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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극장]괴짜 도예가 한갑수 씨와 아내 장유하 씨 갑수가 유하에게로 가서, 살다
올 초 TV 프로그램 <인간극장>에 소개되며 눈길을 끈, 그리고 얼마 전 수천 마리의 두꺼비 작품으로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도예가 한갑수 씨는 전라도 함평에서 살고 있습니다. 처갓집 마당 한쪽에 있는 그의 공방은 늘 손님이 많이 찾아옵니다. 사람 사는 온기와 도자기 굽는 가마의 열기 중 어느 것이 더 따듯한지 비견할 수 없을 ‘갑수와 유하’의 함평 집, 촌스러워서 더 애틋한 그 집에 들러보았습니다. 그 안에는 열기로 가득한 한갑수 씨의 인생 스토리가 구석구석 담겨 있었습니다.


한갑수 씨의 작업실 이름은 ‘갑도예’다. ‘갑수와 유하’가 나란히 앉은 길 옆으로 투박한 나무에 손글씨로 쓴 간판이 있는데, 이처럼 갑도예의 모든 물건은 갑수 씨와 유하 씨 그리고 처남인 준호 씨가 주변 사물을 이용해 직접 만들고 꾸몄다.

서른 중반의 내가 생의 한가운데에서 이제 겨우 ‘모든 삶은 저마다 소설’이라는 진리를 깨우치고 있던 때에 전라도 함평에서 도예가 한갑수 씨를 만났습니다. 텁텁한 작업실에서 차 한잔 사이에 두고 들은 갑수 씨의 삶은 그야말로 소설이었습니다. 몇 해 전 읽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와 꽤 통합니다. 코엘료의 소설 속 목동은 우연히 꿈을 꾼 후 생의 물음을 거듭하며 자아의 신화를 찾아 여행을 떠났지요. 신비로운 에피소드로 가득 찬 여정을 통과하는 동안 소년은 납을 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사처럼 자연스레 우주의 이치를 깨우칩니다. 이런 일이 한갑수라는 개인의 삶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섬에 살던 사내가 뭍으로 나가 ‘내적 질서’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갑수, 도요에 들어가다 전라남도 신안군의 한 섬에서 자란 갑수 씨는 책 읽는 것이 좋았습니다. 문학 소년적인 태생적 인자가 마음 한 구석에 늘 있었습니다. 많은 글을 읽다 보니 ‘나는 무엇이 될꼬’ ‘어떻게 살꼬’ 하는 생의 물음에 마음이 복잡해졌고, 뭍으로 나가보니 세상은 넓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갑수 씨는 출가해 그 답을 찾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머리를 밀고 암자에 들어가기 전, 세상 구경이나 실컷 할 요량으로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특별한 목적지가 있는 여행이 아니었으므로 발길 닿는 대로 떠돌다가 한 도예가의 도요에 이르렀습니다. 사람이 불의 힘을 빌려 물렁한 흙 반죽을 단단한 고형물로 변화시키는 것에 흥미를 느낀 갑수 씨는 얼마간 이곳에 머물며 도예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자네는 도예를 익히기에 눈빛이 너무 세네.” 짧고 냉정하게 답을 건네고서도, 그 도예가는 난생처음 보는 청년에게 방을 내주었다고 합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곧바로 갑수 씨는 스승의 아침상을 준비했습니다. 밥을 안치고 요것저것 주물러 찬을 만들어냈는데, 이후 수년 동안 그것이 갑수 씨의 일이 될지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더랍니다.

그 도예가의 공방에는 손님이 참 많았습니다. 배우러 오는 사람, 만나러 오는 사람, 들르러 오는 사람까지 끊임없이 들이닥쳤고 밥을 지어 그들을 먹이는 것이 갑수 씨의 일이었습니다. 종일 일하고도 밤이면 바닷가 패총처럼 설거지 더미가 쌓여 있는 날이 매일인지라 이따금씩 막막해져 눈물도 났습니다. 말 없는 스승은 좀처럼 도자기 만드는 예 藝를 가르쳐주지 않았고, 허드렛일하는 갑수 씨는 사람들에게 밥 지어 먹이는 예 禮만 열심히 했습니다.

(오른쪽) 2010년 <고슴도치 갤러리 나들이 가다>전에서 선보인 고슴도치 작품은 몰입과 섬세함의 결정체로 주목받았다.

