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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가족 이야기] 가족 모험은 지금부터! 허용무 박사의 10년 기러기 아빠 생활
우리 사회엔 3만~5만 명에 달하는 기러기 아빠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제 ‘왜?’가 아니라 ‘어떻게?’라는 질문으로 기러기 가족의 행복 찾기를 시작해야 할 때라는 이야기지요. 기러기 가족으로 먼저 살아본 인생 선배의 조언, 기러기 가족이 겪는 심리적·물리적 고민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전문가의 제안을 들려드립니다.


큰아이가 고1, 작은아이가 중1 때 두 아이와 아내 모두 미국으로 보내고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한 허용무 박사. 아이들이 대학생이 된 후 아내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고 떠나보낸 조기 유학
9·11 사태가 일어난 2001년 가을, 나는 중 1, 고 1이던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다 불현듯 미국에서 목회 활동을 하는 친구에게 전화해 아이들을 보낼 테니 유학 수속을 밟아 달라고 청했다. 그로부터 한달여 만에 입학 허가서가 도착했고, 비자 문제도 해결되어 부랴부랴 3개월의 준비 끝에 아이들과 아내는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단지 네 식구의 다부진 각오만으로 시작된 ‘가족 모험’의 첫 순간이었다.
당시 대학에서 교수로 봉직하던 나는 동료 교수들에게 조기 유학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 결과 조기 유학의 양대 산맥을 잘 넘겨야 유학 생활이 성공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양대 산맥이란 하나는 조기 유학의 본래 목적인 학교 교육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사람다운 사람,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으로 올곧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인성 교육이었다. 흔히 조기 유학은 10~20% 정도만 성공한다고 하는데, 그 원인 중 하나가 인성 교육에 신경 쓰지 못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아내와 아이들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부터 나는 “조기 유학은 가족 모험이고 가족 모험은 가족 구성원 모두의 노력 없이는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 아이들의 유학 생활 중에도 전화, 이메일, 편지 등을 통해 아이들의 마음을 달래주려고 노력했다. 한국인의 사고방식, 따뜻한 마음, 할아버지와 할머니 얘기 등도 편지에 담아 보내주었다. 실제로 아내와 아이들이 고백하길, 전화나 이메일은 흘려보내면 그만이지만 편지는 아버지의 필적과 함께 사랑이 곳곳에 남아 있어 간직하게 됐다고 한다. 또 나태해지고 나약해질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새 힘을 얻는 데 훌륭한 지침서가 됐단다. 아내는 이러한 편지와 이메일을 모아 내 아명(성준)으로 <기러기 아빠의 편지>를 출간하기도 했다. 처음에 나는 지극히 개인적 경험일 뿐이라는 생각에 망설였지만, 이내 아내는 “당신 같은 마음이 다른 기러기 가족에게 전염되면 그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경험과 심정을 들려주자”라며 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10년 전 준비 없이 시작한 유학 생활이 아내와 아이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실제로 낯선 미국 학교에의 적응은 사전 준비를 많이 한 다른 아이들에게도 만만찮은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내하며 정성을 쏟으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차근차근 접근했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아는 것이 없으니 부딪쳐 해결해보라”고 주문했는데, 이건 어쩌면 모험에 가까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낯선 환경,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맛보게 되는 고통은 필연이므로 기다리며 노력해야 한다는 당부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적응하기까지 초조해하지 않도록 격려했다.

그런데 이때 부모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낯선 환경에서 하는 공부가 아이를 위축시킬 수 있고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일탈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로 하여금 자신이 처한 현실의 ‘당위성’을 먼저 찾도록 돕는 것이 부모의 중요한 역할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아이는 불안 상태를 잘 극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학 초기에 내 딸아이는 언어를 빨리 터득한 데 비해 아들아이는 그게 잘 안 됐고, 그러다 보니 동생과 비교가 돼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어한 적이 있다. 이때 나는 책을 인용해가며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들려주었다.
즉, “남자와 여자는 능력 면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언어 능력은 남자보다 여자가 우월하고, 시간 공간 능력과 수리력 면에서는 여자보다 남자가 우월하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보다 언어 기술을 일찍 습득하는 경향이 있다. 또 낯선 땅에서의 생활에 부족한 면이 있는 건 당연하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되니 걱정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또 하나는, 낯설고 물 선 땅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불안을 극복할 수 있도록 정신적 힘을 길러주는 것이었다. 목사인 친구의 도움도 컸지만 아내는 아내대로 매일 새벽 기도에 나갔고, 주일이면 아이들과 함께 한인교회에 나가 고향과 한국 음식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하곤 했다.

