뚫어주었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그가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물론 눈빛이 음흉해 나를 넘보는 아저씨에게는 절대 현관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인터폰을 눌러 ‘소포가 왔으니 찾아가라’ ‘입주 카드를 써내라’ 따위의 수작을 거는 관리인은 상대하지 마라. 나중에 대낮에 처리하겠다고 단호하게 그러나 정중하게 말하라. 자신의 신상은 이웃에게 되도록 밝히지 말고, 배달시킬 때도 동네보다는 멀리 떨어진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라.

이렇게 시시콜콜 신경 쓰며 살기 싫다면, 어서 짝을 찾으시길. 10년 전쯤 나는 “한국에서 서른이 넘은 여자가 독신으로 사는 건 하나의 형벌이다”와 같은 문장을 쓴 적이 있는데,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독신은 형벌이 아니다. 즐겨라! 제대로 즐기려면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준비가 되었다면, 독신은 축복일 수도 있다. 비열한 남자와 억지로 사는 것보다는 혼자가 백번 낫지.

글 최영미(시인)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