공방에서 수천 명에게 밥을 지어 먹이는 동안 갑수 씨는 눈빛이 부드러워졌고 성격이 털털해졌으며, 무엇보다 찾아온 사람에게 따끈한 쌀밥 한 그릇 지어 대접하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대가들이 본격적으로 도자기를 빚기 전에 좋은 흙을 다지는 데 더 오랫동안 집중하듯, 스승은 세월을 빌려 갑수 씨의 사람됨이 좋은 반죽이 될 때까지 기다려준 것이지요. 오랜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스승은 갑수 씨가 미술대학에 진학하도록 길을 알아봐주었습니다. 도자기를 배우는 공예과가 아닌 조형을 배우는 조소과라는 사실이 의외였지만, 스승의 조언에 묵묵히 몸을 실어, 출가하려던 갑수 씨가 미대생으로 바뀌었습니다.


꽤 넓은 작업실이지만 갑수 씨의 물레와 작업 도구는 한구석에만 자리하고 있다. 손님을 맞기 위해 넓은 공간에 테이블과 의자를 놓았고 벽면과 선반은 갑수 씨의 도예 작품과 유하 씨의 그림으로 장식했다.

갑수, 유하를 만나다 미대에 들어간 갑수 씨는 더욱 바빠졌습니다. “공방에서 일하며 신은 고무신을 그대로 신고 흙 묻은 바지를 입고 학교에 갔다니까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니까요.” 동급생에 비해 나이가 많은 데다 공방에서 지내는 동안 흙처럼 털털한 성격으로 다듬어졌으니 동기간에 어울리는 것도 편안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 둥글둥글하고 능글능글한 갑수 씨도 서양화 전공하는 장유하 선배에게만큼은 말 걸기가 어려웠습니다. 사실은 처음 본날부터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진동을 느꼈기 때문이지요. 유하 선배는 영혼이 못처럼 잔잔한 사람 같았습니다. 헝겊 너부렁이처럼 산 남자가 우스갯소리를 건네기에 그녀는 너무 고왔습니다.

숙고 끝에 유하 선배를 찾아가서 내뱉은 말이 “우리 데이트할까?”였답니다. 갑수 씨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속이 깊은 유하 씨는 투박한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였고, 그날부터 이 둘은 ‘한갑수, 장유하’가 아닌 ‘갑수랑 유하’가 되었습니다.“영혼의 합이 꼭 맞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아요.” 첫 데이트를 한 후 갑수 씨는 어머니께 말씀드렸습니다. 무엇을 하건 무엇을 듣건 생각이 일치하고 서로에게 부응했습니다.

갑수 씨는 유하 씨가 자신과 영혼의 합이 맞는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공방에서의 삶을 경험해볼 것을 요청합니다. 장정도 눈물 쏙 뺄 만큼 많은 허드렛일의 생활이지만, ‘남에게 밥 지어 먹이는 즐거움’을 수행하려면 꼭 필요한 과정이니까요. 한갑수와 함께 살 여자라면 그 생각의 근원을 공유해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는데, 가냘픈 유하 씨는 1년 가까운 시간을 참아냈습니다. 겉으로 고요한 못 같은 여인의 속에 굳건한 반석이 있었던 것이지요.

갑수, 사랑을 하다 대학을 졸업한 유하 씨는 서울 언니네 집으로 가 글쓰기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갑수 씨는 전라도에, 유하 씨는 서울에, 두 사람의 장거리 연애가 시작된 것이지요. 작가를 양성하는 학원에 갔다가 비싼 학원비에 놀랐다는 유하 씨와 전화 통화를 한 후 갑수 씨는 처음으로 ‘돈’의 유용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돈을 벌어 사랑하는 여인의 꿈을 이뤄주고 싶은 사내의 본능이 그에게도 있었던 것이지요. 갑수 씨는 스승의 허락을 받아 도예전을 열 계획을 세웠습니다. 스승의 어깨 너머로 배운 생활 자기를 만들기로 합니다. 찻잔, 접시, 사발을 정성스레 구워낸 후 그동안 밥을 지어 먹인 수백 명에게 전시 소식을 알렸습니다. 참으로 염치없는 일이어서 전시 이름도 <염치 불구>전으로 붙였지요.