기러기 아빠의 가열찬 일상 기러기 아빠로 살며 견뎌야 하는 내 몫의 고통은 생각보다 컸다. 미국에 가족을 남겨놓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어느 순간 다른 세상 속으로 ‘옮겨진’ 듯했다. 가장 먼저 부딪힌 곤란함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생활에서의 문제였다. 유교적 가풍의 충청도 집안에서 2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가부장적 성향이 몸에 밴 채 성장했다. 결혼 후에도 마찬가지여서 내 손으로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또 아내가 밥상을 차려놓고 외출하면 찌개 데우는 게 귀찮아 밥상보만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 외식으로 해결하기 일쑤였다. 경제적 문제도 관심 밖이어서 카드가 있어도 밥값만 치를 줄 알았지, 아내가 떠날 때까지 은행에서 현금 찾는 방법도 몰랐다. 그러나 아내가 부재한 순간부터 모든 일상의 문제가 내 몫이 되었다.
우선 식사, 빨래, 청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우미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부엌에 들어가본 적도 없던 나는 밥 짓는 법, 세탁기 돌리는 법, 청소기 작동법 등을 하나하나 익혀나갔다. 처음 얼마 동안은 작심한 것이 있어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홀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의 일상은 한 귀퉁이부터 삐거덕거리기 시작했다. 식사는 시골집이나 처갓집에서 마련해준 것이 있어 해먹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면서부터는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게다가 퇴근 후 술 한잔이라도 걸치는 날이면 준비해놓은 식사를 못하게 되고, 아침까지 거르는 날이 늘어나면서 먹는 음식보다 버리는 음식의 양이 더 많았다.

(왼쪽) 혼자 지내는 아버지가 외로울까 봐 딸이 보낸 사진 편지.

또 불 꺼진 현관을 지나 텅 빈 집 안에 홀로 놓이면 그야말로 그 외롭고 아린 마음은 어찌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였다. 방문을 열고 아이들의 흔적을 찾아 의자에 앉아보고, 녀석들이 어릴 때 쓰던 물건도 쓰다듬어보고, 사진을 보며 추억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다가는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술 한잔하게 되고,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 그리워지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런 생활 패턴으로는 안 되겠다 싶은 생각에 대부분의 짐을 시골 친가로 내려보내고 혼자 기거할 정도의 작은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주위 사람의 권유로 식사 패턴도 바꿨다. 아침 식사는 주스나 선식 그리고 과일과 영양 떡을 주문해 한 쪽씩 먹었다. 점심은 직장에서, 저녁은 퇴근하면서 외식으로 해결했다. 이 식습관을 계속하니 오히려 편했고, 특히 아침 식사는 건강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다시 술 한잔을 찾게 되면서 차츰 술에 의지하는 횟수와 양이 늘어갔다. 또 회식 자리가 많은 금요일엔 늘 술에 흥건히 취한 채 귀가했는데, 집에 와서도 이국의 가족이 그리운 마음에 한잔 더 들이켜곤 했다. 그러고는 토요일 오전 식탁에 멍하니 앉아 늦은 아침으로 해장을 하면서 대부분의 기러기 아빠처럼 술로 찌든 주말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이렇게 무너지면 아이들 뒷바라지를 계속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엄습해왔다. 그때부터 퇴근 후엔 지쳐 잠이 들 때까지 책을 보거나 아이들에게 전할 이야깃거리를 메모하거나, 편지를 쓰거나, TV나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어떤 분은 운동 후 사우나를 하고 잠들면 좋다고 한다).

