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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놀이_연 날리기]민속 연 전수자 노성도 씨에게서 듣는 전통 연 문화 동네 꼬마 녀석들 추운 줄도 모르고 연을 날리고 있네
낮달처럼 높이높이 떠오르고, 길조처럼 멀리멀리 날아가는 우리 전통 연. 아버지가 풀을 바르고 꽁숫구멍을 뚫어 상하좌우의 균형을 맞춘 방패연 하나 들고 온 가족이 신나게 이 겨울을 누비는 건 어떨까. 국내 유일의 전통 연 무형문화재 전수 조교인 노성도 씨에게서 우리 연에 담긴 과학, 역사, 신앙을 들어봤다.

우리 어릴 땐 정말 코 깨지게 추운 겨울이었다. 소한, 대한 추위 다 지나도 빨래는 줄에 널기가 무섭게 버썩버썩 뼈를 곧추세우고, 함석 지붕 골마다 고드름이 번쩍이곤 했다. 징하게 추웠지만 사내아이들은 물코를 흘리며 사방치기, 자치기에 신나 있었다. 계집아이들은 공기놀이, 고무줄놀이하며 골목을 누볐다. 고뿔 들게 싸돌아친다고 혼쭐나면서도 온 동네를 누비던 그 시절, 겨울 놀이의 백미는 역시 연날리기였다. 아버지가 댓살을 다듬고 종이를 잘라 시위적시위적 만들어 준 연을 들고 사내녀석들은 빈 들판을, 학교 운동장을 누볐다. 요리 조리 공중을 헤엄쳐 다니며 까부는 가오리연도, 느릿하게 떠올라 호쾌히 나는 방패연도 비할 데 없이 멋진 놀잇감이었다. 계집아이들은 얼레 한번 잡아볼까 싶어 오라비 뒤를 강아지처럼 따라다니고, 그 뒤를 동네 강아지들이 겅중거리며 쫓던 겨울 오후….

국내 유일의 전통 연 무형문화재(서울시 지정 제4호 지연장 紙鳶匠) 노유상 옹의 전수 조교인 노성도 씨(올해 108세인 노유상 옹의 뒤를 이어 둘째 아들인 노성도 씨가 전통 연 제작과 보급에 힘쓰고 있다)야말로 이 놀이를 즐겁게 추억한다. “제가 50대인데 이 또래에겐 특히 연날리기만 한 겨울 놀이가 없었죠. 그땐 하늘이 활짝 열려 있었잖아요. 서울 같은 도시도 전봇대가 많지 않았고 집도 사람 키만큼 다 작고. 어머니가 일 년 동안 쓸 실을 밤새 꼬아서 농에 넣어두셨는데, 그걸 몰래 빼내 연줄로 쓰다 된통 혼나기도 했어요. 연싸움하려면 연줄을 두껍게 만들어야 하는데, 옛날에 이런 화학 실이 어디 있나요. 천장에 철사 고리를 매단 다음 얇은 명주실 세 가닥을 걸어 넣고 일일이 손으로 꼬았어요. 어른들이 민어 부레 끓인 물에 사기 가루를 타서 연줄에 먹여주면 그걸 들고 나가 온 동네 녀석들 연줄을 다 끊어놓곤 했죠. 옛날 놀이는 모두 땅에서 이뤄졌는데, 유일무이하게 연날리기만은 하늘을 이용하는 놀이였어요. 연을 하늘 높이 날리며 하늘을 나는 꿈을 꾸기도 했죠. 요즘 아이들은 이렇게 좋은 호연지기의 놀이를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노유상 옹이 열다섯 살 무렵 박근석 씨에게 연 만드는 기술을 배운 게 이 집안과 연의 첫 인연이었다. 노유상 옹은 대한제국 시절 근위병으로, 한국전쟁 때는 야전군 연대장으로 군 생활을 하다 1956년 특무대 중령으로 예편하기까지 평범한 삶을 살았다. 1956년 연에 애정이 각별한 이승만 대통령이 ‘제1회 전국 연날리기 대회’ 개최를 지시하고, 전통 연 제작이 가능한 사람을 수소문하면서 노유상 옹은 연 만드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두 달 만에 100개의 연을 만든 후 그는 그 일을 일생의 업으로 삼게 됐다. “연희동에서 ‘연 집’ 하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지요. 하지만 살림살이는 녹록지 않았어요. 그 시절에 육군 사관학교를 나와 특무대 중령 출신이었으니 돈 벌 길도 많으셨지만 아버지는 돈의 유혹에는 관심도 없었어요.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장사로 생계를 이었지만,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어요.” 노유상 옹의 큰아들이 전통 연 제작을 전수받다 세상을 먼저 떠난 후 둘째 아들인 노성도 씨가 그 뒤를 잇고 있다.


1 민속 연 무형문화재 전수 조교인 노성도 씨.
2 방패연에 쓰는 댓살은 왕대나 참대를 말린 고황죽으로 만든다.


3 노성도 씨가 만든 용무늬 방패연.
4 노유상 옹이 만든 문자 門字 연.


