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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은 행복]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

언제나 마음의 비 가리개 해주던, 등받이 해주던 엄마는 내게 없었다. 햇감자 나왔더라, 갓김치 잘 익었더라, 양손에 가득 들고 오는 엄마는 내게 없었다. 대신 시집간 딸 집에 들러서 국이 짜다, 밥이 되다 타박하는 엄마가 내게 있었다. “핏줄을 나눈 사이라서 편하게 생각하고 함부로 대하기 때문에 친정엄마와 딸 사이에 오히려 껄끄러운 관계가 생긴다”는 이야기는 나를 비껴갔다. 엄마는 좀 다른 사람이었다. 엄한 외조부 때문에 인텔리로 성공할 수 있었던 자신의 인생이 파탄 났다고 평생 한탄하는 사람, 남편이든 자식이든 이웃이든 누군가에게 ‘부림 받는다’라는 생각이 들면 표독하게 반응하는 사람, ‘내 인생은 오로지 나의 것’을 외치는 사람, 일흔의 나이에도 할리우드 연애 영화의 단골 주인공 록 허드슨을 가슴에 품은 사람. 그녀와 한 몸이 되어 열 달 동안 ‘공감’하다가 태어난 딸들도 그 과민한 감정과 감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두 딸에게 친정엄마는 늘 ‘시어머니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었다. “아가, 결혼은 에미 바꾸는 일이다. 이제부턴 내가 니 에미다” 시집간 첫날 내가 들은 시어머니의 첫마디, 엄마에게서 들어본 적 없는 이 따스운 말씀에 공연히 눈물이 났다.

(왼쪽) 우지영, ‘세상. 거리 꽃-팬지 1’, 장지에 채색, 91×94cm

그렇게 데면데면 살던 엄마가 병으로 쓰러졌고 나는 보름 동안 엄마의 병실을 지켰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겐 극적인 화해의 무드가 조성되는 드라마가 없었고, 나는 문안 인사차 들른 엄마의 친척처럼 보름을 함께 병실에서 지냈다. 아주 가끔 동성으로서의 연민이 몰려오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육신이 쇠약해지자 엄마의 과민한 감정과 감성은 더 분출했고, 엄마는 71병동 간호사실의 ‘블랙리스트’가 되었다. 링거액에서 비린내가 난다는 이유로 링거주사를 하룻밤 새 네 번이나 교체해 달라 요구하거나, 늙고 병든 자신을 괄시한다며 세 명의 간병인을 되돌려 보냈다.

하루하루 지쳐가던 내게 든 생각은 ‘아버지는 어떻게 엄마와 잘 사셨을까, 이제 엄마 곁에 유일하게 남겨진 아버지가 여생을 잘 버틸 수 있을까’였다. 그런 내게 아버지가 던진 한마디. 난 무릎이 꺾였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세 명 있댄다. 고속 승진한 직장의 우두머리, 후진국의 대통령, 그리고 마누라랜다. 느이 엄마는 내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야. 일평생 살 붙이고 살면서도 경계를 두어야 할 사람이지. 그런데 부부 사이에서 경계는 예의와 같은 말이야. 존중하고 살다보면 가장 긴장해야 할 대상이 아내가 돼. 근데 아빠는 그렇게 사는 게 거북하고 힘든 게 아니라 매일매일이 새롭고 뒷맛이 좋았어. 느이 엄마는 그랬어. 특별한 사람이었어.” 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과 살면서 남들은 모르는 자신만의 행복을 발견한 것 같다.

내가 이 이야기에 더 감응한 건 ‘세상엔 60억 명의 사람이, 60억 개의 사랑이, 또 그 사랑의 매듭을 푸는 60억개의 방법이 있다’는 평범하고도 특별한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60억 분의 1짜리 사랑을 담담히 지켜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내가 가졌던 죄의식(다정하고 헌신적인 ‘대한민국 어머니상’에서 비껴난 엄마와 살며 가졌던 죄의식. 다른 딸들처럼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에서 오는 죄책감이었다)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엄마와 정을 나누는 또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는 걸, 나이 마흔이 다 돼서야 알았다. 뒤늦게 철 들어가는 딸년 앞에서 엄마는 모로 누워 코를 골고 계셨다. 창밖엔 3월의 햇볕이 쨍쨍했다.

글 최혜경 기자 작품 이미지 제공 우지영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