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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여자] 법정 스님이 남긴 책들

법정 스님이 남긴 책을 읽는다. 수도자로 살아온 삶이 곧 경전이었다. 다시 공 空으로 돌아가기 위해 세상의 모든 흔적을 흩어버렸지만, 일주문에서 떨어진 눈 녹은 물이 잠든 머리를 때리듯, 말씀들이 미명에 가득 찬 세상을 깨운다. 지난해 말 모든 책이 절판됨으로써 스님의 글은 더이상 속세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얼음 속에 숨어 흐르는 개울물처럼 차고도 쟁쟁하게 남아 있다. 그 흔적을 좇으려는 사람에게는 아직도 보인다.

자신으로부터 출발해 세상에 도달하라
책과 차. 법정 스님이 버리지 못한 욕심 두 가지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라고 했다. 전기와 수도도 없는 오두막에 방석 하나와 등잔 하나를 두고 살면서도 머리맡에는 늘 책이 있었다. 가까이 두고 읽던 책을 보면 스님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엿볼 수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장 피에르 라셀 카로티에의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프랑수아 를로르의 <꾸뻬 씨의 행복 여행>,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 등이다. 모두 자기로부터 출발해 타인에 도달한 사람들, 세상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세상에 자기 자신의 것을 모두 준 사람들이다. 결국에는 세상을 바꾼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진리를 향해 걸어간 구도자나 마찬가지다.
“살 때는 삶에 철저해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해 그 전부가 죽어야 한다. 삶에 철저할 때는 털끝만치도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일단 죽게 되면 조금도 삶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 사는 것도 내 자신의 일이고 죽음 또한 내 자신의 일이니….”(<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134쪽)
살 때 철저하고, 죽을 때 철저해야 한다는 말씀은 여러 책에 나온다. 한 치도 물러섬 없는 치열함, 순간을 사는 열정은 홀로 있어도 마찬가지다. 나와 이웃의 경계, 나와 사물의 경계, 나와 자연의 경계가 없다. 다만 그들을 위해 살 것이 대자대비 大慈大悲의 뜻인가 보다.

풀 먹인 행전을 한 오두막에 사는 수행자
강원도의 산골, 화전민이 두고 간 오두막에서 스님은 속세에서의 마지막 10년을 보냈다. 그전에는 송광사 불일암에서 20년을 머물렀다. 새벽에 일어나 개울의 얼음을 깨 물을 길어와서는 불을 지폈다. 난로에 물을 올려 차를 마시고, 공양을 했다. 의자와 침상을 만들고, 흙방을 지었다.
수도와 전기 같은 문명 대신 불편을 선택한 이유는 자유롭기 위해서다. 시계조차 없애버리자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게 되었다. 시간 밖에서 만나는 건 땅과 물과 불, 무한의 세계다. 방석 한 장과 등잔 하나를 들인 방은 말 그대로 소욕지족 少欲知足이었다.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크고 많은 것에서보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있다. 크고 많은 것만 원하면 그 욕망을 채울 길이 없다.”(<오두막 편지> 243쪽)
스님은 군불을 들이면서 노래하고, 차를 음미하며 아껴 마시고, 꽃에도 말을 걸며 세상을 음미했다. 소로나 니어링 같은 생태주의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수행자의 도심 道心이다. 스님은 풀을 먹인 행전을 했다. 무릎 아래부터 발목까지 두르는 행전은 눈에 띄지 않는 데다 거치적거려 요즘은 행전을 한 스님이 드물다. 스님은 밤 10시 이전에는 자리에 눕지 않고, 3시 이전에는 일어나 새벽 예불을 꼭 드렸다.
“따라서 삶은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가 끼지 않게 하라.”(<아름다운 마무리> 142쪽)
수행에 대해서 별말 없으셨던 스님은 오두막을 청소하며 얻은 생각에 대해서는 빙그레 웃으신 모양이다. 육조 혜능의 게송보다 ‘청소 게송’이 저마다의 오두막에서 훨씬 설득력이 있다고 말씀하신 걸 보면.