(왼쪽) 갑수 씨는 작업에 몰입할 때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예술적 욕구를 가졌을 유하 씨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전시회 당일, 수백 명이 공방에 찾아왔습니다. 급작스레 열린 미대생의 소소한 생활 자기 전시에 직접 운전을 해 멀리에서부터 와주신 분도 많았습니다. 따스한 밥 한 그릇의 힘이 이리도 컸던 것이지요. 마음을 담으면 훗날 그 또한 마음이 되어 큰 감동으로 되돌아온다는 이치를 <염치 불구>전이 깨닫게해주었지요.

유하 씨의 ‘글쓰기’ 학원비를 멋있게 지불하고서도 여윳돈이 남을 만큼 전시는 성공적이었고, 둘의 사랑은 더욱 애틋해졌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생겼습니다. 전화로 임신 사실을 전해 들은 갑수 씨는 시험에 빠졌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의 한가운데 서 있는 여느 총각이 그러하듯 거대한 부담감이 엄습했고, 도망하고 싶었습니다. 예술가적 기질이 강한 사람은 이런 일에 부딪히면 혼란의 강도가 더 높아지지요. 하지만 유하 씨는 차분했고 가족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유하 씨의 가족은 즉시 결론을 내렸습니다. 갑수랑 유하랑 아이 낳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지요. ‘사랑’은 채색했으나 ‘가정’이라는 그림은 아직 구상도 하지 못한 갑수 씨. 그의 인생은 그렇게 ‘유하의 신랑’이라는 전환점을 맞게 되었습니다.

갑수, 처가살이를 시작하다 벌이가 없는 도예가가 과연 혼인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단 혼인은 진행되었습니다. 바닷가에서 그동안 인연을 맺은 그림 그리는 사람, 글 쓰는 사람들이 모여 예식을 치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살 것인가. 이것은 참으로 난감 했습니다. 헛간 같은 집도 둘이 가진 돈으로는 어림없었으니까요. 여러 날 집을 구하다 한 사찰에 들렀는데, 공방에서 밥을 지어드린 스님이 마침 그곳에 있었습니다. 근황을 묻더니, 별안간 스님이 마을에 빈집이 있다며 집을 내주었습니다. 참으로 별난 인생이지요. 스님의 집을 유하 씨와 함께 치우고 정돈하니 아담한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신혼 생활은 알콩달콩했지만, 이번엔 또 무엇을 하고 살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공방에서 나오고 학교도 졸업한 갑수 씨가 도예 작업을 하려면 작업실과 가마가 있어야 하는데 마을 한가운데 있는 스님의 집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지요.

갑수 씨가 작품을 하며 사는 게 자신의 꿈인 유하 씨는 함평의 친정 식구들을 먼저 설득하고 갑수 씨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와 남동생이 지키며 사는 친정집은 바람 좋은 언덕에 있어 가마와 작업실을 만들기에 좋은 위치였기 때문입니다.


(왼쪽) 스승의 공방에서 살던 시절, 밤새 일을 해도 흙집에서 자면 피곤함이 사라졌다. 그 때문에 살림집을 흙집으로 지어 딸 ‘강’이와 함께 사는 것이 부부의 꿈이 되었다. 이들 뒤로 보이는 건물은 작업실이다.
(오른쪽) 처가는 마당 너머에 있고 작업실 바로 뒤에는 가마가 있다. 주변 인가가 없어 밤새 연기를 피워도 되니, 유하 씨가 태어나고 자란 이 집이야말로 도예가에게 최적의 작업 공간이다.