또 토요일에는 무조건 등산이나 운동, 그렇지 않으면 시골집과 처갓집을 왕래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차츰 생활에 활력이 돌았고,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면서 마음의 평안도 되찾았다. 조기 유학으로 인한 기러기 아빠의 삶은 꽤나 긴 여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여정을 항상 긴장하고 살 수만은 없다. 나태해졌다가 힘을 내고 다시 넘어지기도 하는 수많은 반복의 삶일 수밖에 없다. 넘어졌을 때 빨리 일어나고 나태해졌을 때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 방법을 찾아내는 그런 삶이 기러기 아빠의 삶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정도의 고통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인생이 어느 순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처럼 많은 짐을 지고 직장을 떠나야 하는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그 조직에서 너무나 많은 도움을 받고 중책을 맡으며 살아왔기에 조직이 어려울 때 그 짐을 내가 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다는 절망감과 위기감도 함께 찾아왔다.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이국의 가족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 힘든 모습을 지켜보던 동생이 아내에게 연락을 했고, 아내는 당시 중3인 딸과 고2인 아들아이를 남겨둔 채 귀국했다. 양쪽의 살림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나 혼자 감당할 짐도 무거운데 아이들에게까지 짐을 지우는 것 같아 나는 태어나서 가장 큰 화를 아내에게 쏟아냈다. 아내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통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오른쪽) 아이들은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지칠 때마다 이 편지를 보며 마음을 곧추세웠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번도 남편의 의사에 반한 적이 없던 아내가 내 앞에서 정신없이 술을 마시더니 “야! 허용무, 너 나와봐.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하며 쓰러지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잘못하면 아이들과 함께한 가족 모험이 이것으로 종결되고 가족 모두가 무너질 것만 같았다. 나도 마음을 가다듬고 아내의 마음을 추스린 후 다시 아이들에게 보냈다. 하지만 이후 4~5번의 병원 신세는 어찌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내게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는데, 나의 힘든 모습을 아내나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자신의 힘든 모습이나 못난 모습을 가족, 특히 자식에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전화나 이메일, 손편지를 통해 자연스럽게 내 고통과 힘든 사정을 가족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이 몫은 아버지의 몫이고 따라서 아버지가 능히 지고 갈테니 너희도 지금 너희의 몫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걸 잘 이겨내기 바란다”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러다가 넋두리가 과하다 싶으면 미안하단 말도 솔직히 전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 가족은 서로 위로하며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힘든 시간 동안 내 가족, 특히 아이들과 함께 나눈 경험은 아이들을 좀 더 여물게 키우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

기러기 아빠 생활을 먼저 경험한 인생 선배인 허용무 박사는 조언한다. 가족 모두가 기러기 가족의 삶이 꽤 긴 여정임을 인정하라고. 그리고 어느 정도는 아이에게 부모의 상황을 공유하라고.

터널 끝에 눈부신 햇살이 비치듯 나는 이렇게 힘든 과정에서도 조기 유학을 보낸 자식에 대한 끈을 결코 놓지 않았다. <기러기 아빠의 편지>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나는 자식에게 지속적으로 전달하고 싶은 인생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늘 생각해왔다. 예를 들어,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공부해야 할까?’ ‘어느 정도 해야 할까?’ ‘사람 사는 도리는 무엇일까?’ 등 아이들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을 가능한 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또 다양한 채널을 통해 아버지의 심정과 가족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할아버지나 할머니께 편지나 전화를 자주 드리게 하는 등 한국의 정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이끌었다. 또한 미국 문화를 이해시키기 위해 내가 스스로 공부한 바를 아이들에게 알려주기도 했고, 인생 선배로서 삶의 순간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해주고 싶은 말이 생각나면 가던 길도 멈추고 메모해두었다가 이메일로 보내주곤 했다. 훗날 아내를 통해 전해 들은 바로는 나의 이런 노력이 아이들로 하여금 사춘기를 큰 어려움 없이 보낼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수많은 형태로 이루어진 우리의 대화는 아이들의 마음을 점점 굵게 만들었고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나와 아내의 마음까지도 헤아리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런 시간을 거치며 아들딸 모두 잘 자라주었고 주립대학인 위스콘신 매디슨 Wisconsin Madison에 입학했다. 아들아이는 생물 의학 공학, 딸아이는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기러기 가족의 생활은 마무리 되었다. 지금 아들아이는 군대에 다녀와 마지막 학기를 보내며 펜실베이니아 Univ. of Pennsylvania 대학원의 입학 허가서를 받았고, 딸아이도 범죄 심리학 전공을 위해 대학원에 원서를 넣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아들은 고1 때 미국에 건너갔고 이후 한국에서 군 생활도 해서 한국적 사고가 강한 반면, 딸아이는 중1 때 건너가 생활해
자기 의사 표현이 강한 아이로 자랐다. 딸에게 명성이 높은 대학원으로 원서를 넣으라고 했더니 명성이 조금 낮아도 평생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내용의 메일을 3장씩이나 보내왔다. 스스로 날개를 펴고 제가 날아가고 싶은 곳으로 날아가고 싶다는 뜻이다. 이것이 조기 유학을 마무리하며 남겨진 나의 몫이다.

(왼쪽) 두 아이는 지혜롭고 성실하게 자라 아들과 딸 모두 미국에서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자수성가해 이룬 모든 것을 자식의 조기 유학을 위해 온전히 투자한 케이스다. 그러다 보니 내 또래가 은퇴할 시기에 나는 노후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 경제적 부담과 정신적 불안감이 엄습하곤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은 없지만, 삶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소신과 계획은 기러기 가족에게 주어진 영원한 과제인 것 같다. 하지만 터널의 끝에 눈부신 햇살이 비치는 것처럼 많은 기러기 가족이 이 경제적ㆍ정신적 고통의 시간을 현명하게 극복하길 기대해본다.


허용무(정화예술대학 부총장) 사진 하성욱

최혜경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