무소유, 무한량의 자유로움
비구 比丘란 거지란 뜻이다. 물질의 거지뿐 아니라 세월의 거지가 비구다. 무한히 비웠다는 것은 무한히 자유롭다는 것이다. 집착을 비워야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비워야 진리가 오롯이 채워진다. 수행자에게 무소유는 계율이다. 가진 것이 없을 때 맑음이 유지되고, 맑음이 유지될 때 맑음이 채워지며, 마음을
밝히는 일에 열중할 수 있다. 삶에서 무소유는 가난뱅이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미래를 기대하지 말며, 과거에 집착하지 말며 오직 현재만 사는 지혜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이 불안과 슬픔에 빠져 있다면 그는 아마 지나가버린 과거의 시간에 아직도 매달려 있는 것이다. 또 누가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잠 못 이룬다면 그는 아직 오지도 않은 시간을 가불해 쓰고 있는 것이다.”(<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23쪽)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갈 때처럼 안팎으로 거리낌이 없어야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아름다운 마무리> 31쪽)
나무가 필요한 만큼의 물과 햇빛으로 꽃을 피우고, 때가 되면 떨구듯이 순리에 순응해 바람처럼 사는 세월의 거지가 무소유의 삶이다. 다음 순간을 위해 이 순간을 희생하지 않고 이 순간의 기쁨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또한 무소유의 삶이다.

생의 한순간, 순간을 놓치지 말라
모든 것은 지나가지만, 모든 것은 생에 단 한 번 지나간다. 오늘의 괴로움도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얽매이지 말아야 하지만,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면 안 된다. 매 순간은 일생일대에 주어지는 단 한 번의 기회, 일기일회一期一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내일 일을 누가 아는가. 이다음 순간을 누가 아는가. 순간순간을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중략) 녹슨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삶이 녹슬면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73쪽)
‘헛되이 보내지 않기’는 <일기일회>뿐 아니라 <무소유> <산방한담> 등에도 자주 나오는 말씀이다. ‘무소유’와 ‘일기일회’ 이 두 가지는 스님이 즐겨 하신 법문이다.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서는 늘 깨어 있고 엄정하게 살아내야 한다. 엄정함 때문에 불교가 은자의 종교라고 착각하는 이가 많지만, 얼음 속 냇물과 같은 엄정함이다. 차가운 불꽃과 같다.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 나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고 매 순간 자각하라.”(<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47쪽)
일기일회를 잊지 않으면 시절 인연의 봉오리를 완상 玩賞할 수 있을 것이다. 인연이 될 씨앗이 있더라도 그것이 시절을 만나지 못하면 피어나지 못하므로. 아름다운 달빛을 보는 것도,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도, 외로움에 사무치는 것도 이유가 있음을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주어지는 모든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이 세상은 고해의 바다라고 한다. 괴로움 없는 인생이 어디 있는가. 괴로움을 끊기 위해서는 자신의 등뼈 외에는 어디에도 기대서는 안 된다. 기도는 자신의 등뼈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중심 잡힌 마음이야말로 본래 자기다. “기도는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자산이다. 사람의 이성과 지성을 가지고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기도가 우리를 도와준다. 기도는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간절한 소망이다.”(<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32쪽)
어느 날, 슬픔에 찬 여인을 산에서 배웅한 뒤 스님은 어둠이 짙게 내린 뜨락을 거닐며 보름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달이 떠오르자 스님은 합장을 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다 행복하기를 바라는 기도를. 그 여인은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산을 내려갔다.
시시각각 변하는 인간의 무상한 삶을 어떻게 지고 나갈까? 스님은 어쩌면 “무상하다는 말은 허망하다는 것이 아니라 ‘항상하지 않다’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다.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무쌍한 것이 우주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우주와 어떻게 율동할까?’라고 질문을 바꿔야 한다”고 말씀하실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 ‘나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고 순간순간 지각하라. 한눈팔지 말고, 딴생각하지 말고, 남의 말에 속지 말고, 스스로 살피라. 이와 같이 하는 말에도 얽매이지 말고 그대의 길을 가라.”(<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47쪽)
살 때는 철저히 그 전부를 살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해 그 전부가 죽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 행복해야 한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행복한게 진리이므로.

<무소유> <서 있는 사람들> <물소리 바람 소리> <산방한담> <새들이 떠난 숲은 적막하다> <텅 빈 충만> <홀로 사는 즐거움> <오두막 편지> <아름다운 마무리>는 법정 스님의 산문집이다. <산에는 꽃이 피네> <봄여름 가을 겨울>은 <무소유>부터 <산방한담> 등의 책을 추려 뽑은 엮음집이다.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역시 스님의 산문을 추려 뽑은 책으로 류시화 시인이 엮었다. 스님의 생각이나 말씀을 간결히 옮겨놓았다. <일기일회>는 스님의 법문집이며, <내가 사랑한 책들>은 출판사에서 스님이 꼽은 책에다 설명을 덧단 책이다.

글 김수영(시인) 풍경 사진 출처 게타이미지 담당 최혜경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