“처가살이를 하라고!” “사위와 같은 집에 살라고!” 갑수 씨와 친정 식구 모두에게 쉬운 일이 아닌 줄 알면서도 작업을 하려면 다른 방도가 없으니 따를 수밖에요. 유하 씨는 태어나면서부터 이 집에 살았습니다. 언니들은 시집을 갔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남동생이 대학을 포기하고 돌아와 농사와 양돈을 한 지 여러 해 되었습니다. 가족 모두가 새벽부터 바지런히 움직이는 농가 사람들인 데다, 독실한 기독교도입니다. 사위는 스님이 되기로 마음먹고 세상을 떠돌다 뜻하지 않게 도예가가 된 사람이지요. 덥수룩한 장발에 수도승과 수행자의 중간쯤되는 옷차림까지. 사실 장모는 사위의 차림새가 마땅찮습니다. 같이 장에라도 나가는 날이면 마을 사람이 쳐다보는 것 같고, 곱디고운 딸과 조화를 이루는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지요. 장모는 주일이면 사위와 함께 교회에 가고 싶습니다. 사위가 부지런히 움직였으면 하는 소망도 있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이 농사일로 수고하는데, 사위가 나가 힘을 보태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일요일이 되면 볼일을 보러 나가고, 농사일도 아예 돕지 않았어요. 장모님이 섭섭하고 화도 나셨겠지요. 하고 싶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하다보면 처가에 오래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았어요. 반면에, 처음에는 섭섭하겠지만 서로의 방식이 자리를 잡으면 마음을 터놓고 살 수 있잖아요.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 유하 씨가 마음고생이 많았을 겁니다. 큰소리 나지 않게 중간에서 잘해주었으니까요.”

호탕한 갑수 씨와 조용하지만 성품이 보드라운 처가 식구들은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겪으며 ‘하나의 가족’으로 되어가는 중입니다. 특히 키 큰 처남과 키 작은 매형은 서수남과 하청일처럼 명콤비가 되어버렸지요. 요즘엔 장모님이 잔소리할 일이 생기면 유하 씨보다 처남이 먼저 가서 어머니를 이해시킵니다.

“매형을 만나고 다른 세상도 있다는 걸 알았어요.” 처남은 작업실이 필요하다고 하니 창고를 작업실로 개조하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작업실이 생기자 많은 사람이 찾아오기 시작했지요. 글 쓰는 사람, 노래 부르는 사람, 그냥 지나가던 사람 등 많은 사람이 매형과 즐겁게 놀다 가는 것이었습니다. ‘바지런히 일하지도 않고 돈이 많거나 유명한 것도 아닌데 왜 사람들이 매형을 좋아하는 걸까?’, 처남은 매형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매형의 절친한 아우이자 듬직한 후원자 ‘준호’가 되었습니다.

“흙은 우리 준호가 포클레인으로 퍼다 준다니까요. 서울 전시장에 우리 준호를 데려가고 싶은데요.” 갑수 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 준호’라는 이름이 쉴 새 없이 등장했습니다. ‘우리 유하 씨’에 이어 처남과 장모가 ‘우리 준호’와 ‘우리 장모님’으로 바뀌기까지, 기억하지도 못하는 갈등이 많았겠지요. 사람됨의 반석이 단단하다면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서도 가정이라는 아름다운 질서를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갑수랑 유하’ 가족에게서 느낄 수 있습니다.

갑수, 고슴도치 도예가가 되다 갑수와 유하의 작업실은 마을의 문화 명소가 되었습니다. 여름밤이면 마을 사람 몇 분 모셔 음악하는 친구들과 노래 한 자락 부르고, 선선한 밤에는 시를 낭독하거나 영화도 봅니다. 물론 화장실은 ‘푸세식’이고 작업실 마당은 야산입니다. 하지만 시골 마을에 문화의 온기가 있다는 게 얼마나 설레는 일인지요. 처남인 준호 씨가 매형을 만난 후 보게 된 세상은 이처럼 몸만이 아니라, 감성과 감정도 일을 하는 세상입니다. 손님들이 오는 날이면 장모님도 같이 노래를 듣고 부르며 즐거워하십니다. 예술 하는 사위와 딸이 가진 내면의 정체를 장모님도 파악하게 되신 거지요.

“나는 거창한 예술가는 아니에요. 하지만 작품이라면 주목을 끄는 남다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내가 사는 곳의 특색과 의미를 담아야 하고요. 가마에 불을 지피기 전 무얼 만들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고슴도치가 떠올랐는데, 유하 씨에게 이야기했더니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고슴도치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어려울 줄은 상상도 못 했다니까요.” 뾰족한 침처럼 생긴 수십 개의 털을 흙으로 일일이 빚은 뒤 예민한 집중력으로 등에 붙이는데, 수일이 걸려야 겨우 고슴도치 형상이 완성됩니다. 이 과정까지도 인내가 필요한 이 작업은 하나하나 붙여 만든 고슴도치를 고온의 가마에 넣으면서 하이라이트에 이릅니다. “어떤 도예가는 원하는 모양대로 작품이 나오지 않으면 깨버리는데, 제 생각은 달라요. 흙으로 모양을 빚을 때 불에 들어가서 변형되는 각도까지 계산해서 균형을 맞춰요. 하지만 막상 불의 힘을 만나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데, 나는 불의 힘도 존중해요. 자연의 힘이니까요.”