“우리나라의 연은 그 역사가 아주 깊어요. <삼국사기>에 보면 신 라 진덕여왕 때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키자, 김유신 장군이 반란군을 평정하기 위해 연을 만들어 전략적으로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동국세시기>를 보면 최영 장군이 몽고군을 정벌할 때 연에 갈대씨를 담은 주머니를 달아 띄워 그 갈대숲이 무성해지자, 그 숲을 불살라 성을 점령했다는 기록도 나오고요. 속설에는 최영 장군이 탐라국 평정 때 군사를 연에 매달아 절벽 위에 상륙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섬과 육지를 연락하는 통신수단으로 연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연의 문양에 따라 명령이 달랐는데, 예를 들면 삼봉산의 문양이 있는 연을 날리면 군사들은 삼봉산에 모이라는 뜻이지요. 이 삼봉산 연은 지금까지 충무(통영) 지방에 전해집니다. 이렇게 연이 군사적 용도로 사용돼다 연날리기를 좋아한 영조대왕 때부터 민중에 보급되었다고 해요. 일본이 민족정신 말살 정책으로 민속놀이를 금지하는 바람에 명맥이 끊기는 듯하다가 이승만 대통령 때 전국 연날리기 대회가 생기면서 다시 이어진 거죠.” 절절 끓는 아랫목에 누워 듣는 옛날이야기처럼 ‘연의 문화사’가 자분자분하게 이어진다.

연날리기가 민중의 놀이가 되면서 농한기인 음력 12월부터 연을 날리기 시작해 정월 대보름에 절정에 달했다고 한다. 대보름이 되면 ‘액을 띄운다’고 해 연에 ‘송액영복 送厄迎福(액을 보내고 복을 맞아들인다)’이라고 써서 연을 멀리 날려보냈다. 보통 대보름이 지나면 연을 날리지 않는 것이 옛 풍속이었는데, 다시 농사 준비를 시작해야 할때이기 때문이다. 한 해 동안 나쁜 액은 멀리멀리 물러가고 좋은 일만 한껏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 그 귀한 기복의 전통을 우리는 왜 놓아버리고 있는 걸까.

“전 세계적으로 연이 없는 나라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 연들은 연실을 많이 풀어 높이 띄우는 데 치중합니다. 우리 연은 바람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한데, 연을 날리는 사람이 어떻게 조종하느냐에 따라 상승과 하강, 좌우로 돌기, 급상승과 급하강, 전진과 후퇴가 가능합니다. 그건 바로 어느 나라의 연에도 없는 ‘방구멍’이 있어 맞바람의 저항을 줄여주고 뒷면의 진공상태를 메워주기 때문이지요. 강한 바람을 받아도 방구멍을 통해 바람이 아래쪽으로 흘러 연이 뒤집히지 않는 원리지요. 이 때문에 우리에게 ‘연싸움’ 문화가 있는 겁니다. 창호지를 지탱하는 대나무 살의 굵기와 무게, 연줄의 팽팽한 균형 등에도 정밀한 과학 원리가 숨어 있어요. 그래서 제대로 된 연의 이치를 깨닫는 데만 10년이 넘게 걸립니다.” 지상과 천상의 다리를 놓는 바람의 게임, 그 멋진 놀이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노유상 옹 일가는 한국민속연보존회를 만들고, 노성도 씨의 조카 노순 씨가 사무국장으로 일하며 전통 연 제작과 보급에 힘쓰고 있다.

(왼쪽) 한강문화커뮤니티센터에서 열리는 연 만들기 교실에 참여한 아이들. 왼쪽 두 개의 연이 비교적 만들기 쉬운 가오리연, 오른쪽 연은 우리 연에만 있는 독특한 방구멍을 낸 방패연.

겨울 강이 쩡쩡 울음소리를 내던 날, 한강공원 옆으로 한 무리의 초등학생이 직접 만든 연을 하늘에 띄운다. 느린 몸짓으로 떠오른 방패연이 유장하게 강을 가로지른다. 저 방패연은 겨울 하늘에 난 창문 같다. 이 숨 가쁜 세상에 아이들이 하늘에 낸 숨구멍. 동네 꼬마 녀석들 추운 줄도 모르고 언덕 위에 모여서 풀 먹인 연실에 작은 마음 하나씩 띄워보낸다.


연 만들기를 체험하고 싶다면
서울시에서는 반포한강문화커뮤니티센터에서 1월 25일부터 29일까지 전통 연 만들기 교실을 운영한다. 한국민속연보존회 노순 사무국장과 서울시 무형문화재 지연장 전수 조교인 노성도 씨의 지도로 방패연과 창작 연을 만들고, 센터 앞 한강공원에서 연날리기와 연싸움 체험 등을 함께 한다. 초등학생 이상 어린이 가족과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며 참가비는 없고, 연 재료비 4천 원만 현장에서 부담하면 된다. 서울시 원클릭 통합 예약 시스템(yeyak.seoul.go.kr)에서 예약 가능하고, 자세한 사항은 서울시 한강사업본부 홈페이지(02-3780-0799, www.hangang.seoul.go.kr) 또는 한국민속연보존회(02-701- 9408, www.koreakite.or.kr)로 문의하면 된다.



취재 협조 서울무형문화재 교육전시장(02-747-0303), 한강문화커뮤니티센터

글 최혜경 기자 사진 하성욱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