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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녀 가족]시인 함성호ㆍ시인 김소연 씨 부부의 아이 없는 삶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 아이는 필요조건? 충분조건!
“아이는 귀하고 소중한 존재다. 아이는 행복을 주는 존재다. 나는 그런 아이를 일부러 갖지 않았다.” 시인 함성호 씨와 시인 김소연 씨 부부가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한 까닭은 무엇일까. ‘결혼은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할 수 있는 조건을 찾아 나서는 긴 여행’이라는 이들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아이는 그 여행의 조건 중 하나임을 알게 된다.

어느 사회든 당연하게 여기는 가치가 있다. 이 가치를 무시하는 사람은 반갑지 않은 타인의 시선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결혼이라는 제도도 그런 가치 중의 하나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늘 다른 사람으로부터 물음표를 받는다. 같은 성 性끼리 결혼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결혼을 ‘했던’ 사람도 그렇다. 이 당연한 가치를 나는 항상 의심했다. ‘두 남녀가 사랑하는데 결혼이라는 제도가 꼭 필요한 것인가?’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결혼이라는 제도나 의식을 통해 맺어진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결혼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 정도 의심이 전부였다.

결혼하기 전의 나는 결혼 반대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결혼한 후 나는 결혼 반대자가 되었다. 결혼이라는 것은 좀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이전까지의 내 생활이 송두리째 변화를 겪는 위기 자체였다. 결혼을 통해서 나는 내 가족을 이룬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제까지 살아온 가족의 울타리에서 낯선 울타리로 잘못(?)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울타리는 누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만든 올가미였고, 무엇보다 그 올가미 앞에 서 있는 나의 자리가 어떠한 비유도 허락지 않는 사랑의 현실이었다는 것이다.

(왼쪽) 오순환, ‘풍경’,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90×72cm, 2008

한국 사회에서 결혼은 전통적으로 개인과 개인이 아니라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다. 흔히 쓰듯이 혼인 婚姻이라는 말은 여자의 집안(婚)과 사위의 아버지(姻)를 가리킨다. 결코 ‘너희 두 남녀의 결합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너희 두 사람의 결합을 증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통해 집안과 집안이 만나는 ‘우리’의 자리라는 것’을 우리의 언어 습관이 드러내준다. 결혼 그 이후의 문제는 다 여기에서 발생한다. 우리 사회에서 결혼은 신혼 기간의 그 며칠 사이에 끝나고 만다. 신혼에 대한 가족의 관용이 끝나면 결혼은 온통 관계의 그물을 뒤집어쓰며 그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의 가족들로 얽히고설킨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결혼한 여자는 시집의 특별한 주목을 받는다. 결혼식부터 남자의 친인척 예단이나 가지고 가는 패물에까지 세밀한 주의가 집중된다. 그리고 제사, 남자조차도 평소 챙기지 않던 시댁 식구들의 생일, 심지어 조카들의 생일까지 일일이 기억하고 적절하게 대응해야 한다. 이 복잡한 가족 관계 속에서 여자는 당연히 나와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과의 관계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절망한다. 나는 과연 누구와 결혼했는가?

이 의문 앞에서 여자는 당연히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남자는 자기 가족 문제로 갈등한다. 한국 남자의 가족 중심적 사고는 여자의 개인주의와 반드시 충돌한다. 결혼을 전제한 연애 기간에 한국 남자들은 여자에게 자기 가족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남자 자신도 자기 가족이 남에게 그렇게 배타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남자는 한 번도 친조카의 생일을 챙기지 않았다. 결혼 전에는 그렇게 분명하게 넘어갔던 사실이 결혼 후에는 그렇지 않다. 전화 한번 못 하느냐부터 오라 가라까지. 또 이제는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시댁 식구의 방문과 경조사 참석 요구가 불쑥불쑥 예고도 없이 이뤄지는 일이 흔하다. 만약 여자가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 ‘불쑥한 일’들은 거의 폭력 수준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폭력. 우리는 거의 누구나 이 폭력에 기꺼이 노출되거나, 어쩔 수없이 노출되고 있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결혼이란 생물학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이렇게 되물어야 한다. “누구와?”

한국 사회에서는 상대방의 가족이라는,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나와 같이 결혼 무대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구 사회에서도 왜 그런 사람들이 없겠는가마는 한국처럼 결혼의 직접 당사자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캠벨은 아마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을지 모른다. 진정 영적으로 두 사람이 하나가 되었다면 그런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나 우리의 영성은 현실적으로 그런 이상적인 경우에 훨씬 못 미치는 게 사실이다. 그 대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가서도 배우는 이성이 있다. 상대방의 가족과 있으면서 서로 닮은 그들을 보며 우리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서 왔나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웃음에서, 뾰로통한 표정에서, 사소한 손짓이나 말투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저들 속에 있다는 걸 알아차릴 때 우리는 조금 더 편하게 그 사람의 가족에게 다가가게 된다. 영적으로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엄연한 사실을 알아채면서.