갑수 씨가 작업에 몰입하는 동안 유하 씨는 어린 딸 ‘강’이를 돌보고, 장모님은 밭에서, 처남은 양돈장에서 일을 합니다. 자신보다 더 뜨거운 창작 욕구가 유하 씨에게 내재되어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갑수 씨는 애가 탑니다. 서로를 껴안기 위해서 서로가 가진 아픈 털을 인내해야 하듯, 유하 씨와 장모님 그리고 처남이 자신의 모난 부분을 인내하며 껴안아주는 고슴도치 가족 같다는 사실에 갑수 씨는 늘 고마운 마음이지요.“하나하나 빚은 털을 붙여 고슴도치를 만드는 작업은 땀과 노력이 필요해요. 그 과정을 지지해주는 가족이 있어 힘이나지요. 내가 만든 고슴도치를 보면서 가족의 소중함과 사람 사이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뜨거운 가마를 견디고 나온 고슴도치가 비로소 참 의미를 찾게 되는 것이지요.”


(위, 왼쪽) 작업실을 고칠 때, 봄나물을 캘 때, 캔버스로 푸세식 화장실 문을 만들 때도 ‘갑수와 유하’ 그리고 처남 준호는 늘 함께다.
(오른쪽) 그림이 그려진 캔버스를 문으로 사용하다 보니, 바람에 흔들리기 일쑤다. 그럴 때는 안에 든 사람이 직접 바깥의 나무로 캔버스를 고정하면 되는 자급자족의 아이디어 역시 ‘갑수와 유하’의 작품이다.

(왼쪽) 이번 봄 서울의 경인미술관에서 전시한 수천 가지 익살스러운 표정의 미스타 두씨들.
(오른쪽) 가마의 굴뚝까지 두 사람의 손길이 닿았다.


2010년 갤러리 고도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고슴도치 무리를 선보인 갑수 씨가 올 3월 경인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에는 수천 마리의 두꺼비 ‘미스타 두씨’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 전시를 위해 시인 이생진 씨는 ‘고슴도치 같은 사람이 두꺼비를 몰고 서울에 온다’라는 시를 써주었고, 유승배 화백은 그림을, ‘고무밴드’는 음악회를 열어주었습니다.

“흙 고슴도치의 가시가 지닌 힘이 날카로움 속에 숨어 있는 따뜻한 품이었다면, 미스타 두씨의 힘은 수 천 마리의 작은 미스타 두씨의 무리다. 작가는 무한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 ‘집념, 끊임없이 젖어드는 몰입’을 이야기한다. 이것이 작가의 작품이 이야기하는 큰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유하 씨는 갑수 씨의 전시를 위해 이런 글을 썼습니다.

늦은 봄밤, 달그림자가 풀밭을 비출 때 두꺼비 한 마리가 지나갑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하다가 달빛이 비추자 깜짝 놀란 듯 멈칫합니다. 작가는 그 순간 두꺼비의 표정을 수천 가지 장면으로 상상해냈습니다.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도 자신의 신화를 찾아 여행을 떠난 목동이 인생의 진리를 알게 될 때마다 두꺼비처럼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겠지요. 어릴 적 읽은 글귀가 가슴에 담겨 세상을 방황하던 갑수 씨가 좋은 사람들을 만나 자아의 신화를 발견하는 체험을 할 때마다 아마도 미스타 두씨 같은 표정을 지었을 겁니다. 남들이 눈치채지 못했을 때에도 유하 씨만이 그 표정을 보았겠지요.

‘갑수랑 유하’의 함평 작업실 마당에는 오늘 밤에도 두꺼비가 달빛에 놀라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을 겁니다. 세상의 눈에 연연하지 않고 진정한 자유를 찾도록 내적 질서를 이룬 도예가의 가족 또한 두꺼비처럼 자유롭고 익살스럽게 함평에서의 삶을 즐겁게 이어가겠지요.

그 김민정 사진 민희기 담당 최혜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