그러나 그렇다고 문제가 끝나는 건 아니다. 이건 좀 특수한 경우겠지만 그 모든 회오리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면 반드시 양쪽 어른들은 분명히 사생활에 개입한다. “아이는 언제 가지냐?” 결혼한 사람은 아이를 가지게 마련이라는 당연한 생각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주는 부담은 의외로 크다. 그리고 이 질문은 가족을 벗어나 전 사회가 던진다. “아이는 몇 살이에요?” “아이 없는데요.” 그러면 질문을 한 사람은 잠시 생각한다. ‘혹시 이 사람이 아이를 못 가지는 걸까, 안 가지는 걸까?’ 그의 눈동자가 이런 생각으로 갈피를 못 잡는 걸 눈치챈 내가 거들어준다. “아이를 안 가지기로해서요.” 그러면 단박에 그의 눈동자는 자리를 잡고 편해지면서 동시에 이런 질문이 나온다. “왜 안 가지는데요?” 아이가 없는 게 어떤 결함 때문은 아니니까 편하게 이유나 묻자는 식이다. 그러면 나도 할 말이 없다. 사실 굳이 이유를 대자면야 궁할 것도 없지만 그럴 때 나에게는 마치 아이가 집 안에 꼭 있어야 하는 가전제품처럼 들린다. “나는 종의 미래보다 개체의 존재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런 식으로 대답하면 뭔가 꼬인 것 같으니까 그냥 “편하게 살려고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상대방도 “그래요, 무자식이 상 팔자지요”로 끝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결혼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는 다들 공감하지만 아이를 갖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아이는 특별하다. 집 안의 가전제품과는 다르다. 아이가 치명적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 아이는 부모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다. 어느 시인은 “금강경을 백번 읽는 것보다 아이의 얼굴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고 했다. 그만큼 부모에게 아이는 귀하고 소중한 존재다. 아이는 행복한 존재다. 나는 그런 아이를 일부러 갖지 않았다.

나에게 아이를 왜 갖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은 그런 소중한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아이 없는 결혼 생활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다. 나는 아이와 결혼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결혼은 두 사람 사랑의 최종 목적지가 아닐뿐더러, 아이 또한 두 사람 사랑의 결실이 아니다. 아이는 그 무엇의 결실이 아닌 소중한 개체이며 그 자체로 존귀한 존재다. 그런 소중한 존재가 무엇의 결실이라는 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생명은 그 홀로 귀한 것이다. 아이로 인해 부부의 결속이 더 공고해지는 것은 맞다. 그것은 소중한 존재를 지키기 위한 고귀한 행위다. 그러나 아이 때문에 유지되는 결혼이라면 그건 아이에게나, 부모에게나 이미 불행한 일이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중요하지, 같이 산다는 게 중요한건 아니다.

두 사람이 같이 산다는 것은 충돌이다. 집안 풍속과 집안 풍속의 충돌이고, 가족과 가족의 충돌이며, 개인과 개인의 충돌이다. 거기에서 아이의 역할은 사실 중요하다. 서로 공통된 지점이 없는 다른 두 집합에서 아이는 유일한 교집합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아이라는 교집합으로 인해 많은 문제가 덮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덮이는 것일 뿐이지 결코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문제는 그대로 남아 우리 사회의 병폐로 나타난다. 우울증 환자 중 주부가 31%를 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남성의 스트레스로 인한 과로사는 과중한 업무 외에 집안 문제에 대한 스트레스도 같이 작용한다. 아이가 문제 해결의 방법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아이는 문제 해결 방법으로 생각해서도 안 되는 소중한 개체다.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 아이는 충분조건이지 필요조건은 아니다.

결혼은 결코 연애의 연장이 아니다. 결혼은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할 수 있는 조건을 찾아 나서는 끝없는, 긴 여행과 같다. 아이는 그 조건 중 하나다. 만일 그 조건을 전부로 안다면 그 두 사람은 나머지 조건을 찾는 걸 포기하는 것이다. 가족이 행복의 울타리가 되어야지 올가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캠벨은 결혼에 대해 “상대방을 위해 희생하지 말고 두 사람의 관계를 위해 희생 하라”고 했다(물론 여기에는 ‘희생해야 한다면’이란 단서가 분명히 붙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정말 의미 심장한 말이다. 이 말은 결혼 생활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전부에 해당한다. 내가 나를 죽일 때는 그럴 때뿐이다. 캠벨은 기본 태도 하나를 우리에게 주었다. 그 외에 결혼 생활에서 필요한 것은 기다림이다. 관계를 위해 희생하지 말고 관계를 위해 아주 오래 기다리는 것, 기다려주는 것. 내가 그를 이해할 때까지, 그리고 그가 나를 이해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 기다림 속에서 아이도 오고, 다른 소중한 것들도 온다. 다시 캠벨의 말을 인용하자. “당신이 세상 전부를 원한다고 해도 신께서는 주실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기다린다는 것은 준비하는 것이다.

(왼쪽,오른쪽) 오순환, ‘꽃’, 나무에 채색, 73×52×200cm, 2004

함성호 씨는 1990년 <문학과 사회> 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데뷔했고 1991년 <공간> 건축평론 신인상을 받았다. 시집 <56억 7천만년의 고독> <성 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 <키르티무카>를 펴냈으며, 만화비평집 <만화당 인생>, 건축평론집 <건축의 스트레스> 등을 썼다. 건축실험집단 EON의 대표로 있다.

 

함성호(시인) 작품 이미지 제공 오순환(화가) 캘리그래피 강병인

기획과 구성 최혜경 기자 디자인 안진현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